하느님 나라의 종말적 성격

① 나자렛 예수가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선포했다는 역사적 진실성은 예수 이전의 예언자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단절성이 드러나는 예수의 선포이고 새로운 모습이다. 하느님 나라는 설명하거나 정의하지 않는다. 그의 설교는 당신 언어를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이에게, 애타게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는 이를 향해서 말한다. 마르 15,43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왔는데…” 이런 희망은 구약성서의 맥락에서 종말론적이었다. 유다이즘에서 예언자의 메시지 선포는 메시지 자체에 더 강조점이 주어지고 있었다.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한다기 보다는 하느님 나라가 계시되고 드러나는 메시지에 더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는 종말적 순간에 확인되는 도래로 나타난다. 도래하는 미래의 현실에 속하는 것이다. 그 자체로 선한 현실이고 하느님 영역에 속해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여기에 마지막 시간의 특성이 나타나고 있다. 도래하는 이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업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기 위해 우리는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규정할 수 없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준비할 수 있지만 규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미래에 속해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순수한 선물이다. 인간에게 무상으로 제공된 하느님의 업적으로서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정복,획득이 가능한 것이 아니다. 전혀 손댈 수 없는 것이다. 이런 하느님 나라의 모습은 구약에서 선포된 하느님 나라와 다르다. 예수의 메시지는 선포되는 메시지보다 도래하는 하느님 나라에 중점을 두었으며, 예수는 자신의 위격에 중점을 둔다. 그러나 이런식의 하느님 종말의 기다림은 특이한 것이 아니다. 종말적 희망을 갖고 있던 이들에게 예수의 선포안에서 희망을 갖는 것이다. 여기서 새로움이란 하느님의 나라가 왔다는 것이고, 미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현재 왔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복음, 기쁜 소식인 것이다.
그러나 특이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미’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현실적 측면을 선포한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현존, 하느님 나라의 업적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점이었다. 이런 하느님 나라의 절박함은 선포되는 이 순간에 도래하였고그 구체적인 표징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여러가지 구마행위․기적․비유․사랑과 자비의 행위들이다.
마치 동이틀 때 이미 어둠이 물러나는 것 처럼 이와 같이 하느님 나라의 급박함을 넘어서 이미 다가왔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마태 12,28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귀신들을…왔습니다.” 예수는 여기서 마귀를 쫒아내면서 이미 예수의 행위안에 현존하고 작용하는 하느님의 나라의 권능을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초대한다. 이미 많은 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현존을 깨닫도록 그 효과가 드러난다. 이런 표징은 이미 작용하지만 미래의 공간을 남겨놓고 있다. 현재와 미래에 대한 두 선언을 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가 왔고, 작용한다는 것과 한편으로 기다리고 희망하는 나라로 나타난다. 이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의 선포 안에는 하느님 나라의 영광스런 도래와 함께 완전히 성취된 과정이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예수의 이전의 지상적 행위와 하느님의 종말적 개입이 신비안에서 시작된 것이다. 예수의메시지는 종말론적이고, 종말론적 메시지를 표현하는 언어뿐 아니라 그 자체가 종말적 업적을 동반하고 종말적 사건을 나타내고 있다. 그 메시지는 현재에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종말에 이루어질 것과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현시를 중시하며 미래를 선행한다. 따라서 끊임 없는 회개와 깨어있음이 요구된다. 따라서 종말적 현실은 종말론을 여러가지로 해석하는 시간을 초월해서 이루어지는 모습으로 해석하는 것과 비교해서도 안되고, 단순히 인간적 존재의 질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으로 존재론적 분석에로 환원시켜도 안된다. 또한 재림의 기다림을 제거하는 하느님 나라의 메시지를 실현된 종말론으로서 축소시킬 수도 없다. 지금 이루어지면서 다가오는 사건이며 도래하는 사건, 미래에 충만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가오는 동시에 성취된 시간의 위대한 현실을 나타낸다. 시간이 성취된다는 이스라엘의 사고는 순수한 연대기적인 것보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함께 이루어지는 사건으로 나타낸다. 현재와 미래 사이의 긴장을 나타낸다. 단순한 기다림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악이 지배하는 죄와 죽음은 지속적으로 존재할 것이다. 이런 예수의행위가 이미 시작되었고, 그분이 가르침안에 승리가 드러난다. 이는 점진적으로 구원이 성취되는 역사 안에서 성장될 것이다. 따라서 현재 혹은 미래에 대한 선입견 없이 대한다면 예수의 대화 안에서 현재, 미래 중 어떤 것도 강조하지 않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이미 오고 있고 지금 오고 있는 미래에 대한 선포인 동시에 실질적으로 참여를 나타낸다. 이는 인간의 현실과 미래를 포함하여 그 삶을 사로잡고 존재의 변화를 일으킨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관계되어 있는 한에 있어서 하느님 나라가 선포되지만 하느님의 나라가 역사 안에서 성취되는 것은 하느님의 메시지와 업적에 인간의 대답이 이루어질 때 성취된다.

이 글은 카테고리: 신학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