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이어서 하느님 나라의 종말적, 신론적 성격에 대해서 보기로 하겠다. 하느님 나라의 가장 큰 특성은 종말적 특성이다. 그런데 그 종말적 특성은 신론적 현상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메세지 안에서의 하느님 나라의 근본적인 새로움이라면 바로 이러한 것이라고 하겠다.
하느님 나라는 종말적 성격 안에서 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강조된 긴장을 살펴 볼 수 있다. 특히 이 긴장은 두가지 종류의 선언들 안에서 나타나고 있다. 하나는 절박한 형태안의 하느님 나라 강조와 예수의 설교와 모습을 종말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선언들과, 다른 하나는 신론적 신학적 개념 안에 해석되고 하느님의 계시를 강조하며 이에 대한 인간의 대답을 자극하는 여러 선언들을 말한다. 이 두 차원은 모두 존중되어야 한다. 종말적 차원과 신론적 차원 모두가 말이다. 맨 처음에 세례자 요한에 대해 살펴 보면서, 요한의 메시지는 하느님의 종말적 심판을 강조하고 그 심판을 표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불충실함, 결실을 맺지 못한 그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강조하고 있다. 종말에 대한 선포안에서 위기, 위협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회개를 통해서만 피할 수 있다고 요한은 말한다. 그러나 예수의 메시지는 절박한 선포로서가 아니라 당신의 위격, 당신의 도래로서 이미 오기 시작한, 이미 도래한 새로운 시대에 참여한 것으로서 그 새로워진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이 세대가 끝나려고 하는 어떤 묵시적 표징에 촛점을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출현, 예수님의 사명과 함께 시작되려는 새로운 세상의 표징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하느님 나라 사건에 대한 특성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하느님이 행사하시는 주권은 무한한 사랑의 주권으로서, 자비의 주권으로서, 아버지로서의 모습으로서, 예수님의 업적과 말씀을 통해서 계시되고 있다. 따라서 이는 기쁜 소식, 이세상에 살고 있는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누구에게나, 기쁜소식이 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신론적 성격의 중심을 구성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이시고 특히 하느님의 거룩함이다. 실제로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계시는 예수의 삶의 본질적인 면이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시며’, 그분의 성화는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는 것보다도 먼저 예수님이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신 기도 안에서 드러나고 있다.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드러나는 새로운 얼굴, 올바른 사람, 옳지 않은 사람, 모든 이에게 태양을 뜨게 하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선사하시는 하느님의 섭리,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염려로 표현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특성, 부성은 인간과 하느님 아버지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하느님과 인간이 맺은 계악을 상기하며 인간이 갚을 수 없는 빛을 탕감하여 주시는 분, 그러할 정도로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시는 아버지와 인간의 관계속에 삽입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거룩함, 아버지의 선하심은 인간의 어떤 업적 이전에 자비로운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이니시어티브가 드러나고, 회개하는 죄인을 위해서 하늘에서 기쁨을 선포하는 복음의 비유, 예를 들면 죄인들을 향한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예수의 계시하시는 아버이의 무한한 사랑 ,자비 거기서부터 하느님나라의 종말적 성격이 무엇인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거 없는 이들에게 당신을 내주면서 은총의 시기가 펼쳐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아버지의 용서하시는 죄를 용서하시는 절대적 사랑의 말씀과 행위안에 우리는 언제든지 초대받고 있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형제들의 잘못을 용서하며 원수들까지도 사랑하라고 , 우리 자신이 그렇게 해야한다고 요청받고 있는 것이다. 예수가 계시하시는 이러한 아버지의 얼굴은 보상을 바라는 인간적인 계산을 초월하고 있다. 당신의 사랑을 통교하고 우정을 통교하는 그러한 하느님의 얼굴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것은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을때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어린이처럼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신안에 이미 도래한, 도래할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란 것, 그분의 은총에 의한 것이지 인간적인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노동을 통해 댓가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조건은 어린이들의 행위와 같은, 어린이 같은 마음으로 아버지를 받아들 때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하세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율법의 업적을 성취하는 것으로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오리혀 배제하여야 하고-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데 촛점이 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는 이러한 종말적 현실을 내포하고 있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계시다. 예수님의 하느님의나라의 선포는 종말적인 면을 갖고 있기에 현재와 미래의 긴장사이에서 절박한 면 또한 갖고 있다. 이러한 하느님 나라를 계시하실 뿐 아니라 실제로 하느님 나라를 가져다 주고, 하느님과 통교를 가져다 준다. 종말적인 차원이 있지만 그 종말적 특성을 규정하는 것은 신론적 성격이다. 이는 하느님 아버지의 계시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당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계시하면서, 하느님 앞에 우리 인간이 어떻게 행동을 취해야 하는가, 무한한 신뢰와 사랑과 순종의 대답이 인간에게 요구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하느님 나라는 예수에게 있어서 이데올로기나 이론으로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체험되고 생활된 하나의 현실이다. 그분은 실제로 이 하느님 나라안에서 그 나라를 체험하고, 그 현실에 살고 계시다. 예수 안에서 본질적인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 나라를 지배하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이시이고 그분의 뜻에 의해서 예수의 유일한 관심은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라고 할 때 하느님의 다스림과 더불어 아버지의 무한한 충실성과 자비와 용서와 사랑이 충만하게 표현되고 실현되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연상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과 아버지의 관계가 어찌해야 하는지가 나타나는 것이다. 즉 역사에 대한 인간적 현실에 대한 비판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즉 아버지를 축으로 해서 우리의 자세, 사회공동체, 정치, 경제등의 모든 면에서 다 포함되는 것이다. 이 축에서부터 우리의 인간 삶이 비판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체험된 현실의 하느님 나라에서 우리의 요점은, 크리스챤으로서 믿는 이로서 생활할 때 우리의 요점은, 사랑과 자비와 용서에 있어서의 하느님 나라에 관한 체험을 갖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 아버지의 체험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힘들어 지는 것이다. 신앙은 악세사리가 아닌 것이다. 신앙에 내 존재를 투사하고 전존재를, 과거와 미래와 현재까지를 모두 걸은 것이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안에서, 우리가 어찌 살아야 하는지가, 그 사랑의 관계안에서 드러날 때 하느님 나라가 체험되고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관계가실제로 우리 안에서 체험될 때 올바른 신앙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예수는 사도들을 직접 하나 하나, 밤세워 기도하신 후에, 뽑으신 후에 늘 당신 곁에 있게 하셨다. 그래서 요한사가는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택하였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도들을 늘 당신 곁에 있게 하신 것은 함께 있지 않으면 도저히 이룩할 수 없는 사명을 맡겨질 것이고 함께 있지 않으면 한 시간도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수 없는 그러한 존재로 있게 하시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존재가 필요한 것이며 특히 12사도-12지파를 상징하는-는 새 백성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이 사도는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말하고 선포해야 하기 때문에 먼저 당신 곁에 있게 하신 것이다. 사도들에게 이스라엘 지파를 맡기신 것은 너희들이 내가 역경에 있을 때 함께 했기 때문이라는 조건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수가 사도들에 대해 사도들이 예수께 갖은 체험을 소급하여 동참하여야 함이다. 이는 하나의 규범적인 신앙체험이다. 그 체험에 이에 동참키한 것이다. 삶과 격리된 이데올로기나 지식을 쌓기 위해 신학교 생활을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12사도를 볼때 중요한 것은 그들의 기능이 아닌 것이다. 중요한 것은 존재론적인 면이다. 이떻게 생활하고 어떤 존재로 바뀌는냐의 문제인 것이다. 훌륭한 사제직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찾지 말고 내가 어떤 존재로 변형되어야 하는지를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나의 뜻대로 그리스도의 사제직이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대로 그리스도의 사제직이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와 늘 함께 살면서 그분으로부터 말이나 이론으로서 배울 수 없는, 체험으로서만 느껴지는 신비적인 체험, 그러한 예수의 모습을 마음으로 느끼고 이에 대답을 드리는 가운데에서만 사도직 수행이 가능한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들어 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너희에게는 이미 하느님 나라의 모든 신비가 모두 알려졌다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이는 받지 못했다(마태 13장 11)고 예수는 말씀하신다. 이 신비를 알기 위해서는 당신과 함께 하는 방법밖에 없다. 바로 이들 손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맡겨질 것이기 때문에 더욱 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존재, 이름까지 바뀌는 새로운 존재로 변형됨이 강조되는 것이다.
성서에 나타나는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은 하느님의 거룩함과 본질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지상에 것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거룩함에 기인하고 있다. 이 거룩함과 사랑은 단순한 육체적 존재, 지상적 존재 안에서 완전히 도달될 수 없다. 때문에 더욱 더 하느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존재로 변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존재론적인 조건에서부터 근본적인 변화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충분한 계시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새로운 세상을 바라본다. 현 세상을 초월하는 초월적 종말론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현세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세계, 초월적 종말론을 요구하는 것은 아버지의 거룩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종말론, 현세에 중점을 두고 있는 이스라엘의 종말론이 초월적 종말론으로 변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거룩함에 대한 계시와 종말적 도래 사이의 관계는 주의 기도안에 잘 드러나고 있다(카스퍼 참조). 주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한 본질적인 기도이다. 이름의 거룩함은 하느님 나라의 종말적 도래에 대한 원의를 나타내고 있다. 바로 이 이름 안에서 거룩함이 드러나고 계시되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공관복음의 선포, 예를 들면 마르코 1,15(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과 요한 17,26(나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계시하였습니다)은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바로 이러한 공관복음의 선포와 요한의 하느님 아버의 이름의 계시는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종말적 성격과 신론적 성격이 서로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음을 나타내고 있다. 하느님 나라의 중심적 축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런 신론적 성격인 것이다. 이런 종말적 맥락 안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감히’ 제시하고자 하는 주장이 정당하다고 볼 수 있고 또한 그리 하여야만 한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는 아버지의 거룩함의 충만함으로 차있는 나라라고 볼 수 있다. 아버지의 심오한 현실에 대한 계시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로부터 선포된 하느님나라의 특성은 복음 메세지의 더욱 근본적인 새로운 메세지를 강조해 주고 있다. 당시의 사람들이 이제 새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이전에 구약에서 기대했던, 지금의 불의와 위협을 쓸어버리는 새로운 시기의 메시아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나라가 이미 도래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눈으로 본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새로운 인간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 나라가 강조되면서도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 하느님 앞에 새로운 인간으로서 사랑으로 받아 들여지는 사랑의 관계를 확인하게 되고, 여기에서부터 인간존재의 새로움이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