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종교적 지배계급과 대립되어 있었다. 예수는 율법학자, 바리사이, 사두가이, 종교지도자 등의 공적 인물과 접촉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들의 권위를 비난한다. 반면에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공적 죄인들에게는 호의를 갖고 그들 편에 서 계셨다. 견디기 어려운 짐을 부과하면 권한을 배척한다. 여러 구조(고난, 곤경, 공적구조)에서 벗어나는 예수의 자유가 여기에서 드러난다. 이런 권력에 반대하는 자유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의 자유로운 행위는 사회적 개혁이나 단순한 정의를 요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다. 이는 당시 구약의 예언자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수의 자유로움은 하늘 나라의 선포의 종말적 의미 안에서 나타난다. 예수 안에 하느님의 다스림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이 옹호되고 있는 것은 당시 특권 계층의 신심이 아니라 하느님의 개입안에서 옹호되는 것이다. 자신을 계시하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모든 이에게 주어지는 자유가 나타난다. 열성당원에게도 예수의 말씀은 매력적이었다 -특히 예수의 삶, 죽음. 예수 외에도 근본적 개혁을 추진하는 이들이 있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가 왕, 군주들에 대한 비난, 열성당원으로부터의 연관되었다. 예수의 말씀과 행위를 현세적 메시아니즘 안에서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자 할 때는 잘못된 것이다. 예수는 어떤 권위, 폭력의 도움을 거절하며, 원수를 사랑하라고까지 선언하신다.
예수의 자유로움, 행위는 당신의 메시지와 분리할 수 없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은 당시 혁명가의 주장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었고 상상조차 힘든 혁신적인 것이었다. 당시 혁명당원들은 율법의 물질적, 문자적 순명, 민족주의 안에 얽매어 있었다. 그러나 예수의 메시지는 모든 인종적 한계를 뛰어넘는 친교가 있었다.
예수로부터 선포된 하느님 나라의 정의는 사회적 맥락 안에서 선포된 것이다. 억압과 불의로부터의 해방이 있었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고려하지 않는 정의는 잘못된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서 요구하는 정의가 있었다. 예수는 우선 하느님의 업적을 강조한다. 모든 인간적 업적을 설명하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이니셔티브를 강조한다. 인간의 노력에 결정적으로 희망을 주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가 되는 것이다. 예수는 당시 사회에서 주장하는 것과는 기원을 갖는다. 예수에 있어서는 절대적 순종이 나타난다. 하느님께 의탁, 신뢰를 하였기에 가장 혁명적인 것을 내세울 수 있었다. 인간적 권한의 노름 안에서 인간이 함께 놀아난다는 것, 그러나 예수는 하느님의 진리 안에 있었다.
예수는 하느님의 권리를 추구한다. 예수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 나라 안에 포함된 자유를 선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의 자유는 현세에 등져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의 과제는 행위의 장소로서의 세상과 행위의 규범으로서의 세상을 구별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적 자유는 행위의 규범으로 세상에서 얘기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서는 안된다. 로마 12,2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은 본받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수는 당시 전통적 사제직을 근본적으로 뿌리채 흔들었다. 족벌정치, 세습적 사제직을 예수는 거부한다. 사제이기에 당연히 전통적 권위,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그들이 유대 사상에 머물러 있었다는 의미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는 당시의 사제직에서부터 되도록이면 멀리 떨어지려 했다. 세자 요한은 사람들에게 배척받아 교외에서 활동할 수 밖에 없었다. 예수는 그런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은 것이다. 예수는 종교 지도자들이 무서워서 피한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권위를 근본적으로 배척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근본적인 것을 행하지 못했기에 배척한 것이다. 루가 10,30이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하는가, 예수는 초월적 사랑을 실천하였기에 사제들은 예수를 죽이기로 결정한다. 여기서의 특성은 모든 예식이나 율법을 초월하는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 안에서의 개혁이다. 예수는 근본적인 것과 사랑을 제시하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자유와 사랑의 원칙을 제시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