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특징들,제도,하느님 백성,그리스도의 몸,예수님의 성사,봉사자 등

 

교회본질의 조직신학적 고찰




        교회의 신비적 실재(實在)를 인간의 언어로 정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으며 교회의 본질은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불변성 속에서가 아니라 언제나 역사적 형태 안에서 보아야 하고 역사적 형태는 언제나 본질을 출발점과 목표로 해서 이해해야 한다.




         교회 개념은 당대 교회의 역사적 형태에 의하여 본질적으로 규정된다. 따라서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교회의 이미지, 상징, 또는 유형(類型)과 같은 현상들을 고찰함으로써 교회의 실재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표상과 유형들은 한정된 개념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한 가지만으로 교회의 심오한 내적 본질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각 표상과 유형이 의미하는 내용들을 서로 결합, 보완함으로써 종합적인 관점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1. 제도로서의 교회




        세상안에서 교회는 시작에서부터 작은 무리였으며, 이방인의 위치에 있었다. 유대교 전통을 생명으로 하는 이스라엘과 인간의 특출함을 자랑하던 헬레니즘의 로마세력에 비해 교회의 모습은 왜소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의 정체성 보존도 어려웠다. 그러나 교회의 정체성 보존에 힘을 준 것은 부활의 체험과 삶속에서 느낄 수 있는 성령의 감도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가 곧 도래할 것으로 확신하였고 따라서 교회는 형식과 틀을 필요로 하지 않고 성령께 의지하는 모습을 취하였다. 여기서 교회는 고정되고 조직화된 체계가 아니라 구체적 상황에서 새로이 발생하는 역동적 존재로 나타난다.




        이런 교회관을 성령론적 교회관이라고 하는데 이는 하느님의 새 백성에게 선사된 성령의 은사가 존중되는 교회관을 의미한다. 따라서 조직화, 체계화된 교회가 아니라 역동적인 교회로 보여진다. 이런 교회관이 자리잡게 된 것은 교회가 소규모의 공동체였으며, 부활체험과 하느님 나라가 곧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회관에 바탕을 두고 교회는 주변세계에 적응하며 나갔으며, 정체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교회가 제도화되는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곧 오리라던 하느님 나라의 지연.




   둘째, 자연스러이 부여되었던 사도들의 권위가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남으로 인해 약화되고 그들의 권위를 대체할 새로운 권위의 부재.




   셋째, 공동체가 거대화되면서 발생하는 분열과 신앙인의 갈등. 그런 가운데 교회는 점차 법적, 제도적, 조직적 형태를 요청하게 되었다. 그 예로써 다수의 외경 속에서 정경을 찾는다든가, 사이비 방랑 선교사, 이단과의 대결 등이다.




        교회의 제도화에 촉매역할을 하게 된 것은 첫째로 배교자의 처리문제였다. 이것은 종교의 자유 이후 공동체 형성에 대하여 심각한 문제로 다가왔다. 즉 그들의 속죄, 성사의 방법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또한 가톨릭이라는 보편적 견해에 따른 지역교회간의 해결방안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문제는 결국 법적 절차와 제도적 합의를 통해 그들을 공동체에 귀속시킬 수밖에 없었다.




        교회의 제도화 현상의 결정적 이유는 4세기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종교의 자유’ 이후에 나타난다. 교회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으며 이는 곧 세계의 종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교회와 세계의 간격이 거의 소멸되다시피 한다. 신앙의 삶을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하고 성사적 임무를 받아 새롭게 태어난다는 상념이 포기되지는 않으나 이 상념이 지니는 의미가 질문되지 않은 채 자연스런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그리스도교 국가의 백성으로 태어나 그리스도교적으로 양육되기 대문이다.




        교회의 제도화 현상의 결정적 이유는 4세기 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종교의 자유’ 이후에 나타난다. 교회는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으며 이는 곧 세계의 종교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교회와 세계의 간격이 거의 소멸되다시피 한다. 신앙의 삶을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하고 성사적 임무를 받아 새롭게 태어난다는 상념이 포기되지는 않으나 이 상념이 지니는 의미가 질문되지 않은 채 자연스런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그리스도교 국가의 백성으로 태어나 그리스도교적으로 양육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현세적 국가 질서와 천상적 하느님 나라 질서와 동일시 되었기 떄문이다.




        세속의 일, 자선사업, 가난한 자의 보호, 사법관의 직무 등이 사제 및 주교에게 주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교회는 자신에게 주어진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 새로운 조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교회 권위의 행사가 국가 권위를 모방하여 형성되었다. 로마제국 권위자의 권력과 계급의 복장이 주교에게도 사용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그레고리오 7세 등 중세기의 교황이 교회를 국가와 동렬의 완전히 독립된 사회, 초기의 권위를 가진 사회로 만들고자 한 때에 그 절정에 달했다.




        사회의 현상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제도화 과정은 하나의 진화과정이 아니라 절대적인 안주와 고정화 현상이었다. 교회는 확장되어 가면서 영적인 측면보다 제도적이며 조직적인 모습을 취하여 왔던 것이다. 교회는 외적인 요소만 강조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곧 교계제도와 연결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7, 8세기를 넘어 중세와 근세에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변혁이 처음에는 교회의 신학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었다. 예컨데 성 토마스의 교회론은 신약성서의 교회개념에 가까운 것이었다. 성 토마스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로 생각하고, 특별한 항목으로서의 교회론을 채택하지 않았다. 토마스에게 있어서 교회란 아벨 이후의 모든 의인이 속하는 신자의 집단이다. 교회는 영적이고, 내적인 현실이며, 그것이 눈에 보이는 외적인 교회 조직으로 되어 있는 유일한 공동체이다. 성 토마스는 고대 교부들의 가르침에 따라 교회가 십자가 위에서 생겨난 제도이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새로운 종말적 현실이며, 그리스도교 신자는 이미 그 안에서 생활하도록 허락되어 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성 토마스 직후에 교회론은 변하기 시작했다. 즉 거듭되는 세속군주와의 논쟁이 신학자들에게 교회의 권위와 권리의 범위를 연구하게끔 한 것이다.




        특별히 16세기에 시작되어, 그 후 300년간 계속된 프로테스탄트 학자와의 논쟁이 가톨릭 학자의 교회론에 영향을 미쳐, 가톨릭 학자는 프로테스탄트가 부정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면을 역설했다. 그리하여 일정한 권리를 갖는 가견적 제도로서의 교회를 강조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의 일례로서, 벨라르미노(Robert Bellarmino)에 의한 교회의 정의를 들 수 있다. “교회는 동일한 그리스도교 신앙을 선언하고, 정당한 사목자들, 특히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오직 한 사람인 로마 교황의 통치 아래, 동일한 성사들을 통한 친교로써 결합된 사람들의 집단이다.” 이 정의는 종말적이며, 성령으로 충만된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현존으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베라르미노의 교회관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부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그 근간을 이루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종교개혁자들의 주장과 가톨릭 입장사이의 명확한 구별을 지워주는 일이 최우선의 과제였다.




        교회의 본질적 비가시성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새로운 주장에 대해 무엇보다 우선하여 외적 가시성을 주장한 것은 이러한 연관하에서 쉽게 이해되는 대목이다. 교회는 이런 외적 가시성을 통해 가시적 질서와 구조(제도)안에 진정한 예수의 교회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실 백성안에 하느님의 보이는 징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은 교회의 피할 수 없는 고유의 과제이기도 했다.




        근대 교회론은 교회를 가시성과 교황을 정점으로 한 가시적 집합체로 증명하려고 하였고, 교회를 가시적 하느님의 징표요, 오류를 범하는 인간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 주기 위한 거룩한 산 위의 깃발로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경주하였다. 이 노력은 그 당시의 교회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모든 것, 또한 교회 본질을 모두 다 표현하였다고 볼 수 없다. 즉 교회의 내적 신비와 교회 고유의 본질에 관하여는 거의 간과된 채 벨라르미노의 교회관이 언급되었다고 할 것이다.


        한편 데카르트의 합리주의 철학이래 계몽주의는 인문주의적인 경향을 띠며 신앙과 교회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다.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계몽주의는 하느님 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의 전환이었으며, 전통적인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고, 자연도 신적인 것이 아닌 인간의 탐구대상이 되었고, 구원은 하느님의 선사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구원한다는 확신으로 받아 들여졌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의 성공과 자연과학의 발달은 이러한 인간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하였다.




        결국 인간 스스로가 하느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인하여 무신론자의 출현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복음선포보다도 자신의 실존적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최되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통적인 교회의 입장을 고수하였으며, 교황의 무류성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정체성에는 만족할 만한 해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다만 교회는 불평등 ‘교계제도’와 ‘완전사회’를 연결시킴으로 절대적이며, 완전한 극도의 스콜라적 입장을 고수하였던 것이다.




        이 전통적 교회관의 입장은 만사가 격변하여 안정된 것이 거의 발견되기 어려운 혼란기에 신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그들이 인생의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제시해 주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원에 강한 의미를 주는 장점이 있다. 사실상 이러한 교회 특유의 안정성 때문에 근세 이래 많은 서구의 사상가들이 교회 안에서 고향을 찾았다.




        그러나 이 교회관은 성서와 초대교회 전통 속에 충분한 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개인이나 단체의 신앙생활을 불운한 결과로 이끌기 쉽다. 예컨대 교회의 의무수행에 지나친 관심을 가지게 한 나머지 순명만을 강조하여 정작 신앙생활의 핵심이 되어야 할 사랑의 실천을 소홀하게 하는 점이라든지, 교황과 주교들과의 올바른 관계 정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나머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 지녀야 할 관심을 등한시하게 되는 점등이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밖에도 이 교회관은 성직주의, 율법주의, 그리고 개선주의의 성향을 지닌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교회에서 제도적 요소를 수용하는 것과 제도주의와는 서로 구별된다. 교회가 강대한 제도적 사회 속에서 견고한 조직적 구성 없이 자신의 정체를 보존하고 사명을 수행할 수 없음은 분명하다. 때문에 교회는 실제로 초세기부터 제도적인 면을 지니고 있었다. 초대교회는 사제들을 인정했고 고해형식들을 받아들였으며 전례형식들을 규정하였다. 이 현상들은 정당하다. 그러나 제도가 교회에서 일차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교회는 자신의 모든 실재와 힘을 제도로부터 이끌어내지는 않는다.




2.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신약성서에는 이스라엘이나 하느님 백성을 가리킬 때에 ‘라오스’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신약성서에서 라오스보다 극히 드물게 사용된 ‘에클레시아’라는 용어가 교회를 의미하는 명사가 되었다. 오래동안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성서적 관념이 그늘에 묻혀 있다가 최근에야 다시 표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신자들을 교육하고, 비방자들을 반박하기 위해 여러 가지 표현으로 교회의 실재를 설명하였는데, 주로 성서에 인용된 비유나 상징들을 해석하면서 하느님과 신자들 사이의 종교적 관계를 설명하였다.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포도밭, 예루살렘, 씨앗, 그물, 건축 등의 이미지뿐 아니라 주의 양떼, 성령의 궁전,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배필 등의 고유한 표현도 해설하였고, 그중에서도 신생 공동체의 일상 생활이나 전례 생활을 설명할 때에는 구약에서부터 잘 알려진 하느님 백성이라는 개념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런 표현은 신자들이 가장 직접적으로 쉽게 자신들의 신원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즉 구약의 이스라엘이 하느님 백성이었던 것처럼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인이 하느님 백성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점차 성장하면서 유다이즘과의 공통점보다는 차이점 즉 고유성을 강조할 필요가 커지고, 로마제국의 박해를 받는 상황에서 오해를 받기 쉬운 ‘백성’(독특한 백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보다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강조하는 표현들이 우세해지면서 차츰 하느님 백성이라는 표현을 덜 사용하게 된다.




        중세가 정돈되면서 교회는 전 유럽에 전파되어 유럽전체가 하나의 종교를 가진 거대한 그리스도교 사회를 이룩하였으므로, 구태여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없었으며 모든 사람이 나라의 백성이요 동시에 교회의 백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세인들은 사물의 본질추구에 관심이 컸지만 역사성에 대한 의식이 미약하였으므로, 강한 역사의식을 내포한 ‘백성’이라는 개념에 크게 유의하지 아니하였다.




        근세에 와서 프로테스탄트 측에서 교회의 사회적 조직에 대한 반발로 ‘하느님의 백성’을 교회의 실재라고 주장하고, 모든 신자의 사제직을 내세워 교계제도를 공격하기에 이르자, 가톨릭 측에서는 교계제도와 사회적 조직을 옹호하기에 급급하여 백성의 개념을 깊이 연구하지 못하였다.




        19세기 후반부터 교부학(敎父學), 성서학(聖書學), 전례학(典禮學)의 발전에 의하여 교회의 신비적 본성이 강조되는 한편, 역사의식이 발전하고 성서에서 하느님 구원경륜의 역사적 성격을 깊이 인식함에 따라, 교회는 구세사 안에서 구약의 이스라엘을 계승하는 신약의 백성이라는 점이 재인식되었다. 교회의 생활면에서도 전례운동에 힘입어 강한 공동체 의식이 발달하였고, 전반적으로 민주와 평등에 대한 현대인들의 관념이 교회를 하느님 백성이라는 성서적 개념으로 파악하려는 경향에 부합하였다.




        하느님 백성의 개념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일찍이 그리스도에 의해 설립된 교회의 법적 개념을 극복하고 성서 전체에서 하느님 구원계획의 발전을 찾으려는 작업의 결과이다. 그리하여 교회와 이스라엘의 연속성을 재발견하게 되었고 구세상의 폭넓은 전망 안에서 교회의 진상을 알아내게 되었으며 메시아 시대의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 교회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세계와 교회가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구원계획 안에 포함되어 있으며, 교회가 이 계획의 실현을 위한 ‘구원의 보편적 성사’임을 밝혔다.




        하느님 백성은 ‘평신도’를 뜻하지 않고 구세사의 사건에 참여하도록 불림을 받은 ‘성직자’들을 포함한 모든 신자들을 말한다. 하느님 백성은 구약성서에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 역동적 개념이다. 구약성서 신학의 전승 가운데 기본적인 중요 노선은 하느님이 세상의 모든 백성들로부터 한 백성을 선택하여 이 백성을 구원의 징표로 삼고자 한다는 사상이다. 그래서 하느님 백성이 모든 백성들 가운데서(이사 2, 1-4) 표징으로서 빛을 발할 때 다른 백성들이 하느님 백성으로부터 배우게 되며 이 백성 안에서 이 백성의 매개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하느님 백성에게 모여든다는 것이다.




        여러 민족 중에서 단 한 민족을 선택한다는 것은, 한 민족을 다른 민족들보다 우대한다거나 한 민족을 위하여 다른 민족들을 소홀히 한다는 뜻이기는커녕, 다른 민족들을 위하여 한 민족을 선택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선택된 민족은 다른 민족들에게 하느님의 세상 전체에 대한 계획을 보여 주는 표징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전체가 자기의 호소에 불응하는 그 때에도 예수는 공동체 사상, 즉 하느님의 통치에는 한 백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이제는 자기 제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백성을 탄생시킨다.




        이러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새로운 백성은 이스라엘의 상속자이다. 그래서 하느님 백성(디도 2, 14: 신명 7, 6)은 선택된 민족, 거룩한 민족, 속량된 백성(1베드 2, 9: 출애 19, 5: 이사 43, 20)이라는 옛 이스라엘의 특수 칭호를 상속받는다.




   둘째, 새 이스라엘은 이제 예수와의 관계 속에서 특별한 자기 신분과 정체성을 얻는다. 이스라엘의 대부분은 예수에 의해 선포된 구원을 거절하였다. 한편 다른 많은 이방인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통치에 복종했다. 이점에서 이스라엘과 교회는 불연속성을 가진다.


        교회는 ‘새 이스라엘’이며 ‘영적 이스라엘’이다. 이제 이스라엘의 참된 의미는 민족적 혈통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통치에 복종함이 참 이스라엘의 근거이다. 이렇듯 구원의 도래는 구원 공동체라는 형태를 취한다. 그러므로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활동은 구원 공동체의 형성을 향해 있으며 그것은 오직 종말에 가서야 충만함과 절대적 완전성을 부여받게 될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 백성’ 신학은 인격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제도로서가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모든 인간들에게서 비로소 실현되기 때문이다. 하느님 백성의 모든 구성원은 교계적 구분에 앞서 참된 평등 속에 놓여있다. 하느님 백성을 구성하는 사제와 평신도는 각각 그들의 고유임무 안에서 교회를 위한 본질적 존재이다. 이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할 때 신분을 초월한 의미에서의 교회를 거론할 수 있다.






3.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교회헌장 1장 7항은 사도 바오로의 표상 중에서 대표적인 신비체 사상을 요약하고 있다.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요한복음의 포도나무의 표상(요한 15, 1-11)과 사울이 교회를 박해하러 다마스커스에 가는 도중에 그리스도와 만나 대화한 장면(사도 9, 1-5)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교회헌장은 주로 사도 바오로 서간의 가르침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대해 언급한다. 이 유기적 단일체인 교회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강생과, 빠스카 신비 그리고 성령강림 위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우리는 성세성사로서 교회의 새로운 구성원으로 받아들여진다. “유대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고린 12, 13). 성세의 거룩한 예식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일치된다. 즉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으로써 죄악을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세례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어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다(로마 6, 4-5).




        성세를 통해 성체성사에 참여할 자격을 얻은 우리는 하나의 빵인 그리스도의 성체를 영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에 결합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몸을 이룬다. “우리가 그 빵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 몸인 것입니다”(1고린 10, 16-17). 사도 바오로의 사상 안에서 교회, 그리스도의 몸은 살고 죽고 영광스럽게 된 현실적이고 인격적인 몸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며, 성체성사에서 빵과 동일하게 되는 바로 그분이다. 즉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개념이, 주께서 실제로 현존하시어 우리들에게 자신의 몸을 음식으로 베푸신다는 성찬의 개념과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은 자신들이 이 성탄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었고 그 성찬 안에서 바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영성적인 불변의 삶의 지표를 발견하였다. 그래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은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연유되고 이해될 수 있는 백성이다.




        이렇게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우리들은 주의 몸을 받아 먹음으로써 한 몸이 되며,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일치, 신자들 상호간의 일치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에 딸린 지체는 많지만 그 모두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그러합니다”(1고린 12, 12). 우리는 모두 그 몸의 지체이며(1고린 12, 27) “수효는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각각 서로의 지체 구실을 하고 있습니다”(로마 12, 4-5). 따라서 교회는 단일체(單一體)와 각기 다른 종류의 다양성을 보유한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각 개인은 육체적 몸의 지체와는 달라서 각자가 고유한 자신의 인격을 보유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그와 동시에 각 지체는 하나의 성령으로써 움직여지고 또 전체를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육체적인 지체와 비슷하다.


“은총의 선물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주님을 섬기는 직책은 여러 가지이지만 우리가 섬기는 분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일의 결과는 여러 가지이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일을 이루어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는데 그것은 공동이익을 위한 것입니다(1고린 12, 4-6: 에페 4, 7-13 참조).




        여러 기관을 가진 인간 신비체에 비유되는 교회는 자연적 유기체와는 달리 자연적 생명원리가 아니라 육화된 성자와 연합된 신적 생명원리인 성령을 생명원리로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가 받은 성령이 교회에도 현존하여 몸 전체를 통합하고 움직이는 생명의 원리가 되고(1고린 12, 4-11),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들에게 고유한 기능과 임무를 부여해 주시어 몸 전체의 건설에 이바지하게 하신다. 같은 성령이 당신의 풍요하심과 직무상 필요에 따라 교회에 유익하도록 여러 가지 은혜를 나누어 주신다(1고린 12, 4-11 참조).




        그리스도 신비체의 일치는 법률 또는 권위에 의한 일치가 아니라 신비체 전체의 생명기능을 바탕으로 한 일치이며 성령이 주는 은총으로 질서지어진 일치이다. 신비체 안에서 각기 다른 은총을 받은 것은 서로가 봉사하기 위해서이다. 이 봉사에 의한 일치가 신비체 전체의 일치인 것이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분별없는 혼합이 아니라 각 지체의 직분상의 고유성을 존중하면서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규정하는 입장은 교회를 순전히 법적 사회로 보는 입장과는 구별되는 점을 드러낸다. 그리스도를 으뜸으로 성령에 의해 생활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이고, 여기서 교회를 구성하는 요소가 획일적이고 사회적인 법 규정이 아니라, 인격적인 신적 생명원리라는 점이 인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교회를 생활케 하는 생명원리가 법적 소인이 아니라 각 신자에게 부어지는 그리스도의 영이고, 교회는 이 영에 의해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파악되기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 서원들은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고유한 의미, 그 자체의 목표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인격체로 존중되는 관점이 정착된 것이다. 여기서 획일적 관점에서 성원들이 상하 관계로 규정되지 않고 수평적 관계로 이해된다.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은 구약과 신약의 연결성을 잘 표현하여 구원경륜의 일관성을 보여 주고, 구원의 보편성을 하느님 나라와 그 백성의 관계에서 파악할 수 있게 하며, 교회의 역사적 공동체성과 종말지향성을 설명하기에 편리하다. 그 외에 유기적 사회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그리고, 부분적 다양성(지역교회)을 전체적 통일성(전체교회)안에서 설명할 수 있게 하고, 모든 교회 구성원의 동등한 신분과 직분상의 차이를 설명할 근거를 제공하는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상념이 문제를 지니고 있기는 하다. 신약의 하느님 백성의 고유성이 이 표상에서 선명하게 표출되지는 않고 있다. 그리스도교 전통밖에 있는 백성과 예수를 중심으로 형성된 교회와의 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에 비하여 그리스도의 몸 개념은 구약에 대한 신약의 고유한 성격과 특성을 잘 표현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회 공동체의 심오한 결합, 성령 안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일치, 성체성사 안에서의 교회 구성원들의 본질적인 결속 등을 잘 드러내어 준다.








4. 성사로서의 교회




        가톨릭 교회 안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래 교회를 성사로 파악하는 입장이 전면에 부상하여 거의 공식입장으로 나타나고 있다. 교회헌장은 이미 서두에서 교회를 ‘성사’로 규정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사와 비슷하다. 즉 교회는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와 전인류의 깊은 일치를 표시하고 이루어 주는 표지(標識)요 도구(道具)인 것이다”(교회헌장 1항). 교회는, 하느님이 인간들과 평화를 이룩하시고 인간들 사이에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세상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존이다(교회헌장 9항, 사목헌장 42항 참조).




        성사적 교회관이라는 개념은 공의회 이전에 교부들에 의해 사용되어 오던 개념임은 확실하지만, 교회론의 핵심적 개념으로 이를 승화시킨 것은 역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중요한 신학적 업적 중의 하나인 성사적 교회관은 교회의 외부 국면과 내부 국면을 적절하게 통합시킬 수 있는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신학의 전문 용어로서의 성사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 은총의 보이는 표징’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성사라 말할 수 있다. 그분의 생애와 행하신 일, 무엇보다도 수난과 죽음, 부활로 구원사업을 성취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가시적이고 실질적으로 드러내셨다. 즉 당신의 육체적 조건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보여주시고 하느님의 구원을 실현하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성사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 또한 성사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하느님의 인류구원을 위한 무한한 사랑의 구체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 역사 안에 계속적으로 현존하게 해주는 표지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가시적으로 드러내어 주며,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신앙인들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현존하시며 역사를 뚫고 흐르면서 체험된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느님의 구원역사가 성령을 통해 세계 속에서 현존하게 되는 구체적 장(場)이며, 바로 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 그와 함께 이 세계에 들어온 은총과 사랑이 역사적으로 현존하게 되고 항상 활성화된다. 즉 가시적인 구원의 실재로서의 교회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화신(化身)인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존으로서, 그리스도 자신의 사명을 역사의 과정 속에서 수행하여 가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원과 은총의 볼 수 있는 표현이며, 구원과 은총은 그분을 표현하는 ‘상징적 사회’ – 교회 – 라는 형식에서 구체화된다.




        그리스도의 은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역사성과 사회성을 본질구조로 삼고 있는 교회가 내외적 차원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제도적이고 구조적 국면을 지닌 교회의 외부실재는 교회의 본질적 소인들이다. 마치 인간본질로부터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소인을 배제할 수 없듯이, 성사로서의 교회 본질로부터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이 제도적이거나 구조적인 국면이 교회를 온전히 구성하지는 못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은총이 작용하는 한에서, 그리고 교회활동을 통해서 역사적 형성에 이르는 한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즉 가시적 행동으로 하느님의 은총이 드러낼 때 비로소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사적 교회관에서 교회를 이룩하는 매듭은 그리스도의 은총이 사회적이고 눈에 보이게 나타나는 표지들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아들이며 인간 구원을 위해 보냄을 받은 분으로 믿고, 그의 삶을 공동체적 차원에서, 역사 속에서 실현시키는 생활로 파악되고 있다. 은총은 신자들이 그들의 신앙과 희망과 사랑을, 증언과 전례행위와 봉사를 통해서 드러낼 때에 표현된다. 이러한 전망 속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선물로서 은총의 참된 본질과 의미를 명백히 증거하는 사람들의 연합’으로 정의될 수 있다.


        성사적 교회관에서 교회의 일차적 수혜자는 교회와의 접촉 때문에 신앙을 더 잘 표현하고 생활화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다. 성사성은 본래 적극적 참여를 요구하기 때문에 신자들이 교회의 성사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에만 성사로서의 교회실재에 온전히 가담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하느님을 모든 인류를 사랑하는 아버지로 이해하여서 만인에게 펼쳐진 하느님의 구속적 사랑을 찬미하고 전파한다. 그러므로 이 교회관 안에서는 그리스도 신자들 이외에 다른 사람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은총의 당연한 수혜자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총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복음을 점점 더 많이 받아들이고 고백하도록 이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은총에 대한 인간의 응답을 정화(淨化)하고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신자들은 비신자들에 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적절한 외적 형태를 찾는 데 보다 용이하기 때문에 세계 안에서의 하느님 사랑의 살아 있는 상징이고 희망의 횃불들이어야 한다.




        성사적 교회관은 가시적 교회의 중요성을 경시하지 않으면서도 제도적 교회의 한계를 넘어서서 하느님 은총의 작용에 대한 충분한 여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 교회관은 전통적인 다른 신학 주제들과 교회론을 통합하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리스도론과 교회론, 그리고 성사론이 긴밀하게 유대를 갖는다.




        그러나 한편 성사주의적 교회관은 교회가 자신의 모든 제도와 활동을 그리스도 은총의 외적 표지로 절대화시키는 오류가 생길 수 있다. 이는 자아도취적인 미학주의(美學主義)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는 다음장에서 살펴 볼 복음선포주의적 교회관이 저지르는 오류의 역(逆)이다. 말씀과 성사는 어느 하나로 충분치 않고 함께 교회를 이루는 요소인 것이다.






5. 복음 선포자로서의 교회




        앞에서 언급한 성사적 교회관에서는 교회를 비가시적 은총의 현실재로서 강조한 데 비해서 복음선포적 교회관은 ‘말씀’을 교회본질의 일차적 소인으로 간주하고 ‘성사’에는 이차적 의미만을 부여한다. 여기서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에 의하여 소집되어 형성된 회중으로 보인다. 즉 하느님의 말씀이 발해지면서 이를 듣기 위해 모여든 인간들의 무리, 바로 이것이 교회를 뜻한다고 보고 있다.




        교회의 사명은 자신이 듣고 믿은 바와 선포하도록 위임받은 바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 유형의 교회관은 ‘하느님 백성’과 같은 공동체적 교회관과 많이 상통한다. 그러나 상호인격적 관계와 신비적 친교보다 신앙과 복음선포를 강조하는 점에서 공동체적 교회관과 구별된다. 여기서 교회는 왕의 공식 메시지를 선포해야 하는 사자 내지 전령으로 비유된다. 이 교회관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한 일차적 증언으로서 성서에 집중되어 있는 한편, 교회의 일차적 과제를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교는 전세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 말씀의 선포(케리그마)이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복음선포적 교회관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신학자로 볼 수 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교회는 사도들의 증언 위에 설립되어 있긴 하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일회적으로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언을 계속 전하고 이 증언을 계속 경청함으로써 항상 새로이 구성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바르트는 교회의 복음선포 속에 하느님이 현존하시어 스스로 말씀하신다고 본다. 하느님의 말씀은 교회에 내재하는 실재가 아니다. 교회는 하느님이 당신 백성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신자들에 의해 이 말씀이 믿어지는 만큼 발생하는 하나의 사건이다. 때문에 교회는 인간을 참회와 쇄신으로 부단하게 호출하는 하느님의 말씀에 의하여 함께 모인 회중으로 보여진다. 바르트에 의하면 교회가 취해야 할 올바른 자세는 세례자 요한처럼 자기 자신을 벗어나서 하느님의 어린 양을 가리키는 행위이다. 교회는 자신의 비천함을 공공연히 인정함으로써 인간들을 하느님께로 불러 모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본질적으로 하느님 말씀의 사자(使者)라는 바르트의 견해는 가톨릭 신학에서 한스 큉(Hans Küng)에 의해서도 제창된다. 큉에게 있어서도 교회는 그리스도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주시하여 이 사건을 전 인류의 희망으로 증거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므로 교회의 사명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봉사하는 것이다. 그는 교회가 이 사건에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가를 교회 명칭에서부터 해설한다. 즉 ‘교회’(Ecclesia)개념이 본시 ‘호출되어 소집된 자들’의 모임을 뜻한다고 지적하면서 교회가 하느님을 중심으로하여 모인, 하느님에 의하여 먼저 선택된 무리의 회중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교회는 회중과 같이 ‘집결되는’ 현실적 과정과 ‘집결된’ 공동체 자체 두 가지를 뜻하는데 결코 전자가 망각되어서는 안된다고 보고 있다.




        교회는 일회적으로 형성되고 설립되어 불변한 채 머무는 어떤 것이 아니라 구체적 모임이 반복되는 사건을 통해서 존재한다. 구체적 모임은 신약 회중의 현실적인 현현이요, 실현으로 본다. 여기서는 교회가 이미 정해진 제도에 매여 있다고 보지 않는다. 하느님의 말씀에 의해 사람들이 모이면 규모와 상관없이 온전한 형태의 교회라는 것이다. 즉 한 두 사람이라도 모여 신앙의 진리를 생활하려 한다면 그 때 교회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교회는 개별적 지역 회중 안에서 완결되는 것으로 간주되기에 지역 교회는 온전한 형태의 교회가 되기 위하여 어떤 상부 구조에 속할 필요가 없다. 다만 지역 신자들간의 구조적 유대는 상호간의 공동생활과 충고를 촉진하기 위해 바람직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복음선포적 교회관에서 교회를 구성하는 매듭은 신앙이다. 신앙은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에의 응답이다. 여기서 성사는 말씀에 종속되는, 공동체 신앙의 표지나 극화(劇化)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이 교회관에서 교회의 수혜자(受惠者)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구원을 실현시키는 진리로 받아들이는 모든 신앙인들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설교자는 설교가 사람들의 구원에 직결되기 때문에 말씀의 권위를 소유한다. 설교자에게서 발해지는 말씀은 하느님의 힘으로 청중에게 주입되어 이를 믿고 응답하는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신교는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신자들이 설교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고 회개할 때에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된 사람들은 구원의 말씀을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 전달해야 할 책무를 지닌다고 알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발해진 하느님 말씀 밖에서는 구원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죄악이 만연된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도록 선포하는 것이 교회와 개별 신자들의 본연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청중들이 선포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가의 여부는 청중 자신이 결단에 달린 문제이고, 신앙인들의 과제는 자신들이 듣고 믿게 된 구원의 말씀을 계속 전파하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선포 활동에 열성적으로 종사하는 개신교 신자들을 쉽게 만나게 되는 것이다.




        복음선포적 교회관은 구약의 예언자적 전통과 바오로나 그밖의 신약 저서들 속에 훌륭한 성서적 기반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모든 우상숭배를 단호하게 반대하는 회중으로서의 교회의 정체와 선교의 분명한 의의를 부여한다. 또한 이 교회관은 하느님의 주권과 인간과의 엄청난 격차를 의식하도록 유도하며, 회개와 쇄신을 위한 순종과 겸손을 준비하도록 인도한다. 끝으로 이 교회관은 말씀의 신학을 풍요케 한다.




        이 복음선포적 교회관은 제도성과 성사성을 강조하는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보완하는 입장으로 받아들일 만하다. 사실상 가톨릭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말씀의 교회적 중요성을 인지하고 말씀의 전례를 적극 장려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는 말씀을 교회를 구성하는 전체적이고 본질적인 요소를 대하지는 않는다. 이 교회관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이 ‘말’이 되었다는 것에 머무를 뿐, 인간으로 ‘육화’ 되었다는 그리스도 신앙의 기본진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사자를 통해서 발해지는 하느님 말씀의 절대적인 우월성은 강조되지만, 하느님이 스스로 역사에 개입해서 유형적인 양식으로 구원실재를 성취했다는 그리스도 신앙의 기본 내용은 약화되거나 간과되고 있다.




        성서는 교회를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세계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존재하며, 실재적이고 가시적인 공동체로 구현된 회중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러한 공동체가 역사 안에서 지속하기 위해서는 제도를 지니고 있어야 할 필요성이 드러난다. 그리스도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선사하는 가운데, 지상에서의 당신 몸인 교회를 우리에게 주시고 가시적이고 지속적 구조로 표시한 것은 인간의 존재 구조와 부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거대한 조직 내지 관리 사회 안에서 말씀의 신학을 강조하는 입장은 개별 신자들로 하여금 현실 도피적이거나 정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만든다. 거대한 구조악이 만연된 세계, 즉 구원되지 못한 현실 세계에서 발해진 하느님 말씀을 청종(聽從)하는 신앙을 통해서 구원을 체험하고 실현한다는 입장은 개별 신자들로 하여금 내면적이고 사사화(私事化)된 신앙에 머물게 하고 지극히 비현실적이고 탈사회적(脫社會的)인 삶을 살게 할 수 있다.






6. 봉사자로서의 교회




        근대의 여명기 특히 계몽기 이래 세계는 점차로 능동적이고 교회에 대해 독립적이 되었다. 학문과 기계기술의 발달은 인간을 점점 더 실재의 주역으로 만들며, 인간들로 하여금 실재를 합리적으로 계획하고 조절하며 형성할 수 있게 만듦으로써 세계는 점점 더 인간화되고 세속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여전히 권면을 하되 세계는 이에 유의하지 않고도 당연히 여기게 되었다. 20세기 중엽까지 교회는 독자적 길을 가는 세계를 단죄하였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비로소 교회는 자신의 입장을 바꾸기 시작한다.




        교회는 그동안 부정시한 세속사회의 영역에서 인간의 삶에 기여하는 제 영역들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타종교들에 대해 이전과는 대조되는 평가를 하기에 이른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교회는 봉사 받으러 오지 않고 봉사하러 온 그리스도를 뒤따라,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존재함으로써 교회가 된다는 입장이 공의회에서 분명히 천명된 것이다. 지금까지 배타적이고 단죄하던 입장에서부터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대처하는 입장으로 바뀌면서 교회는 이 세계로 하여금 완성에 이르도록 무조건 봉사하는 데 존재 이유가 있다는 통찰이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회의 공식입장에 앞서 이러한 견해를 표명했던 신학자들이 있었다.




        가톨릭 교회에서 프랑스 태생의 예수회 신학자이자 고생물학자인 떼이야르 드 샤르댕(P. Teihard de Chardin, 1881-1955)은 세상 사물의 진화 과정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무신론적 진화론자들처럼 하느님의 창조 행위를 배제한 진화과정을 주장하지 않고, 하느님에 의해 조성된 창조 사물이 역사 속에서 보다 복잡하고 보다 고차원적인 실재로 진화한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즉, 그는 ‘창조의 진화’와 ‘진화의 창조’를 믿고 있었다. 그러면서 샤르댕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진화의 시작이자 완성으로 파악하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역사적 현존으로 규정했다. 그는 교회가 실제로 진보 사회가 되고 진화과정의 선봉이 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부림 받았다고 주장하고 이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교회는 과학과 기계기술에서 발견되는 인간 정신의 약동성으로부터 나타나는 모든 좋은 것에 개방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개신교에서 철저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위타성으로 규정 했던 인물은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 훼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이다. 본 훼퍼는 대신학자로 각광을 받을 수 있었으나 히틀러에 대한 저항 운동에 참여하고 결국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그는 활동의 중반기에는 설교가의 지향이 직접 세계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고, 세례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와 그의 주권을 통해서 이룩된 화해를 증거하도록 호출하는 데 있다는 복음선포적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그가 체포되어 죽음을 눈 앞에 둔 상황에서 복음의 핵심이 위타성에 있음을 직시하게 되었다. 그의 사후에 출간된 옥중서간 및 일기문 ‘저항과 복종’에서 그리스도는 철저하게 몰아적(沒我的)으로 위타적인 삶을 살았으며,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도 구원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자신을 희생시키는 위타적 삶을 영위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교회가 된다는 점을 역설한다. 그에게서는 옛 그리스도가 교회의 주님일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주님으로서 타인을 위한 존재였던 것처럼 교회 역시 세계 안에서 만나게 되는 타자를 위함으로써 세상을 위해서 존재할 때에만 비로소 교회인 것이다.




        교회가 외부 세계에 진리를 가르치고 선포하는 권위적이고 지배적인 위치로부터 벗어나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낮추어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현존할 때에만 그리스도의 제자 공동체로서의 교회라는 새로운 각성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 서구의 많은 젊은 세대들을 열광시켰다.




        봉사자적 교회관에 따르면 교회는 세계에 봉사하기 위하여 세계에 병행하는 구조를 따로 건설하기 보다 세계 구조 안에서 일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들에게서 하느님의 성전은 교회가 아니라 세계 자체이며, 봉사자의 일차적 특징은 자신의 집에서가 아니라 봉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의 집에서 생활한다는 통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실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기 위해서만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구현을 위해 자기 자신을 헌신하고자 왔다. 그는 봉사하고 치료하고 화해하고 상처를 싸매기 위해 왔다. 그는 인류가 살아나도록 실제로 죽었으며, 병든 인류가 치료되도록 봉사하는 착한 사마리아인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자신을 온전히 비워버린 그리스도를 뒤따라서, 교회 자신의 구조나 영향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기보다 봉사하는 사랑의 힘으로 인류를 괴롭히는 소외들을 극복하고 일치의 실현을 위해 자신을 그리스도처럼 비우고 낮추어 봉사하는 화해의 사명으로 이해된다.




        이러한 봉사적 교회관에서 교회의 일치를 이룩하는 매듭은 교리와 성사적 공동체의 전통적 매듭들이 아니라, 세계를 향한 그리스도적 봉사에 가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솟아나오는 상호간의 형제애라 할 수 있다. 이 결속은 전통적인 종파적 경계선을 헐고, 교회적으로 사이가 나빠졌었던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공동체를 생성시킬 수 있다고 간주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교회활동의 수혜자들은 우선 교회의 구성원들이 아니라, 교회로부터 위로와 격려의 말을 듣거나, 필요할 때에 교회로부터 물질적 도움을 받기도 하는 전세계에 퍼져 있는 형제자매들이다. 교회의 사명인 선교는 교회 세력 신장을 위해서 신입자들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을 그들이 어디에 있거나 구별하지 않고 돕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봉사개념을 분명히 할 필요는 있다. 예수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성부께 순종하였다.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 신자들 역시 하느님의 종이 되도록 불리웠다.




        교회가 오랜 세월동안 과도하게 자기 자신의 문제에 관심을 집중한 나머지 현대 세속 사회와 타종교 세계와의 사이가 소원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교회 구성원의 손실이나, 생동력의 감퇴, 그리고 영향력의 감소 현상을 초래하였다. 교회가 현대의 일반적인 인간 문화의 발전과 보조를 맞추지 않고 현대 사회의 언어와 구조에 일치하지 않고 있다. 봉사적 교회관의 강조는 교회의 영신적 발전을 위한 표시로 환영되어야 할 것이다.






7. 보편적인 교회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을 이루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따라서 이 백성은 단일하며 유일한 백성으로 머무르며, 모든 세대를 통하여 온 세상에 확장되어, 시초에 한 인간 본성을 만드시고 흩어진 당신 자녀들을 마침내 한데 모으시고자 하신 하느님의 의도를 성취시켜야 할 것이다. 이 목적으로 하느님께서 당신 성자를 보내시어,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시고, 모든 사람들의 스승이요 왕이요 사제로서 당신 자녀들의 새롭고 보편적인 백성의 머리가 되게 하신 것이다. 이 목적으로 하느님께서는 마침내 당신 성자의 성령을 보내셨으니, 성령은 온 교회와 모든 신자 개인을 위하여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류(交流)에 있어서, 또 영성체와 기도에 있어서 집합과 일치의 원천이 되신다.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은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현세적 성격의 시민으로서가 아니고 천상적 성격의 시민으로서 자기 시민을 모으고 있으므로, 하느님의 백성은 인류 안에 하나밖에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신도들은 성령안에서 서로 결합되어 있으며 따라서 “로마에 살고 있으면서 인도 사람이 자기 지체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 세상 국가가 아니므로,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그리스도의 나라를 인도해 들인다 하여도, 어느 민족들의 재능과 재화와 관습을, 좋은 것이라면, 촉진하고 받아들임으로써 그것을 정화하고 강화하여 높여 준다. 사실 교회는, 이방인들을 유산으로 받으시고, 이방인들이 선물을 가져오는 그 나라의 왕과 함께 도울 줄을 알고 있다. 하느님의 백성이 지니고 있는 이 보편성(普遍性)은, 가톨릭 교회로 하여금 전인류를 그 재화와 함께 효과적으로 영구히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그 성령의 일치 안에 하나로 모으게 하는 주님의 선물이다.




        이 보편성으로 말미암아 각 부분은 그 고유한 은혜를 다른 부분들과 온 교회에 제공하여, 전체와 각 부분이 모든 것을 서로 나누어 가지며 일치의 완성을 함께 지향하면서 자라게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백성은 여러 민족들 가운데서 모여서 형성될 뿐 아니라 그 자체 안에도 여러 계층이 내포되어 있다. 사실 교회의 지체(肢體)들 사이에는 차별이 있으니, 혹은 직무의 차별로 어떤 이는 형제들의 유익을 위하여 성직을 봉행하고, 혹은 신분과 생활양식의 차별로 많은 이들은 수도 생활 속에서 엄격한 방법으로 성덕을 추구하며 자기 모범으로 다른 형제들을 격려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치성을 유지하면서도 각기 고유한 전통을 보존하는 부분교회들도 합법적으로 존재한다. 물론 정당한 다양성을 보호하면서도 부분적 요소들이 일치를 해치지 않고 오히려 일치에 이바지하도록 감시하며 사랑의 집단 전체를 다스리는 베드로좌의 수위권은 완전히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마침내 교회의 여러 부분들 사이에는 영적 재화와 사도직에 봉사하는 일꾼들과 물질적 원조에 관한 교류가 긴밀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들은 선익을 서로 나누어 주도록 불린 것이므로, “각기 자기가 받은 은총을 따라 하느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관리인으로서 서로 봉사하라”하신 사도 베드로의 말씀은 각 교회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하느님 백성의 이 보편적 일치는 세계 평화를 미리 보여 주고 촉진하는 것이므로, 가톨릭 신자이건, 다른 그리스도 신자이건, 혹은 달리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되도록 불린 사람이건 간에, 모든 사람이 이 일치에로 초대를 받는 것이며, 방법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다 이 일치에 속해 있거나 혹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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