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선교사명

 

교회의 선교사명




        세계로부터 점점 고립되어 가던 가톨릭 교회를 크게 개혁시킨 계기는 현대의 성령강림사건으로 부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면서부터였다. 여기서 개혁의 원리는 두 가지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쇄신과 적응의 원리였다. 가톨릭 교회는 공동체적인 신앙을 증거했던 초대 교회의 전통으로 돌아가자는 쇄신의 정신과, 이미 상당한 정도로 무신론이 파급되어 있는 현대의 상황에 복음적으로 적응하자는 정신으로 전반적으로 자신을 개혁하였다. 쇄신의 정신에 따라 교회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공동체 의식이 강조되었고, 적응의 정신에 따라 이미 약해진 전통적 제도를 현대화시키는 한편 교회 바깥의 정당한 발전을 인정하고 대화하며 배타적인 자세를 지양하고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회의 공동체적인 변화에 기여하도록 권장하였다.




        이러한 개혁의 움직임은 가톨릭 교회 자신의 자기이해의 변화에 따른 것이다.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다른 종교는 물론 다른 교파 즉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심지어 무신론자들에게까지 구원의 가능성을 폭넓게 인정하였다. 말하자면 가톨릭 교회밖에 있는 이들도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같은 입장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대체로 수용되었고, 그래서 ‘비그리스도교 선언’에서도 “다른 종교들 속에서 옳고 성스러운 것이 발견되고 있으며 교회는 이들의 생활과 행동양식뿐 아니라 그들의 규율과 교리도 거짓없는 존경으로 살펴본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무신론자들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있다. 전통교리는 무신론을 과실있는 현상으로 보아 왔으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과실없는 무신론도 있을 수 있으며 무신론주의자들은 그 무신론 안에서 올바른 삶을 추구한다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공의회는 양심에 따른 삶을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위한 준비로 대하면서 무신론자에게 구원 가능성을 부여하고 있다.




        “자기의 탓없이 하느님을 아직 명백히 신망하지는 못할지라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섭리가 구원에 필요한 도움을 거절치 않으신다. 사실 그들한테서 발견되는 좋은 것, 참된 것은 무엇이든지 다 복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로서 결국은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도록 그들을 비추시는 하느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교회는 생각하고 있다”(교회헌장 16항).




        공의회는 ‘현대세계의 사목헌장’에서 무신론의 형식과 근원, 조직적인 무신론 등 무신론의 문제를 비교적 상세하게 규명하고 끝으로 무신론에 대한 교회의 자세를 자세히 거론하고 있다(사목헌장 19-21항). 여기서 공의회는 무신론에 대한 교회의 적절한 태도로서 성실하고 현명한 태도로 오해를 불식하고 세계 안에서의 과제들을 해결하는 데 실천적으로 공동 노력하는 일이 요청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같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비그리스도교의 구원에 관해서 놀라울만큼의 낙관적 태도를 보이고, 다른 종교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며, 전인류에 미치는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지나친 속단을 해서는 안된다. 세계의 종교들, 단체들 및 선의의 사람들이 갖는 종교적, 도덕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은 결코 선교 불필요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신조를 존중하는 것과 선교 불필요론을 결부시킬 수는 없다. 다른 종교에 관대하다는 것이 종교 혼합주의가 되어서도 안된다. 오히려 하느님의 구원계획의 보편성을 충분히 이해하면 할수록 선교의 필요를 강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의 구원에 대한 하느님의 원의와 그 구원을 위해서는 교회가 필요불가결하다는 점과 모든 사람이 ‘하느님 백성’에로 초대되어 있다는 것 등을 충분히 이해한다면 얼마만큼 선교가 중요한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상호간에 전혀 연결이 없이 개별적으로 성화하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따라 하느님을 인정하고 충실히 섬기는 한 백성으로서 확립하신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으로서 구원에 초대받고 하느님 백성이 되게끔 질서지어져 있는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 하느님 백성에 속하도록 노력하는 것, 이것이 선교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종말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에 불러모으는 일, 이것이 바로 선교의 의의이다. 더불어 선교란 외교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행위만이 아니라 선교를 통하여 성립된 교회를 육성하는 일과 더 나아가서 세상과 만물을 그리스도의 정신에 젖게 하는 일체의 활동을 의미하고 있다. 선교와 관련지어 교회가 무엇인가를 비유적으로 대답한다면, 교회는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아들 그리스도의 혼인잔치의 손님이 되도록 모든 사람을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후하고 넉넉한 마음의 표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느님에게서 시작된 인류의 구원계획은 그리스도와 그 교회에 의해 완성된다. 전 인류가 하느님 앞에 보편적 교회로서 불리워 모여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사도들로부터 ‘구원의 진리’를 땅 극변에까지 전할 사명을 받았다(사도 1, 8 참조). 성령께서는 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전세계 구원의 원천으로 정하신 성부의 구원계획의 실현에 협력하도록 교회를 촉구하신다. 성령은 선교의 원동력이다. 선교, 즉 하느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게을리하는 것은 바로 성령을 거역하는 것이다. 과거 2천년간 교회는 전세계에 수많은 선교사를 계속 파견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으며,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여기서 사도 바오로의 유명한 말씀을 연상할 수 있다. “들어보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로마 10, 14).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놓고, 창조주보다도 피조물을 섬기거나(로마 1, 21. 25 참조) 혹은 하느님 없이 이 세상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존재를 전하고, 오류의 속박에서 해방시켜야 한다. 우리는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사회에 살고 있지만 종교의 다원성은 역사적 사실이라든가, 하느님의 인류 구원계획 중의 일부라고 생각하여 팔짱만 끼고 방관하는 태도로 있어서는 안된다.




        교회는 메시아적 백성이고, 세계의 일치의 희망과 구원의 싹이고, 세상의 빛, 땅의 소금으로서 전세계에 파견되어 있다. 오늘의 인류는 점점 정치, 경제, 사회 면에서 밀접히 연결되어 하나가 되려 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전인류가 하느님의 한 백성, 한 가족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거에 본래의 길에서 벗어나 배타주의, 분열, 증오,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태도를 버리고 지난날의 쓰라린 경험을 토대로하여 과거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일치와 화해의 원동력이 되어야 한다.


“인류 전체를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신비체와 성신의 궁전이 되게 하여 만물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의 창조주이신 성부께 온갖 영예와 영광을 드리는 것”(마르 13, 10), 이것이 선교의 최종목적인 것이다. 주의 재림 때까지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선포되어야 한다.






Ⅷ. 전환기에 요청되는 교회상






        지금까지 우리는 교회와 신앙의 쇄신을 지향하여 소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는 교회헌장에 나타난 교회본질을 살펴보았다. 이것은 공의회가 끝난 지 30년이 넘은 오늘날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대내외적으로 시련에 봉착해 있는 교회의 절박한 사목적 취지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목적에서였다. 동시에 우리는 인류가 직면해 있는 격동의 시기에 인류와 세계의 구원을 위해 요청되는 교회상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교회헌장에서의 교회상이 교회 쇄신의 정신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이미 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에 이제 우리는 현재와 미래의 세계 속에서 요청되는 바람직한 교회상을 명제적으로나마 결론으로서 제시하고자 한다.




        그리스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투신하여, 이 사건을 인류의 구원으로 증거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이를테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느님의 구원역사가 성령을 통해 세계 속에서 현존케 되는 구체적 장(場)이다. 바로 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계에 들어온 진리와 자유 그리고 정의가 역사적으로 현존하게 되고 항상 활성화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의 사건이 성령을 통하여 현존하고 사랑 안에서 구현되는 곳 어디에나 존재한다. 이점에서 교회는 발생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간주할 수 있다.




        교회의 이 발생성격은 제도적 요소를 배제하지 않는다. ‘예수의 사건’은 지상 예수에게서 이미 그의 인격과 분리될 수 없다. 이 사건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격적 삶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인격과 사건, 증거와 증인과의 상호예속성은 그리스도 교회의 본질구조를 이룩하고 있다. 예수의 사건은 교회의 시대에도 파견과 전권행위를 통해서 예수의 증인들과 연결되어 전승되고 있다. 이처럼 교회는 인간학적이고 사회학적인 고찰에 의해서뿐 아니라 교회의 신학본질에 입각하여서도 제도적 면을 지닌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발생적 요소와 제도적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성서에 다르면 성령은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성령은 교회내의 특정한 신분에 독점적으로 유보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 안에서 ‘예수의 사건’을 증거하는 전권(全權)과 파견은 근본적으로 전체교회와 교회의 모든 지체들에게 주어진다(갈라 6, 1). 교계직은 신자들의 공동체와 이에 제외된 신앙내용 사이의 관계가 올바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책임을 지고 있다. 교계직은 이처럼 말씀에 대한 봉사와 공동체에 대한 봉사로 기술될 수 있다. 교계직은 교회가 복음의 권위에 향하도록 만드는 책임을 지닌다. 그리고 교계직의 권위 역시 자신이 봉사하는 복음의 권위만을 지닌다. 일반적으로 권위가 타자의 자유의사를 거슬러 강요하는 데 반하여 복음은 인간을 자유로 해방시켜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만든다. 교계직은 이처럼 인간을 자유로 이끄는 복음에 봉사해야만 한다. 이는 복음에의 봉사가 공동체에로의 봉사임을 시사한다. 때문에 교계제도 자체가 자유 제도와 같은 것이어야 할 것이다. 교계제도는 공동체원 모두의 교호(交互)의 중심이어야 하고, 여기서 모두의 기본확신들이 표현되고 효력을 발할 수 있어야 한다.


        인류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육화된 성사로서 교회는 모든 인간을 위한 봉사생활에 전념하는 사랑의 공동체여야 할 것이다. 정의가 실현된 구원의 공동체로 드러나야 한다. 교회 내 모든 제도를 포함한 외적 구조는 성부의 사랑의 육화였던 그리스도의 사랑을 구현하는 데 사용될 때에만 존재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당신의 것을 모두 버리시고 종의 형상을 취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기비허(自己脾虛)가 교회구조 핵심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전세계의 인구증가 추세에 비하여 그리스도 신자율은 감소되고 있다. 이 점은 교회가 이전의 세계에 대해 현실적으로 가져왔던 영향력이 감소될 것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기계적이고 획일적인 비인간화된 산업사회에서 인격중심으로 이룩된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현세의 권력적 영향과는 성격이 다른 정신적 도덕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 어느 곳에서도 인류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비워버린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교회 역시 자신을 비우고 종말론적 구원이 궁극적으로 주어질 마지막 순간까지 순례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자신을 비우고 현세에서 자신을 버리는 가운데 교회는 진정한 자신의 정체를 영원히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가 자신의 정체를 재파악하고 본연의 사명에 충실할 때 절실하게 구원이 요청되는 현대와 미래의 인류사회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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