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서    론


Wolfahrt Pannenberg는 신학의 빛 안에서 현대의 인간학을 다룬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저서를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인간학의 시대 안에 살고 있다. 인간에 대한 포괄적인 학문지식이 바로 현대 제 인문과학이 추구하는 주목적이다. 대다수의 제 학문 연구분야들이 이점에 있어 일치를 이룬다. 인간에 대한 포괄적인 학문 (Anthropologie)은 각기 제 연구분야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다른 연구들과 예상치 않은 연결점을 찾는데 성공하기도 한다. 생물학자와 철학자, 법학자와 사회학자, 심리학자와 의학자, 그리고 신학자들은 인간에 대한 질문 안에서 유사한 통찰과 일정부분 공통의 언어를 발견한다. 인간에 대한 새롭고 포괄적인 이해가 이루어지는 한에서, 이런 전문화된 방법론들은 각 학문분야들의 산발적 분열을 극복하는데 이바지했다. 인간을 다루는 학문은 오늘날 현대인의 일반적 의식 안에 그 이전에는 수세기 동안 형이상학이 점유하고 있던 위치에 서게 되는 호기에 서있는지 모른다.” (형이상학 Metaphysik 에서 인간학 Anthropologie으로의 전환)


이러한 금세기 제 학문이 보여주는 인간에 대한 다양한 자기체험과 자기 이해가 불가피하게 신학적 질문의 지평을 형성하고 또 때로는 형성해야만 한다. 즉 오로지 인간에 대한 선 이해(先理解)의 틀 안에서만이 오늘날 신학적 주장과 표현들의 이해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그 다음에 신학은 이런 인간에 대한 선 이해에 대해 자신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질문하고 또 깊고 넓게 확장시키며 또 그것(선 이해)을 능가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학이 최종적인, 그래서 모든 것을 포용하고 포괄적인 이해를 가능케 하던 세계와 현존재의 해석을 보증했던 형이상학의 고유한 권한과 기능을 무비판적으로 물려받았기에 인간학은 신학을 모든 것을 꿰뚫는 인간학적 방향으로 정향되도록 몰아세운다. 그래서 R.Bultmann처럼  “누가 하느님에 대해 말하려 한다면, 먼저 인간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이러한 연관하에서 오늘날 신학의 주요한 주제가 된다.


그렇다면 신학은 현대 인간학을 통한 도전을 수용했는가 ?  이 질문과 관련하여 답변이 그렇게 궁해 보이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말해 중세가 하느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세계에 대해 말하는 것이었고, 그리고 인간을 이 세계의 가장 탁월한 존재로 이해했다고 보면, 최근의 시대는 ‘주체에로의 전환’(Wende zum Subjekt)이라 특징지을 수 있다. 즉 이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주제화시켰고, 자신의 신비를 벗겨내고 모든 내용을 중재하는 조망을 이루어 낸다. 항상 신학이 경직되고 고착된 교과서적인 전통을 깨려할 때 항상 신학은 ‘주체에로의 전환’에서 그 돌파구를 찾아왔다. 이런 일은 금세기에 일어난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가톨릭 신학에서 언급되어야만 하는 것은 이러한 ‘주체에로의 전환’이 금세기에 성공적으로 거역할 수 없이 일어났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이러한 형태의 새로운 신학이 ‘신학의 인간학적 축소다’라고 비판되었던 것이 이제는 우리시대 대표적인 신학자들에 의해 그런 시도는 ‘인간 중심적(Anthropo-Zentrische) 전환’으로서 바로 그들이 이끄는 신학 주제의 성격을 특징 지우는 것이 되었다.  Teilhard de Chardin의 우주론적 신학의 전면에, 또 이해보다는 변화시키는 행위를 더 중시하는 해방신학․혁명신학 역시 여기에서 예외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런 신학들은 어떻게 인간이 신앙의 빛 안에서 자신의 현존재를 올바로 견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 물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현대 신학 안에 보여지는 인간 중심적 전환의 특성은 한편으로는 ‘본질적인 것’에 대한 꾸준한 질문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진위(眞僞)를 파악할 수 있는 ‘체험’에 대한 꾸준한 질문인 것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중세에는 크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질문은 아니었다. 오늘날 신학 안에서 실천적 의미와 구원의 의미를 숙고하지 않고 혹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신학의 대상이 체험의 영역과 접촉점을 찾지 못하면, 이런 신학적 숙고는 공감대를 이루기 어려워졌다. <예) R.Bultmann의 실존적 성서해석  |  “Pro me” → 개인주의적 구원관>  이런 신학적 인간학의 주제들이 지난 20-30년 동안 극적인 수의 증가를 보였고 외적 관심의 집중을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인간 중심적 전환을 주제로 하는 신학을 전개하지 않거나, 미온적으로 동참하는 신학자들이 인간 중심적 전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학자들을 겨냥하여 그들의 신학이 ‘인간 중심적 축소’라고 비판하는 것은 일면 정당성을 지닌다. 즉 신학은 Theo-logia인데 인간이해를 중점에 두면 신학이 인간의 자기 이해를 위한 것으로 축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중심적 신학의 전개 안에 자칫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본주의 (Humanismus)’와 혼동될 수 있고, 그리스도교적 행동과 행위는 하나의 윤리 내지 도덕론에 불과할 수밖에 없는 위험에 떨어진다. 이런 비판은 타당하고 따라서 인간 중심적 사고에 바탕을 둔 신학에는 늘 진지한 의문이요, 경고이기도 하다. 이런 연관 하에서  K.Rahner는 방법적으로 성찰된 신학적 인간학을 위한 작업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임을 상기시킨다. 즉 신학적 인간학에 대한 비판은 지난 수십년 동안 인간에 대한 신학적 숙고의 길이 그 목표에 도달했는가 ?  또 그런 신학적 숙고가 어떤 해답을 제시했는가 ?  이러한 비판이 어떤 때는 인간학적으로 정향된 전체 신학이 헤어날 길 없는 미로에 빠진 것으로 여겨질 뿐 아니라, 신학적으로 오류의 방법론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바로 여기에 신학적 인간학의 출발점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제기된다. 이것은 신학적 인간학이 이러한 비판을 넘어서 올바르게 정립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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