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이해지평 안에서의 은총과 자유-전통적 견해의 평가(은총에 관한 전통적 견해(하))

 

결국 그래서 역사의 최종목적은 절대에 이르는 것이라 해도 좋고, 오메가 포인트인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도 좋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어느 누구도 버려지지 않은 채 의미가 나타나야 하는데, 역사철학에서 역사의 의미는 모든 역사의 끝에서 나타난다고 본다. 즉 의미는 전체 안에서, 역사의 종말에 가서 전체 안에서 그 사건을 바라볼 때 올바르게 평가되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 영향을 주는 것은 모든 신학 안에서 영향을 주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지금 고통을 당하고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지를 따지고 있는데 지금의 고통은 전체 안에서 명료해질 수 있다. 우리는 일상적인 말 속에서, 지나놓고 보니까 그 때 그 일이 어떤 의미를 가졌었다고 간혹 말한다. 결국 역사는 종말론적 전체 안에서, 의미는 전체 속에서 찾아야 한다. 요즘 현대사회의 사조는 모로가도 서울만가면 된다는 식의 결과나 결론을 중시하고 과정을 도외시하고 있다. 결국 현대사회가 추구하는 어떤 사건 안에는 가시적인 결과의 획득, 실적위주의 사고, 물질주의가 깊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이러한 요소들이 인간에게 불안심리를 주고 허세를 가져다주고 치장을 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과소비하는 사람에 대해 욕하기보다는 오히려 측은한 생각을 가지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는 논리를 제시할 수 있다.왜냐하면 그들은 자연적인 추세, 논리적 귀결로서 감추고자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신앙관, 역사관은 ‘지금’의 중요함과 의미있음을 매번, 매순간에 자각하면서 지금 여기가 내가 살아가야 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수동적인 삶이 아닌 적극적인 삶이 필요한 것이다.  출애굽사건은 과정이 얼마만큼 중요한 것인지를 말해준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도착하기 전에 광야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은 결과를 중시한다기 보다는 광야라는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 지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입장에서 전체를 신학과 연결시키면, 전체를 드러나게 하는 것을 인간 편에서는 할 수 없고, 전체는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 아래에서 드러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렇기에 순간 순간에 행하는 나의 노력이 전체가 드러나는 하느님 안에서 정당한 의미를 부여받을 것이다.***    




B. 구원을 향한 하느님과의 관계로서의 은총은 근본적으로 선사되는 속성을 지닌다.


아무것으로도 인간은 스스로 이 관계를 이루어 낼 수 없다. 단지 인간은  그 은총들을 필요로 할 뿐이다. 다른 경우에 인간이 오류를 범하지 않았거나 타락하지 않았어도 은총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은총 없이는 하느님과의 친교 공동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스스로 도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과의 천상친교는 본질상 인간의 본성과 본성의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다.


하느님 은총에 관한 그리스도교 사신(선포)의 이러한 커다란 역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더 깊어진다. “인간은 자신의 본질상의 이유로 자신의 상황에 분명한 이유에서처럼 하나의 선물을 필요로 한다.”  




C. 구원으로 정향되어 있는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모든 해석의 언사들은 부차적인 것   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한 해석들은 신학사상 안에서 접하는 것처럼 구체적 시공의 상황에 따라 늘 변화되어 왔다.즉 신앙의 역사에서 모든 시대는 구원이 넘치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의 관계에 대한 사신의 기본 틀을 매 시대에 상응하게 수용하고, 그 시대의 context안에서 서술하고 해석해 왔다. 이런 이유에서 벌써 신약성서 안에서도 은총이해의 여러 측면이 보여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특정한 은총론의 역사 안에서 용어적이고 개념적인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 여기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인 ‘내용이 분명하면 그것에 대해 무슨 말을  사용했는지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를 생각할 수 있다. 은총이란 말도 내용적으로 분별된다면 그것이 사용하는 말에 대한 시비는 불필요한 것이다.




D. 구원을 향한 인간의 하느님에 대한 관계로서의 은총은 어떤 경우에도 쇄신하고 어느   정도 외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은총은 변화된 실재 안에서 구체화되고 가시화된다. 전통적인 견해 안에서 하느님 은총은 어떤 경우에도 삶과 유리되고 괴리된 정적인 상태로 파악된 적은 없었다.




E. 곧 은총 안에서의 삶은, 죄 안에서의 삶과 본성의 타락 안에서의 삶과는 반대의 것이   다.


그러나 우리를 더 애매모호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견해와는 다르게 은총자체를 우리가 체험할 수 있고 또 이를 통해 명료하게 나타나는 실재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통적 견해에 의하면 은총은 오로지 믿어질 수 있는 믿음의 대상이다. 즉, 이 말은 결국 은총이란 두가지 관점에서 체험이란 영역과 관련을 갖고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첫번째 관점은 은총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전제들(전이해, 선 이해)에서 부터 결국에는 은총이해를 설명하는 개념들이 생긴다. 풀어 말하면 은총에 관한 사신들(소식, 선포내용)을 인간이해의 조건 안에서 듣는다는 것은 그 은총을 체험의 상황(context)안에서 듣게 되는 것이다.


두번째 관점은 앞서 언급한 은총의 쇄신하는 작용,변화시키는 작용이다. 전통적 견해는 항상 감지할 수 있고 가시적이며 증명할 수 있는 은총의 작용은 항상 체험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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