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성찰(묵상)-하느님에 대한 언사(사랑의 본질(하))

 

A.‘사랑은 정신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전통들이 말한 사랑


현대인은 비가시적인 것은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려 하고, 물질적인 확인을 강하게 요구한다. 그러나 사랑은 정신적인 것일 때만이 어떤 측면에서든지 하느님과 관련을 맺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가시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은 정신적인 것이기 떄문에 욕정이 아니라 그야말로 선물이요, 지나가는 순간적인 느낌이 아니라 의지인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꿈 속의 위만을 바라보는 동경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오는  자비요, 사로잡혀 있음이 아니라 결단(늘 매순간을 새로 시작한다는, 선택한다는 의미에서)이며 궁극적으로는 에로스가 아닌 아가페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사랑의 대상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고백록 10장6)


“내가 너를 생각할 때에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육체의 아름다움, 거기에 덧붙여 시간의 흐름은 아닐까. 빛의 광채, 거기에 그렇게 빛나는 아름다운 눈은 아닐까? 모든 종류의 소리에 담겨있는 달콤한 멜로디의 사랑은 아닐까? 꽃과 향료의 그윽한 향기를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만나와 꿀은 아닐까? 나를 포옹하는 신체의 한 부분을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내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할 때에 이 모든 것 중에서는 아무것도 없다. 물론 내가 빛과 아름다운 향기와 소리, 맛있는 음식과, 내 안의 또 다른 내적 나와의 따뜻한 포옹도 사랑한다. 그곳에서 어떤 공간도 다 담을 수없는 내 영혼의 빛이 퍼지게 하고, 그곳에서 어떤 사건도 만들지 않게 하고, 고운 소리가 나게 하고, 광채와 향기가 퍼져 나가고, 거기에 어떤 배부름도 견줄 수 없는 충족함이 있고 어떤 지루함도 녹여질 수 있는 것이 그곳에 있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한다 할떄에 내가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B. 사랑은 행동을 통해 가시화 되어야 한다.


그 사랑은 원수사랑에 이르기까지 구분이 없는 이웃사랑이다. 이웃사랑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하는 것이며, 자기실현이 아니라 자기부정(자신을 버리고 낮추는)이며, (이를 우리는 선포해야 한다) 자기중심주의가 아니라 이타주의(Altrisimus)인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오늘날에서의 사랑은 바로 복지적 차원에서의 이웃사랑을 연상케 한다. 이런 사고가 한편에서는 極으로 발전하여 때로는 사랑이 구조적 개혁(revolution)과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 한편 자가당착적 해석이나 왜곡들도 이 사랑의 개념에서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엄청나게 크다. 즉 이웃사랑 역시 앞서 언급했던 사랑의 사건(남녀간) 처럼 사랑의 총체적인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이다. 그 이웃에 대한 사랑은 삶 전체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 본질의 한 부분들을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삶의 한 부분이란 의미에서도 이 부분이 전체를 송두리째 요구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은 마치 모든 세계에서 볼 수 있는 그리스도교적 영웅(순교자, 성인들)들 안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합당하지만 대단한 희생을 치루어야 한다. 인간의 한 부분이 자신의  전체적 본질을 완전히 감싸버리고 그 모습으로 변화되어 버리면 그 모습은 쉽게 우스꽝스럽게 되어버린다. 이웃사랑의 영웅들은 또 일반적으로 냉정한 느낌을 가지고 있기에 어떤 면에서 보면 사랑에 무능한 사람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혹은 달리 말하면, 여러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은 결국 부부의 사랑이 꺠어질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한다. 그러나 오로지 그리스도교적인 이웃사랑의 차원에서만 사랑한다’는 것은 대단히 모순적이다. 이는 사랑하는 대상을 목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덕만 생각하는,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이웃을 통한 하느님 사랑이 되어버려 이웃이 수단이나 도구가 되는 ‘열심한 오류’를 범할 수 있다.




C. 사건으로서의 사랑과 다양성을 지닌 윤리적 행위로서의 사랑


이 체험은 앞의 두가지와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즉 사랑은 “죽음적”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죽음은 사랑을 뛰어 넘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지속적인 죽음을 자신의 삶에 체득한다. 이 죽음은 어떤 때는 자신의 죽음보다 더 쓰라리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렇게 자신의 삶 안에서 첫번째에 이은 자신의 두번째 죽음은 사랑의 모든 형태들 안에 어두움의 그림자를 드리워 놓는다. 이 그림자는 사건으로서의 사랑과 윤리적 행위로서의 사랑 사이의 간극인 것이다. 이런 간극이 얼마나 큰지는 우리는 매 혼배미사 강론 중에서 느낄 수 있다. 즉 두 남녀 사이의 사랑과 그 사랑이 하느님의 선물이요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이 그 안에서 채워졌다는 이야기만 주례자가 한다면 이는 비현실적이요, 낭만적이고 조금은 간지럽기 이를 데 없기도 하다. 그런데 한편 주례자가 ‘지금 체험하는 사랑의 느낌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며, 현실은 무척 힘들 것이기에 사랑은 현실 속에 있는 환상은 아니다’라고 일방적으로 몰아치면 결혼의 축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사랑은 이런 두가지를 함께 껴안아야 한다. 사건으로서의 사랑과 윤리적 행위로서의 사랑의 간극은 바로 사랑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다름아니라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은 늘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로지 어찌 보면 적은 사람들을, 어쩌면 한사람만을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옳고 그저 공정하게 대할 수 있다. 그래서 죽음의 씨앗은 사랑 그 자체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큰 열정을 지닌 사랑을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열정이 고조될수록 사랑은 소유욕으로 바뀌기 쉽다. 이렇게 될 때 사랑은 그 본래 의미를 잃고 금방 식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씨앗인 것이다. 즉 열정적으로 사랑을 받는 사람이, 그 열정 속에 묻히기를 원치 않고 스스로 살려할 때 이런 차가운 거절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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