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안에서의 은총 개념(하)

 

C. 끝으로 바오로에 있어서 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보편적인 성격을 지닌다.


바오로는 은총의 보편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구약의 텍스트를 인용하고, 하느님의 은총과 관련하여 유다인과 이방인 사이의 차별이 해소된다.(그들이 똑같다는 의미보다는 각자의 고유한 χαρισμα를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물론 이것이 우열의 차이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에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유다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종과 주인 사이의 구별이 없다는 것이다.(갈라 3,28 ; 5,6 : 로마 10,12 : 에페 2,11-22 : 골로 3,11) 그렇게 죄를 지었기에 인간은 은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근본적인 중요한 특성을 제외하면 바오로적 은총개념은 구약에서처럼 ‘신중심적’이고 ‘구원사적 개념’이다. 또 그런 한에서 바오로적 개념은 후대에 이어지는 신학의 은총이해와도 구별된다.




a. 은총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편에 서 있는 실재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하는 그리고 선물처럼 거저 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분여된, 선사된) 하나의 ‘다가섬’(사랑)이다. 그러나 그 은총은 아직 인간 안에 내재하는 어떤 특정한 실재로 생각되어 지지는 않는다.


다른 한편 바오로에 의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은 하나의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삶의 연관성(틀)을 만들어낸다고 본다. 개별 인간들은 바로 이 삶의 틀 안으로 들어서게 되고(인간의 역사성), 그 안으로 태어나며 그 안에서 성장하며 스스로 은총 안에 사는 것이다. 물론 이 삶의 틀은 이제 더 이상 민족적으로 표현되는 하나의 민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모든 백성들로부터 ‘함께 불리운 사람들의 교회’라는 삶의 틀을 말한다.(이런 의미에서 세례성사가 하느님 백성의 새로운 구성원이 되는 것으로 강조된다.) 그리고 이 ‘새로운 하느님의 은총’은 이제 은총의 선물들(χαρισμεν) 안에서 구체화된다.  구약 성서의 언어 사용법과는 달리 χαρισμεν은 대부분 교회 안의 공동체의 삶과 관련되고 또한 그렇기 때문에도 은총의 선물은 그 선물을 받는 사람의 개인적이요 이 지상에서의 이익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즉 단순한 기복신앙이 아닌 것이다. (종교행위는 절대자와 유한자 사이의 관계이기에 비구원적 상황에서 구원적 상황으로 호전되기를 기원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지만, 순수 개인적인 안위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은 배제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바오로는 은총이란 단어를 ‘은총의 선물’이라는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로마 1,5 ; 15,15 : 1고린 3,10 ; 15,10 : 갈라 2,8 : 에페 3,2)  그리고 마찬가지로 χαρισμα란 단어 안에 χαρις(로마 12,6 이하 : 1고린 12장 : 에페 4,7)란 말이 그 바탕을 이루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이다.




b. 바오로에 있어 지속적으로 견지된 구약성서의 은총개념의 구조들은 후대 그리스도교 신학에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계속되는 은총이해의 발전 속에서 이런 구조는 변화를 겪게 된다. 우선 은총에 대한 더 구체적인 내용이다. 이제 은총의 내용은 오로지 하나뿐으로서, 은총 자체인 그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이 내용으로서는 아직 은총이란 말이 그 전처럼 ‘하느님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행한 모든 행위의 총체적 개념’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더 넓게 보면 바오로 안의 은총 개념은 구약 안에서의 은총 개념보다 더 강하게 은총 개념의 이중 구조 중 한면인 ‘어두운 면’을 나타내 보여준다.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이 바오로에 있어서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무엇을 선사하는 것보다 우선한다. 즉 인류는 구원의 가능성마저 상실했을 정도로 타락했고, 율법은 구원을 위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통해 인간 편에서 완전히 채워진 적이 없었다.




***사도 바오로가 율법을 죄와 동일시한 이유는 바로 율법 자체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아담의 범죄 이후 인간은 누구나 타락한 본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그 타락한 본성의 결과로 인간은 필연적인 ‘有限性’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오로의 의견은 바리사이들의 주장을 거슬러 타락하고 유한한 인간이기에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채울 수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율법을 완전히 채울 수 있다고 과신하는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공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율법과 인간의 실존 사이에는 엄연한 간극이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도 죄는 피할 길 없이 그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는 것이 바오로의 통찰이다. 바로 여기에 하느님에 의해 마련된 ‘속죄의 도구’(로마 3,25)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고난과 부활을 통해서 인간이 이 비구원의 상황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바로 ‘그리스도는 은총’인 것이다. 이런 한에서 은총 이해에 있어 아직 그 구체적 내용들이 어떤 구체적 상황과 관련하여 개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은총은 오히려 하나요 모든 것을 포괄하는 비구원의 상황 전체와 관련되는 것이다.


‘은총 이해에 있어서의 개인화 추세’는 대부분 이러한 바탕에서 이미 준비된 것이다. 즉 은총에 따라오는  은총의 선물이라는 구체성은 이미 각 개인에게 주어져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행위 안에 마련해준 은총은 ‘신앙 안에서만’ 파악된다는 것이다. 즉 은총은 각 개인의 개별적인 호감 혹은 수용의 행위를 통해서 감지되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이런 정도까지 개인의 행위가 강조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서 각 개인의 믿음은 ‘영의 작용’(1고린 12,3)에 의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도 바오로에 있어서 ‘영(πνευμα)과 율법’은 ‘믿음과 율법’처럼 서로 상반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대체할 수 없는 신앙의 개별성(개인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끊임없는 개인의 실존적인 선택과 결단이기 때문이다.




*** Fides ex auditu


Hermeneutik, 해석학 – ‘이해’(인식)의 문제로서 개인의 성찰과 ‘체험’ 지평을 통해 의 미로 떠오르게 되는 것.***




그래서 바오로에 있어 신앙은 ‘은총 안에 서 있다’는 포괄적인 개념이 된다. 그리고 은총은 각 개별인간이 은총 안에 살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은총은 바오로에 의하면 거저 받을 수도 있고, 은총의 지위에서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2고린 6,1 : 갈라 5,4 : 2디모 2,1)  이러한 의미에서 은총과 동일한 의미로 표현되는 것이 바로 ‘영 안에서의 변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의 성장’(로마 8,4 이하 : 갈라 5,25 : 에페 3,17 이하 : 필립 1,8 : 2베드 3,18)인 것이다.


바오로 이후 시대에 이어지는 은총 개념의 개인주의적 이해는 ‘예정조화사상’과의 연관성 안에서 더 깊어진다. 즉 은총의 선물과 믿음은 온전히 하느님의 선택과 예정된 것에 따라(로마 8,28.30)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선택이나 예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고,그렇기 때문에 그 선택의 배후는 하느님의 사랑이지, 어떤 예측할 수 없는 임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로마 3,31 이하.35.39)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여기에서 멀리 내다보면 하나의 문제가 생길 수 있음을 엿보게 한다. 즉 은총의 수용은 각 개인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인 신앙 행위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가 신앙 안에 그 은총을 수용할 지 결정하는 것은 하느님이시다. 바로 여기에서 ‘은총과 인간의 자유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이렇게 은총의 실재 위에 여러 성찰을 해보려는 시도를 시작하자 마자 특수한 의문이 제기되는 은총의 실재에 대한 다른 측면이 나타난다. 은총은 분명히 ‘하느님 앞에 구원의 총체’이다. 그러나 어떻게 구원의 총체가 인간적 실존 안에 도달할 수 있는지(은총과 인간의 수용문제), 그리고 어떻게 인간이 구원의 총체와 관련을 갖고 거기서 영향을 받을 수 있는지, 또한 그 영향을 통해 인간이 변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게 된다. 결국 이런 질문과 관련해서 교부시대부터 신학의 한 부분으로 은총론이 자리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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