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총의 이해 기점(하)

 

“사랑이 없으면 모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을 오래 참습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욕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성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보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1코린 13, 3-7). 사랑을 이렇게 정의해 놓고 보면 과연 우리는 사랑하고 있는가 반성하게 되면 자신이 없다. 루이 에블리는 사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랑은 그 상대자들과 서로 만났던 순간에 지녔던 질에 따라 측정된다. 당신은 달이나 아들에게 왜 사랑에 빠졌느냐고 질문하지 말라. 그들은 진실을 빼고는 세상에 있는 온갖 이유를 다 들어 설명하려 할 것이다. ‘마음은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사랑하는 상대가 아름답다느니, 지능이 어떻고, 성격이 어떻고, 그의 자격증, 신분… 한 없는 자랑을 늘어 놓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런 자질을 필요로 한 것이라면, 벌써 다 갖추고 있고 보편적으로 호평받는 완전한 대상을 발견한 사랑은 게으르고 비창조적인 사랑이다. 사랑의 진실성은 변화의 위력 안에 있다. 당신의 아들이나 딸이 이성과 사랑을 나눈 이후 어떻게, 얼마나 변했는지 관찰해 보라. 그들은 사랑한 이후 용기가 있으면서도 약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검소하면서도 자만하고, 과감하면서도 소심하고, 나약하면서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만큼 그들을 신뢰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은 모든 사람이 지적하는 면에서 다행히도 장님이 되어 있고, 그가 사랑하는 존재 안에 자극할 수 있는 면에서는 비상하리만큼 명석하다는 것을 당신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그 사람을 잘 안다고 믿었고 그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단정했던 모든 사람들의 놀라는 모습을 비웃는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랑받을 때에만 성장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당신에 대해 믿어주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성장한다…. 많은 사람(부부)들이… 매일매일 재창조할 생각은 않고 그들의 사랑을 ‘보존’하고 싶어한다. 그리고 서로를 잘 안다고 믿고 있다. 사실 그들은 서로가 사랑하는 그 즉시 알아보지 못할 만큼 얼마나 젊어지고 얼마나 변하는 가를 이미 체험하였다. … 세상, 인류는 무한히 거대한 반죽 덩어리와 같아서 사랑을 계속 주물러 주지 않으면 즉시 주저앉고 만다… 우리가 다시 그들을 사랑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전에 포기를 정당화시킬 때 내세웠던 이유를 더는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이나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그에 대해 책임감을 갖는 데 있다. 그렇다. 사랑은 우리의 신분을 보고 판단하지 않는다. 사랑은 우리를 판별하고, 우리 자신을 계시해 주고 그만이 유일하게 우리를 해산시켜 줄 수 있는 우리의 진실한 존재를 회복시켜 준다…”(루이 에블리, “날마다 새벽”, 47-48).


        인간이 사랑하기를, 또 사랑받기를 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루이 에블리는 성장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행복이 사랑에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고독하기를 소외되기를 원하지 않는 까닭일 것이다. 또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어떤 형식으로든 타인인 ‘너’에 의해서 수락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나’를 시인하는 ‘너’없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사랑 받기를 원하는 것이고, 그러한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이러한 사랑의 체험은 상호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서 영원하고 항구한 하느님의 사랑, 은총을 기대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인간이 원초적으로, 본능적으로 ‘영원한 사랑’을 갈망한다. 바로 그 ‘너’가 ‘하느님’일 때 그 갈망이 채워질 수 있다. 어떤 유한한 ‘너’를 통해서도 진정되지 않는 인간의 무한한 개방성이 인간 상호간의 사랑의 체험에서 드러난다. [비단신]의 작가 뽈 글로델은 그러한 사실에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내가 끝을 모르는 무한한 것과 일치하고 있지 않다면, 나와 너의 관계는 금방 끝장나 버릴 것이다”. 바로 인간을 충만케하고 온전한 본연의 상태로 이끌어 해방 시키는 사랑이 은총이다. 그것은 아무도 임의로 조종할 수 없고, 사변으로도 이끌어낼 수 없다. 그것은 순수하게 무상으로 베풀어지는 사랑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강요될 수 없다. 사랑은 자유를 바탕으로 한다. 자유롭게 내 자신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이야말로 그 무상성을 잘 드러낸다. “사랑을 거저 주어지는 것, 사랑은 무상한 것으로서 다른 이와의 관계는 그의 자유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내가 네게 준 대가로 너는 무엇을 내게 주겠느냐? 내가 너를 위해 했던 모든 것, 너를 위해 희생했던 모든 것 대신에. 그러나 사랑은 그 어떤 권리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사랑은 다른 이가 주는 선물을 받고 황홀해 하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다른 이가 소중히 여기는 그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주는데 동의한다. 사랑은 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열어야 하고, 다른 이의 선물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것을 받기에 필요한 자신을 온전히 주어야 한다…”


        사랑이 결여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 고독이다. 고독이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수용되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다. 또 권력이라는 것도 사랑에 대치된다. 권력이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다. 개방되도록 조성된 인간 본질에 반하는 것이다. 은총은 이러한 인간의 불능성에 대한 해답이다.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느님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시라 그 원천이시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들의 사랑과 구별되는가? 그렇다. 그러면 그것은 다른 종류의 사랑인가? 아니다. 내 생각으로는 단 하나의 사랑이 있을 뿐이다. 형제적인 사랑은 진정한 대신덕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순수한 독창성이고, 바로 그것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활동을 분리시키거나 다른 두 방향으로 갈라지게 하지 않고 하나로 일치시켜 주고 있다. 형제적인 사랑은 하느님 사랑을 ‘증명’하는 그 이상을 하게 하고, 인식과 체험 안에 사랑인 그 존재의 참여를 나에게 인도해 준다. 물론 두 관계는 하느님이 사랑의 원천, 무궁 무진한 원천이시라는 의미에서 구분되어 있다. 하느님은 그 사랑이 본질에 일치되어 있으시고 그 자체로서 사랑이신 유일한 존재이시다. 그러나 그분이 분리된 관계일 것이라는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그분은 경쟁자가 되실 것이고 필연적으로 복된 인간의 적수가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힘과 인간의 시간을 방해하고 흡수할 것은 다른 인간들을 위해 상실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관계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아니다. 하느님은 다르신 분, 그분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식으로 다른 분이 아니시다. 그 관계는 ‘우정적’인 관계도 ‘사적’인 관계도 아니다.. 신심에 관계되는 모든 실수는 하느님 안에서 우정이나 애정적인 관계를 찾으려 하고, 인간적인 애정을 서로 나누도록 허용하는 ‘부부’ 관계까지도 하느님 안에서 찾으려 하는 데 있다. 하느님은 어떤 ‘친구’도 인격체를 가진 인간도 아니시다. 그분은 인간들의 사랑의 원천이시고, 우리가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척도 안에서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은 상호성의 관계,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하니까 나를 사랑하는 식으로 요구하지 않으신다. 그렇지만 그분은 유사성의 관계, 참여의 관계를 요구하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나를 사랑하라.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모든 중심을 나타낸다고 나는 생각한다”(루이 에블리, “날마다 새벽”, 68-69).


        사랑의 한가지 행위로 은총과 깊이 관련되는 것은 용서다. 용서는 사랑의 가장 뚜렷한 한가지 행위로 볼 수 있다. 예수가 가장 하느님을 소개하고 싶었던 모습은 아버지의 모습, 무엇보다도 탕자를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예수에게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용서하시는 분으로 그려내고 있다. 아버지의 뜻을 철저하게 따른 예수 자신도 죄녀를 죄인으로 판단하지 않고 있다. 7번씩 70번까지도 용서하라고 자신있게 권유하실 수 있었다. 과연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일까? 날마다 주의기도를 바치는 우리들의 반성거리이다.


        ‘용서’라는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변화시키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성서에는 많은 인물들을 보여준다. 자케오, 야곱의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그리고 막달라 여자 마리아. 무엇보다 바리사이파 사람 시몬 집에서 베풀어진 향연에서 마리아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향연의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붓고 발을 씻기는 마리아의 모습이 그렇다. 다른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시몬에게 하신 말씀은 의미심장하다.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 받았다’.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많이 용서받는다는 이야기다.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많이 용서받을 뿐 아니라, 많이 용서하는 사람이다. 많이 용서한 사람은 많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많이 용서받기 위해서도 많이 용서할 필요가 있다. 많이 사랑받기 위해서도 많이 용서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 ‘탕자의 비유’는 끊임없는 인간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이다. 과연 용서는 가능한가? 용서란 용서 청할 때 가능한가? 한 때 ‘탕자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용서 청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용서는 가능하지 않다고 강론한 적이 있다. 불교의 고리 이야기에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칼 하게도 불교의 고리 이야기에는 아버지가 변장하여 고생하는 아들을 찾아가 설득하여 데려온다는 것이다. 흔히들 스스로 해탈하여 구원을 이룩한다는 자력종교인 불교에서는  아버지의 도움이 강조되고 있고, 하느님의 도움으로 구원을 이룩한다는 타력 종교 그리스도교의 이야기에는 아들이 스스로 회개하고 되돌아 와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야기를 좀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탕자의 아버지’는 이미 탕자를 용서하였다. 날마다 동네 어귀에서 아들을 기다리는 것은 아들을 용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탕자의 귀향과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습니다’라는 죄 고백은 아버지가 용서하셨다는 것을 확인하는 절차에 불과하다. 귀향과 죄 고백 때문에 아버지가 아들을 용서한 것이 아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이 점을 아주 잘 지적하고 있다. 특히 복음을 보면 부활하신 다음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보다 먼저 ‘용서하시는 분’으로 모습을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도마가 의심했을 때, 주님이 먼저 나타나서 그에게 자신의 손과 발의 못자국을 보여주시며, 용서를 보이셨다. 그럼으로써 도마는 회개하게 되었다. 엘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도 성경에 쓰여진 모든 예언서를 풀이 해주면서 그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게 하셨다. 갈릴레아 호숫가에서도 그를 배반하고 사지에 홀로 두고 도망간 제자들에게도 주님은 생선을 굽고 아침 식사를 준비하며 건네 주셨다. 일찍이 주님이 식탁에 함께 하신다는 것은 그들과 친교를 나눔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용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들킨 그 영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그 여인이 죄를 고백했는지, 회개를 하였는지, 어떤 결심을 했는지 성서는 말이 없다. 먼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가 발설된다. 용서 받은 사람은 용서할 수 있다. 용서받기 위해서라도. 탕자의 비유는 단지 꾸며진 이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구약성서에서 우리는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 했던 아들 압살롬에 대한 애정을 볼 수 있다. 용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위대한 사랑의 행위임에 틀림없다.


이 글은 카테고리: 신학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