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은총 이해: 구약 성서-하느님의 섭리(상)

 

3.3. 하느님의 섭리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종교적으로 교육하시는데 있어서 마구잡이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전에 지니고 있었던 종교적 신념이나 행사를 걷어치우게 하시지 않으셨다. 그 때문에 성서를 통해서 이스라엘 종교 안에서도 많은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선택된 백성의 역사의 과정 안에는 종말론을 향한 진행을 엿볼 수 있다. 또 죄의 신학이나 구원의 신학을 위한 진실을 찾아볼 수도 있다. 구약성서에 의해서 적용되고 요구되는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는 이미 그리스도교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자세는 정화되고 혹은 다른 계시에 이어지는 계시를 통해서 심화되었다. 그 출발점부터 이스라엘 종교는 이방인들의 종교와는 깊은 차이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타협하지 않는 불굴의 유일신론적 자세와 그분의 섭리라는 신념이다. 하느님께서 모든 창조물 가운데 특별히 인간을 인격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배려하신다는 사고방식이었다. 교부들은 자주 이스라엘 사람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섭리의 개념들을 비교하고 있다. 하느님의 호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영원한 것에 관한 것을 약속하셨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단지 지상적이고 일시적인 축복을 약속하셨다는 것이다. 구약성서의 하느님은 요한 복음사가에서 처럼 사랑의 하느님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정의의 하느님이실 뿐이다. 그리고 2세기경 마르치온과 같은 영지주의 사상가들은 구약과 신약의 하느님을 상반된 분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들은 구약의 하느님의 성실성을 야훼께서 극단적으로 무엇인가를 제공하시고, 벌을 주시는 하느님으로, 또는 인간의 아버지들과 달리 사람들의 업적에 따라서 각자에게 상급을 주시는 분으로서 이해하고 있다. 어떻든 이러한 아버지-하느님 개념은 다양한 모습을 띤다. 그리고 바로 하느님은 신약의 선하신 하느님 아버지와 다르지 않다. 그와같이 구약성서 안에서도 하느님의 부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인정되고 있다.



        하느님의 부성적 섭리


        이러한 하느님의 부성적 섭리는 그 시절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하느님 그리고 그분의 행위는 우주 끝까지 도달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을 다스린다고 여겼다. 그분의 무시무시한 심판은 단지 죄인들만이 아니라 이방인 국가들 그리고 이스라엘 자신에게도 행사된다고 보았다(출애 32, 35; 예레 25, 1-11; 에제 14, 12-23). 그러나 여전히 이스라엘은 선택된 백성이요, 그의 자녀요(신명 32, 6), 그의 맏아들이다(출애 4, 22). 하느님의 부성적 마음은 이스라엘을 향한다(예레 31. 20). 비록 어느 어머니가 그 자식을 잊을지는 몰라도 하느님 야훼는 그의 백성을 잊지 않으신다(이사 49, 15).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들의 불충실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소원하게되었을 때에도 야훼는 고통을 받으시며, 그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셨다(호세 11, 1-9). 하느님은 상처받은 친구처럼, 남편처럼 그들에게 접근하신다(호세 7,13; 에제 23, 12-17). 신약성서 안에서 구약성서가 완성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복음이 율법의 열쇠라는 것을 안다면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관계의 역사가 상징으로서 분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과 하느님의 관계는 여기서 그리스도인과 그들의 구원자와의 관계의 예형이다. 야훼의 섭리는 선택된 백성들에게 원초적으로 행사되었다. 그리고 개별 인간들을 모르지 않지만 항상 공동체를 겨냥하고 있다. 구약성서의 운명에 대한 개념은 집합적 구원에 대한 주해이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어떻게 하느님이 매우 특별하게 그들 편에서 서서 싸우시고(열왕 상 18, 15), 그들을 위해 기적을 행하시고(열왕 상 18, 21-29; 19,1-8), 그들의 시련을 위로하시며(예레 20, 7-13) 그의 종들인 예언자들을 볼보셨는지 보게된다. 섭리의 행위는 모세, 여호수아, 다윗 등 선택된 개별 인간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개별 인간들은 단지 도구로서 선택되었을 뿐이다. 더 발전된 계시는 하느님의 섭리는 의로운 모든 사람들에게 행사되신다는 것이다(전도 51, 1-12; 지혜 2, 21-22; 3, 1-12). 그의 자비는 모든 죄인들에게 베풀어진다. 사람을 치시는 그 하느님은 그를 고쳐주시기도 하시는 하느님이시다(호세 6, 1-3). 그와같이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종에 의해서 점차적으로 그들이 하느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된다. 마침내 야훼의 종이 등장할 때(이사 42, 1-4) 그리고 이스라엘의 해방자(41,2)요,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시는 자(53, 12; 50, 6)가 등장하게 될 때, 구약의 계시는 신약 안에서 완성되는 계시를 깨닫도록 이끌고 있는 셈이다.






        하느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태도: 기도


        하느님의 부성에 대한 점진적 계시와 더불어 드러난 구약의 율법에 대한 충실성 혹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는 무엇이었는가? 그들의 태도는 무엇보다도 그들이 받게 된 모든 좋은 것은 야훼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는 것을 표현한다. 에집트로부터 출애급 사건을 책임있게 주도하셨으며(출애 15, 1-9), 약속의 땅에 들어가도록 이끄셨다(신명 8, 7-17). 드보라의 승리는 바로 야훼의 승리다(판관 5, 2-3). 삼손에게 힘을 주시고 그가 자신의 약속을 어겼을 때 그에게서 힘을 빼앗아 가신 분은 바로 야훼이시다(판관 13-16). 히즈키야와 이사야 시대에 산헤립의 침공을 철회하도록 도움을 주신 것도 야훼이시다(열왕 하 18-19). 성서 작가들이 하느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훗날 바리사이파나 펠라지아니즘에 영향을 준 사상에 대한 경고의 정식이 되고 있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그들을 너희 앞에서 몰아 내신 다음에, 행여나 너희가 착해서 그분이 너희를 이끌어 들여 이 땅을 차지하게 하셨거니 하고 속으로 엉뚱한 생각을 품지 않도록 하여라. 야훼께서 그 백성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 내시는 것은 그들이 나쁘기 때문이다. 너희가 착하고 마음이 곧아서 그들의 땅에 들어 가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신명 9, 4).


        하느님 앞에선 피조물들의 깊은 겸손이 감동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마도 죄인으로서 그들의 불쌍함을 깨닫기되는 구약성서의 성실함을 보면서 더욱 감동적일 수 있다. 개별적 인간이든 혹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이든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태도를 구약성서의 기도자들을 통해서 보게된다. 아브라함과 야곱의 기도(창세 18, 17-33; 32, 10), 사무엘이라는 아들을 얻기 위하여 청하였던 한나의 기도(사무 상 1, 11), 혹은 죄를 범한 다음 다윗의 기도(시편 51), 성전을 지어 바치며 드린 솔로몬의 기도(열왕 8, 23-61) 등이다.


        아브라함의 기도: “당신께서는 죄없는 사람을 죄인과 함께 기어이 쓸어 버리시렵니까? 저 도시 안에 죄없는 사람이 오십명이 있다면 그래도 그 곳을 쓸어 버리시렵니까?…..”(창세 18, 16-33)


        야곱의 기도: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느님, 아버지 이사악의 하느님, 저에게 고향 친척에게도 돌아가면 앞길을 열어 주마고 약속하신 야훼여! 당신께서 이 종에게 베푸신 한결같으신 사랑을 저는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 강을 건널 때 제가 가진 것이라곤 지팡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는 이렇게 두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저를 형 에사오의 손에서 건져 주십시오. 에사오가 와서 어미들과 자식들까지 우리 모두를 죽여 버리지나 않을까 두렵습니다. 당신께서는 ‘네 앞길을 정녕 열어 주고 네 자손이 바닷가 모래처럼 셀 수 없이 불어나게 해주마’하시지 않으셨읍니까?”(창세 32, 10-14).


        한나의 기도: “이 계집 종의 가련한 모습을 굽어 살펴 주십시오. 이 계집 종을 저버리지 마시고 사내 아이 하나만 점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그 아이를 야훼께 바치겠습니다. 평생 그의 머리를 깎지 않도록 하겠습니다”(사무엘 상 1, 11).


        다윗의 기도:“하느님 선한 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지신 분이여, 내 죄를 없애 주소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잘못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 내 죄 내가 알고 있사오며, 내 잘못 항상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만 죄를 얻은 몸, 당신 눈에 거슬리는 일을 한 이 몸, 벌을 내리신들 할 말이 있으리이까? 당신께서 내리신 선고 천번 만번 옳사옵니다…”(시편 51).


        예레미아와 유사한 삶과 그가 맞이하였던 박해를 당한 사람들에게는 예레미아의 기도가 감동적일 것이다. “아아,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습니까? 온 나라 사람이 다 나에게 시비를 걸고 싸움을 걸어 옵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빚진 일이 없고 빚을 준 일도 없는데, 사람마다 이 몸을 저주합니다. 야훼여, 이 백성이 복받도록 제가 주님을 진심으로 섬기지 않았습니까? 이 백성이 원수를 만났을 때나 재앙을 만나 고생할 때, 대신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러지 않았다면 저주를 받아도 좋습니다….”(예레 15, 10-21; 17, 12-28; 20, 7-18).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형적인 이스라엘의 기도를 특별히 시편 안에서 발견한다. 펠라지아니즘이 아우구스티노 이론을 공격할 때, 즉 그리스도교의 은총 개념을 공격할 때, 예로니모 성인은 외쳤다. “시편을 읽어라”. 시편은 그 전체가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사실 교회의 교부들은 시편을 그리스도교적 시선으로 읽었다. 오리게네스가 그랬고, 힐라리오가 그랬으며, 아우구스티노가 그랬다. 그들은 시편 어디에서나 그리스도, 그의 신비체적 몸을, 즉 은총을 발견하려고 노력하였다. 복음은 다윗의 청원이나 다른 시편 작가들의 기도를 영성화하여 가르치고 있다. 종교적 자세는 시편 안에서 점진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점차 그리스도교적이 되고 있다. 우리는 구약성서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나 개별 인간들에게서 기도가 성실성, 죄에 대한 고백, 박해받는 의로운 인간, 혹은 하느님에 의해 표면적으로 방치된 성실한 영혼 등에 대해서 다루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신뢰를 보이며, 그분의 봉사를 받고 기뻐하거나 그분의 용서를 획득함으로써 누리는 기쁨, 혹은 위대하신 하느님, 무한히 선하신 하느님, 거룩하신 하느님을 아는 일에서 누리게 되는 기쁨을 읽어낼 수 있다. 시편에는 유대-그리스도교적 계시의 초월성을 조명해준다. 그리고 만일 기도의 역사를 좀더 자세히 읽을 수 있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파스칼의 말을 이해하게 해 줄 것이다. 오직 하느님만이 하느님에 대해서 가치있는 태도로 말할 수 있다. 그분만이 우리 안에서 기도할 수 있다. 바울로 사도도 이미 같은 맥락에서 언급하고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음소리와 더불어(성령께서는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로마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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