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의 은총 이해-공관복음: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자녀됨(상)

 

4.1. 공관복음: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자녀됨




        공관복음에서 charis라는 용어는 아주 드물다. 오직 루가 복음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 오히려 바울로에게서 자주 나타난다. 그러므로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를 통하여 그분 안에서 우리를 위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Harncak에 의하면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는 하나의 주제로 집약될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다”라는 것이다. 이말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다른 표현이다.






        1) 예수의 세례 사건


        우선 예수의 세례 사건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어떻게 작용되고,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으며, 어떻게 그리스도교적 존재를 정의하는가를 볼 수 있다. 하느님의 계시 또는 신현사건에는 몇가지 요소가 있다. 하늘이 열린다. 성령이 내려 오신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린다는 것 등등이다. 신적 초월성을 의미하는 하늘이 가시적인 요소와 소리에 담겨진다. 성령의 내림이 소리로 선언되고 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 11). 도대체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많은 학자들이 이 표현은 구약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창세 22,2. 12.16(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머리털 하나라도 상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외아들마저), 이사 42,1(여기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 주는 자), 시편 2, 7(너는 내 아들 나 오늘 너를 낳았노라)이다. 특히 이사 42,1은 야훼의 종에 대한 노래의 시작이다. 예수가 세상에 가져다 주어야 하는 구원적 과제와 더불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예배가 묘사되고 있다. 시편 2,7은 그 아들은 왕좌에 앉게되는 인물이다. 이사42,1의 야훼의 종과 시편 2,7의 왕자의 모습을 서로 연결시키는 일이 쉽지 않지만. 예수의 왕권적 과제가 정치적이고 지상적인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께 순종하는 메시아라는 점에서 서로 일치될 수 있다. 여기에 제물로 봉헌된 이사악의 이야기를 고려하면 예수의 순종적 메시아니즘은 희생적이고 구원론적 의미를 함축하게 된다. 성령의 내림은 바로 예수가 실제로 하느님의 성령으로 인도되고 그분의 사명이 종말론적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임을 표현하는 것이다.


        한편 구약성서에서도 “하느님의 아들됨”(신자성)이 드러나지만 구약의 신자성은 세례 때의 예수의 “하느님의 아들됨”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자녀들이란 천사들, 다윗 가문의 왕, 선택된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의로운 자들, 또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뽑히운 자들, 그리고 하느님께 순명하는 자들이다(천사들을 지시하는 경우: 신명 32,8; 시편 29,1; 89,7; 욥 1,6; 다윗 가문의 왕들을 지시하는 경우: 사무하 7,14; 시편 89,27-28;2,7: 이스라엘 백성을 지시하는 경우: 출애 4,22;호세2,1;이사1,2; 의로운 자들을 지시하는 경우: 지혜 2, 13-18; 5,5; 전도 23, 1.4). 물론 예수의 신자성을 이해하는데 가치가 있기는 하지만 충분하지 못하다. 예수의 성부와의 관계는 유일하고 신비적이다. 그분은 천상적 존재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다윗이나 예언자들보다 뛰어난 분으로 소개되고 있다(마르 1,24; 3,11; 5,7). 그리스도론은 성서나 오늘의 신학이나 모두 각가지 많은 칭호로 예수를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그분의 하느님 아버지와의 특별한 신비적 관계를 어떤 도식이나 칭호나 틀로 규정지을 수 없는 분임을 이야기 해준다. 예레미아스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서 예수만이 하느님의 아들이요, 상속인이며, 다른 사람들은 종에 해당된다고 해설한다. 교회는 예수는 하느님의 외아들, 독생성자, 그리고 우리는 입양된 하느님의 자녀로 구분한다.


        은총의 관점에서 예수의 세례는 성부께서 아들에 대한 유일한 사랑을 드러내는 은총이요,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울러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도 이해된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한 예수의 사명이 바로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세우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러한 사명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고 그것을 실천해 나가셨다. 우리를 위하시는 그분은 하느님 나라와 다스림을 선포하셨다. 그것을 당신의 사명으로, 사명의 핵심으로 간주하셨다.


        


        하느님 나라(“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나라”,가톨릭 신학과 사상, 18호(1996/겨울) 78-121)참조할 것.


        


        Basileia라는 의미는 주권, 영토, 국민의 요소를 지니는 지역적 국가의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실제적인 다스림을 의미한다. 사실 다스림(Signoria)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비록 문헌에는 자주 하느님이 다스리는 어떤 영역으로서 장소적 공간을 생각하게 하는 것일 수 있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권위와 그 영향하에 들게되는 생동적 영역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의도하는 하느님 나라의 개념과 구약성서, 혹은 유다인들이 의도하는 하느님 나라라는 개념 사이에는 유사성과 아울러 상이성이 있다. 예수가 의도하는 하느님의 다스림이 창조에 다스림과 다른 무엇이라는 것과 유사하다.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은 이미 현존하는 실재이다. 그러나 충만하게 실현된 것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전체 역시 하느님의 왕권에 대한 순종을 실천으로 실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는 미래적인 것이고 기도하고 기다려야 하는 무엇으로 남아있었다. 예수에게도 하느님 나라는 다가 와야할 저 편의 것, 종말론적인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분의 인격과 활동 안에서 그 여명이 동트고 잇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어떤 국가적이고, 지상적이며, 정치적인 실체가 아니었다. 오히려 초월적이고 우주적인 것이었다. 그 나라는 사탄에 의해 다스려지는 이 ‘시대’의 파괴와 더불어 ‘우주적 심판’, 또는 ‘야훼의 날’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적 하느님 나라는 항상 심판의 맥락에서 다루어지고, “생명”(마르 9,46), ‘영원한 생명’(마태 25, 31-46), ‘잔치’(루가 13, 28-29), ‘빛’(마태 13, 41-43) 등의 비유로 언급되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 가까이 다가 온 것으로 선포하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현재적 측면은 예언자 이사야에 의해 예언된 징표의 실현 속에서 드러난다. 가난한 자들에게 기쁜 소식이요, 모든 파괴적 형태로부터의 벗어나는 것으로 드러난다. 하느님의 다스림은 곧 “생명”이다.


        공관복음이 인용하고 있는 구약성서의 “생명”의 개념은 살아 있는 존재의 모든 측면의 온전성과 관련된다. 충만과 행복, 풍요로움 성공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의 실존을 다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열거하고 있는 ‘절름발이’, ‘장님’, ‘나병환자’ 등의 불해한 처지는 죽음의 영역에 속하고 그만큼 ‘죽은 자’들로 이해되고 있는 셈이다.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그 분이 숨을 불어 넣어주셨기 때문이 아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 충만한 축복이다. 그러므로 계약에 성실한 의인들이 받게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 자신이 백성의 생명이시다(신명 30,20). 이스라엘은 이처럼 하느님과의 일치에 바탕과 중심을 둘 때 충만하게 살아가게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기원전 3세기부터 죽음을 넘어서 그분과의 변함없는 친교가 계속된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었다. 즉 죽은 자들의 부활이라는 생각이다.


        공관복음에서 ‘생명’은 미래적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치유를 통해서, 무엇보다도 악마추방을 통해서 예수로 말미암아 선포되고 있다. 사탄은 모든 악의 원인이요, 인간의 원수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는 선언하신다. “만일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하느님의 영: 마태오)으로 악마를 쫓아내면 하느님의 다스림이 너희들 가운데 도래할 것이다”(루가 11, 20). 세례 직후 광야에서의 유혹을 전하는 장면에서 표현하는 것은 그분이야말로 사탄을 쫓아내고 이길 만큼 강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게라사의 마귀들린 자의 치유는 예수께서 그의 충만한 실존, 즉 생명을 되돌려 주셨다는 악마추방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자기 자신이나 타인으로부터 분리되고 소외된 자, 미치고 벌거벗은 자, 권위나 자유도 없이 공동체로부터 고립된 들은 죽음의 나라, 무덤에 거주하며 하느님과의 친교가 단절된 자이다. 그러한 단절에서부터 예수로 말미암아, 그 분을 만남으로 자신과 자신의 권위를 되돌려 받게되는 것을 보게된다. 하느님과의 친교가 회복되는 것을 보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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