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새 ‘생명’은 신앙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데서 실현된다. 그 때문에 이 ‘생명’은 신앙의 생명이요, 희망의 생명이요 사랑의 생명이다.
신약성서에서 신앙이란 그리스도를 그의 인격의 신비 안에서 그분의 구원적 활동의 신비 안에서 생명을 가져다 주는 분으로 인식하는데서 비롯된다. 신앙은 일종의 인식이다. 성령의 안내와 그분에 대한 신뢰, 순종을 함께 드러낸다. 생명의 선물은 현재 이미 시작되고 미래에 그 충만함을 드러내기 때문에 희망 안에서 신뢰적인 기다림의 대상이 된다. 은총의 수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이며, 성령의 선물이다.
신앙은 불가피하게 사랑과 관련을 지닌다. 공관복음을 사랑과 관련된 신앙을 회개로 표현한다. 이 문제는 차후 보게될 것이다. 제자들에게 신앙은 예수를 추종하는 것과 관련이 된다. 제자들의 신앙에는 “예수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무조건적으로 자발적으로 예수를 따른다. 그분을 위해 ‘자기의 십자가를 질’만큼, 목숨을 바칠만큼 무조건적인 사랑이 표현되고 있다.
예수에게서 사랑은 모든 율법과 예언의 골자로 소개된다(마태 22, 34 이하). 여기에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언급된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는 사랑의 열정이 요구된다. 이와 같은 사랑 안에 ‘생명’이 자리 잡고 있다. ‘자기 자신처럼’(루가 19, 18이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 사랑이라는 계명과 같은 높은 가치를 지니는 두 번째 계명이다. 그 동기나 근거는 인간의 존엄성이나 다른 합리적인 동기에 바탕을 두고 있지 않다. 오히려 하느님 아버지의 무상적인 태도와 처신과 그 결과로 그들을 당신의 자녀로 부르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모든 인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다는 사실에 있다. 다른 어느 계명보다 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비록 구별되면서도 동일한 범주안에 들어 있다. 이것은 바로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서 인간의 모든 행동과 처신을 말해준다. 두가지 사랑은 중요성에 있어서 동일하지만 동일시될 수 없고 서로 교환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웃에 대한 사랑은 그 중요성이나 의미를 모두 하느님에 대한 사랑에서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축소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웃 인간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마태 25의 최후심판에 관한 비유는 이 점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바울로 신학에서 신앙은 그리스도의 빠스카 사건에 중심을 두고 있으며 아울러 교회적인 신앙고백이다. 신앙에 대한 동의는 복음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믿는다’는 동사는 ‘복종하다’라는 동사와 동일시된다. 따라서 ‘믿지 않는다’는 것은 ‘순종하지 않는다’는 동사와 동의어가 된다. 동의, 고백, 선포는 신앙, 즉 순종과 관계된다. 단순히 지성적 측면의 수락이 아니다. 신앙은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온전한 회개를 포함한다. 즉 바울로에게 있어서 ‘믿는다’는 것은 믿는 자들 마음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수락하는 것이다.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여 그분과의 친교를 실현함을 뜻한다. 이처럼 선포되고 수락된 신앙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계속 하느님의 자녀로 머물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바울로의 신앙은 인식적인 측면에서만 아니라 인격적이고 총체적이다.
물론 사도 바울로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서 주로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입양, 아들됨이라는 체험을 다루는 것은 하느님 사랑에 대한, 즉 은총에 대한 수락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사도 바울로에게도 신앙과 사랑은 서로 내재적 연결을 지니고 있다. 신앙은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신앙은 내적으로 사랑에 대한 근본적인 준비를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결여 상태에서는 사랑이 실현될 수 없다.
요한 복음과 요한 서간에서도 신앙과 사랑은 하나를 이룬다. 신앙과 사랑 모두 성자를 통한 성부의 사랑, 우리를 위한 사랑의 계시 안에 숨겨져 있다. 요한 1서 4, 9-10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와같이 특별히 계시되어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에게 선사된 것이다. 따라서 신앙 안에서 우리의 수락은 그리스도를 위한, 하느님 아버지를 위한 우리의 사랑이다. 신앙은 사랑이요, 사랑은 신앙인 셈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웃과의 친교의 본보기요 근거가 된다. 요한 13, 34.과 15,22은 그런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우리는 신약성서가 은총을 ‘생명’, ‘친교’로 계시하고 있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은총이란 우리에게 건네어진 성부, 성자, 성려이신 하느님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실존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것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초월적 상위성을 중단시키거나 감소하는 일이 아니다. 또 우리의 인간성의 능력을 감소하고나 중단시키는 일도 아니다. 이 새로운 ‘생명’은 자주 ‘자녀됨’, ‘내주’ ‘그리스도 안의 거주’, ‘그리스도를 뒤따름’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물론 현실적으로 그 충만한 실현은 아직도 기다려야 할 종말론적 실재이다. 우리는 그러한 종말론적 희망이요 목표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 하느님과 인간 안에 교류되는 은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브리엘 마르셀의 대화라는 인격적 관계 개념이 도움을 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