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3. 아우구스티노와 펠라지오의 논쟁
역사적 결과는 아우구스티노의 승리였다. 카르타고 공의회(418)는 펠라지오 은총 이론을 종식 시켰다. 교황 조시모(Zosimus)는 아우구스티노의 은총 이론을 선택하였다. 인간이 자유롭고, 의롭고,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선언하였다. 사실 펠라지오는 언제나 먼저 인간의 은총화로부터 출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제자들에게는 인간이 마치 은총없이도 자기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인상을 주도록 이끌었다. 그럼에도 펠라지오의 단죄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그 역시 신앙 안에서 희랍 전통을 따라서 교육적인 측면을 강조한 전통적이고 우주론적인 도식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노의 은총이론은 바울로의 사상이나 체험과 유사하다. 물론 바울로 사상이 신약성서의 전체 사상은 아니다. 어떻든 아우구스티노의 은총 이론이 서방적 상황에서 특수하게 요청되었던 신앙의 새로운 해답이었다. 그 상황에서 로고스의 작용을 통한 “인류의 교육”은 설득력 있는 그리스도교의 신앙 해설이 되지 못했다. 펠라지오 주교는 세상에 대해서 성실함을 강조하였고, 아우구스티노는 절대적으로 작용하는 하느님의 은총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맡길 것을 강조하였다. 펠라지오 주교에게는 인간의 강인함, 불굴의 고대 종교성들이 드러나고 있다. 아우구스티노에게는 순수하게 수용적이고 극단적으로 하느님께 의존되어 있는 인간 존재를 보게된다. 카르타고 공의회는 구원 역사 안에서 인간적 요소가 전적으로 과소 평가되는 쪽으로 기울었다.
5-6세기 경 펠라지오 주교의 추종자들이 다시금 반기를 들었다. 소위 세미펠라지아니즘이라고 말한다. 이 명칭은 후대 17세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느님의 은총의 작용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자유의 여지를 마련하자는 펠라지아니즘의 잔재였다. 이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인간은 자기 자유 의지의 힘으로 은총을 구할 수 있고, 또 구할 수 있어야 한다. 2) 인간은 받아들인 은총을 보전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노의 엄격한 추종자들은 이러한 견해에도 강력히 반발하였다. 이러한 논쟁은 제2차 오랑제 공의회(529)에서 다시 세미펠라지아니즘을 단죄함으로서 종결되었다. 교황 보니파시오 II(Bonifatius)는 “인간은 스스로는 죄악과 허위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과연 이 회칙이 공적인 것이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분실되었다가 16기에 이르러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든 오랑제 2차 공의회가 의도하는 바는 인간의 구원 과정에서 그 결실은 하느님의 주도권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다시한번 강조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아우구스티노에게 제시되는 질문들은 논쟁의 문제로 남게되고 중세 스콜라 신학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도대체 은총의 본질은 무엇인가? 인간의 본성에는 무엇이 고유한 것이고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하는 것인가? 인간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존되어 있다면 구원과 멸망에로 각자는 예정되어 있는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