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의지, 자유 그리고 은총
성 아우구스티노에 의한 은총과 자유에 관한 주제를 연구하기 위하여 매우 간단한 방법은 펠라지오의 의견 대립 안에서 살펴보는 일일 것이다. 은총에 관한한 아우구스티노의 신학은 펠라지오의 영향을 저지할 필요성에 따라 발전되었다. 역사적으로 펠라지오가 실제적으로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그리고 상대편들이 논쟁하면서 소급하고 있는 귀결들이 그의 실제적 의견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제자들의 견해였는지 정확하게 구별하는 일도 간단하지 않다.
펠라지오의 견해는 영적인 목적을 지니고 고행적인 삶을 의무적으로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충분히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도록 필요한 것을 주신만큼 잘못에 관한 인간의 윤리적 책임성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하느님의 선물이 유용하게 되지 못하고 죄를 범하게 되면 그 탓은 하느님에게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에게 돌려져야 한다는 점을 주장한 것이다. 펠라지오의 경우 ‘은총’이란 용어는 매우 광의적이고 일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후 규정된 신학적이고 협의적인 의미로 하느님의 자녀됨, 또는 초자연적인 은총의 의미로 제한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신 모든 것, 창조된 선물들, 자유, 윤리적인 법, 범한 죄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 등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서 아우구스티노의 은총 개념은 그처럼 낙관적이지 못하였다. 그에 의하면 아담은 본성적으로 창조주로부터 영혼과 육신 사이에 완전한 균형, 하느님의 자녀, 불사성을 은총으로 받았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그 후 인간들은 이러한 선물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의지는 사랑으로부터 생기를 얻는다. 인간은 사랑하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사랑한다. 행복이란 최고선 안에서의 안식인데 아담의 범죄 후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된 지상적인 것들을 사랑하면서 그 안에서 만족스러운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것이 사욕편정이다(cupiditas). 이것은 분명 착각의 상황이다. 왜냐하면 피조물들은 변화하는 것이요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것이므로 행복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이란 고정된 것, 불변적인 것에 도달함으로써 그것을 유지해주는 존재의 항구성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욕편정으로 행복을 갈망하며 헐떡거린다. 마치 어느 곳에서도 안식을 취할 수 없는 병자처럼. 그러므로 그는 고백하고 있다. ‘나는 주님 안에 쉬기까지 불안하나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자유 의지로 그 행복을 실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의지 조차도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또 인간은 아담으로부터 타락되어 욕정에 지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노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종합할 수 있다. ‘하느님에 율법에 대한 인식, 본성, 죄의 용서도 은총을 구성하지 못한다. 은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졌다. 그 선사된 은총으로 율법이 완성되고 본성이 자유롭게 되고 죄를 이기도록되어 있다.’
자유 의지와 은총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은총없이 그 자유 의지는 선을 행할 수 없다. 은총은 사랑과 더불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한다. 하느님께 복종하는 만큼 우리는 자유롭게 된다.
어떻게 은총이 의지를 자유롭게 하는지에 관하여 아우구스티노의 이론은 396년 [De diversisi quaestionibus ad Simplicainum]에서 412년 [De spiritu e litter]까지의 작품 안에서 세가지 측면의 발전을 보이고 있다. 우선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자유의지를 선사하신다. 그 의지로 신앙을 선택하든가 불신앙을 택하든가 할 수 있다. 믿을 수 있는 능력(poatestas credendi)은 모두 주어진 선물이다. 둘째로 하느님은 내적, 혹은 외적으로 도움을 주셔서 지성에 영향을 주신다. 그것은 우리가 신앙으로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거부하든가 결정할 수 있는 부르심의 순간이다. 셋째로 하느님은 의지를 설득하신다. 그럼으로서 인간은 의지로 믿거나 열의를 보이게 된다. 이 셋째 단계에서 은총은 성령의 행위처럼 기쁨을 통해서 자유 의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당신은 구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하십시오. 왜냐하면 하느님은 당신의 선한 의지를 따라서 여러분 안에서 의지하고 행동하도록 작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으로 충분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불리움을 받았지만 뽑힌 사람은 적기”(마태 22, 14) 때문이다. 뽑힌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 안에 응답하고 따르도록 불리운 사람들이다. 그처럼 의지를 지닌 사람들에게 작용하셔서 그들을 이끄신다.
아우구스티노는 요한 6,44-45를 해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론하고 있다.
“아무도 성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들었을 때 강제적인 힘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랑 역시 영혼을 끌어 당기는 힘입니다. 우리는 심판에 관한 말씀의 신중함으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복음의 이러한 선언에 직면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내가 이끌어 당김을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나의 의지를 믿을 수 있는가? (세상의 물질적) 즐거움이 우리를 끌어 당길 때 끌어 당김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니다. 즐거움으로부터 끌어 당겨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네 즐거움을 야훼에게서 찾아라.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시리라. 그에게 앞날을 맡기고 그를 믿어라. 몸소 당신께서 행해 주시리라.’(시편 37 4). 마음의 즐거움이 존재한다. 그것을 통하여 천상의 빵을 맛본다. 시편작가는 ‘각자가 그의 즐거움으로 끌어 당겨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필요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즐거움에 의해서.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꺼이. 따라서 우리는 합리적으로 말할 수 있다. 인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끌어진다. 인간은 진리 안에서, 지복 안에서, 정의 안에서, 영원한 생명 안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 즐거움을 발견한다. 만일 육체의 감각들이 그들의 즐거움을 지니고 있다면 왜 영혼은 그러한 즐거움을 가질 수 없다고 보는가? 만일 영혼이 그들 나름의 즐거움이 없다면 시편작가는 그렇게 노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몸을 숨기는 자, 당신의 집 기름기로 배불리 먹이시고 시냇가 단물을 마시게 하시니, 생명의 샘이 정녕 당신께 있고 우리 앞길은 당신의 빛을 받아 환합니다”(시편 36, 7-9).
나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주십시오.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목말라하는 마음을 주십시오. 이 사막에서 나그네이며 목말라하는 것을 느끼게 하십시오. 영원한 조국의 샘에서 숨쉬는 마음을 주십시오. 그려면 그는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확실히 아린 마음으로 내가 말하면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의 분명한 의도는 은총의 행위가 어떻게 구성되고 어떻게 은총이 의지의 선택의 충만한 능력을 제거하거나 감소하지 않는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은총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이끌어 당김이요 빛을 비추심이다. 그리고 계시, 즉 그리스도 자신이신 성부의 말씀을 통하여 지성과 의지 안에 작용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어느 누구도 강제함 없이 그분의 가르침으로 매력을 느끼게 하신다’는 것이다. ‘매력을 느끼다’라는 것은 아우구스티노가 ‘기쁨으로 가르치면서(docendo delectat)’라는 표현으로 지시하는 비춤-끌어당김-즐거움을 종합적으로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과 의지에 대한 은총의 끌어당김은 오직 사랑에 근거해서 이해될 수 있지만, 회개하기 시작하는 순간에 이 끌어당김의 선행적이고 강력한 힘을 강조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노는 그의 편지 131에서 주님은 ‘만일 성부께서 그를 duxerit(이끌지) 않으면 나에게 올 수 없다’가 아니라 ‘성부께서 그를 traxerit(이끌지) 않으면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traxerit non duxerit).
물론 하느님이 끌어당김은 ‘양이 풀밭에 이끌린다’ ‘어린 아이가 사탕에 끌린다’와 같은 유혹의 어떤 것일 수는 없다. 즉 어떤 신체적으로 유혹적인 필요성에 기울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자신의 존재와 관련된다. 인간은 하느님을 통해서 우리 존재를 이루고 그분 안에서 생명의 목적을 발견하며 휴식과 행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의 끌어당김을 영적이고 총체적 가치와 목적 안에서 지복, 진리, 정의, 영원한 생명의 나라, 진정한 충만함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은총은 그리스도의 애정어린 이끌어 당김이다. 우리를 하느님, 존재 자체를 향하여 걸어가게 하고 자신을 실현하도록 한다. 반대로 약물이나 물질적 유혹의 끌어 당김은 인간을 무존재로 이끌며,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보았다. 하느님의 끌어당김은 강제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내적으로 작용하실 줄 아신다’. 하느님은 최고로 사랑 안에서 모든 것 위에 자신을 드러내면서 인간을 삶의 유일하고 충만한 행복으로 이끄신다.
396년 De diversis quaestionibus ad Simplicanum으로부터 로마 9, 10-29에 관한 해설에 이르기까지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의 선택과 거부, 즉 구원과 비구원의 문제를 드라마틱한 방법으로 제시한다. 하느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에게 자비를 사용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냉혹하게 대하신다. 그점에 관해 로마 9, 18에서 읽을 수 있다. 원죄로 인하여 인간은 모두 죄인들이요 하느님께 빚진 자들이다. 선택된자 들에게는 그분이 그 빚을 탕감하신다면 그것은 그분의 순수한 자비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가 거부된 사람에게 항거할 수 있는 이유는 없다. 하느님의 자비는 결코 의무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것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하느님은 인격적인 방법을 사용하신다. 각자가 신앙과 구원에 이끌어질 수 있는 그 길과 방법을 아신다. 그러나 어떤 자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항거한다면 그것은 하느님 자신이 그에 대해서 가엾이 여기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이 그의 마음을 무디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를 악에로 이끄시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자비의 은총을 부인하는 것이다. 어떤 불의도 하느님께 탓을 돌릴 수는 없다.
예정에 관한 문제는 훗날 교황 식스도 3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우구스티노는 그의 의견에 반대하는 아프리카 수도자들을 경고하면서 다루고 있다. 그 수도자들은 만일 회개의 시작일지라도 은총이 작용한다면 어떻게 인간의 자유 의지를 주장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였다. 만일 예정된 사람들만 구원된다면 어떻게 고행이나 윤리적 의무가 필요하냐고 반문하였다. 이러한 반-아우구스티노 입장은 세미펠라지아니즘으로 이어진다. 아우구스티노는 은총이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하여 실패할 수 없는 능력을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De correptione et gratia]에서 악을 행한 사람을 위한 질책의 유용성을 드러내고 있다. 죄는 항상 자유롭게 완수되는 것이다. 재생의 은총은 상실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마지막까지 인내할 수 있는 은총은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예정된 자들에게만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비록 세례를 받고, 신앙을 가졌을지라도 인내하지 못하고 따라서 단죄된다. 그들의 상실의 자녀들이다. 어떻든 아우구스티노의 예정론은 많은 문제점을 야기시키고 있다.

7.1. 의지, 자유 그리고 은총
성 아우구스티노에 의한 은총과 자유에 관한 주제를 연구하기 위하여 매우 간단한 방법은 펠라지오의 의견 대립 안에서 살펴보는 일일 것이다. 은총에 관한한 아우구스티노의 신학은 펠라지오의 영향을 저지할 필요성에 따라 발전되었다. 역사적으로 펠라지오가 실제적으로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그리고 상대편들이 논쟁하면서 소급하고 있는 귀결들이 그의 실제적 의견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제자들의 견해였는지 정확하게 구별하는 일도 간단하지 않다.
펠라지오의 견해는 영적인 목적을 지니고 고행적인 삶을 의무적으로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충분히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도록 필요한 것을 주신만큼 잘못에 관한 인간의 윤리적 책임성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하느님의 선물이 유용하게 되지 못하고 죄를 범하게 되면 그 탓은 하느님에게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에게 돌려져야 한다는 점을 주장한 것이다. 펠라지오의 경우 ‘은총’이란 용어는 매우 광의적이고 일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후 규정된 신학적이고 협의적인 의미로 하느님의 자녀됨, 또는 초자연적인 은총의 의미로 제한되지 않았다.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신 모든 것, 창조된 선물들, 자유, 윤리적인 법, 범한 죄에 대한 하느님의 용서 등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서 아우구스티노의 은총 개념은 그처럼 낙관적이지 못하였다. 그에 의하면 아담은 본성적으로 창조주로부터 영혼과 육신 사이에 완전한 균형, 하느님의 자녀, 불사성을 은총으로 받았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그 후 인간들은 이러한 선물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의지는 사랑으로부터 생기를 얻는다. 인간은 사랑하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을 사랑한다. 행복이란 최고선 안에서의 안식인데 아담의 범죄 후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된 지상적인 것들을 사랑하면서 그 안에서 만족스러운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것이 사욕편정이다(cupiditas). 이것은 분명 착각의 상황이다. 왜냐하면 피조물들은 변화하는 것이요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것이므로 행복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행복이란 고정된 것, 불변적인 것에 도달함으로써 그것을 유지해주는 존재의 항구성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욕편정으로 행복을 갈망하며 헐떡거린다. 마치 어느 곳에서도 안식을 취할 수 없는 병자처럼. 그러므로 그는 고백하고 있다. ‘나는 주님 안에 쉬기까지 불안하나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자유 의지로 그 행복을 실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의지 조차도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또 인간은 아담으로부터 타락되어 욕정에 지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노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종합할 수 있다. ‘하느님에 율법에 대한 인식, 본성, 죄의 용서도 은총을 구성하지 못한다. 은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어졌다. 그 선사된 은총으로 율법이 완성되고 본성이 자유롭게 되고 죄를 이기도록되어 있다.’
자유 의지와 은총 사이의 관계를 설명한다. 은총없이 그 자유 의지는 선을 행할 수 없다. 은총은 사랑과 더불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한다. 하느님께 복종하는 만큼 우리는 자유롭게 된다.
어떻게 은총이 의지를 자유롭게 하는지에 관하여 아우구스티노의 이론은 396년 [De diversisi quaestionibus ad Simplicainum]에서 412년 [De spiritu e litter]까지의 작품 안에서 세가지 측면의 발전을 보이고 있다. 우선 하느님은 무엇보다도 자유의지를 선사하신다. 그 의지로 신앙을 선택하든가 불신앙을 택하든가 할 수 있다. 믿을 수 있는 능력(poatestas credendi)은 모두 주어진 선물이다. 둘째로 하느님은 내적, 혹은 외적으로 도움을 주셔서 지성에 영향을 주신다. 그것은 우리가 신앙으로 받아들이든가 아니면 거부하든가 결정할 수 있는 부르심의 순간이다. 셋째로 하느님은 의지를 설득하신다. 그럼으로서 인간은 의지로 믿거나 열의를 보이게 된다. 이 셋째 단계에서 은총은 성령의 행위처럼 기쁨을 통해서 자유 의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당신은 구원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하십시오. 왜냐하면 하느님은 당신의 선한 의지를 따라서 여러분 안에서 의지하고 행동하도록 작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으로 충분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불리움을 받았지만 뽑힌 사람은 적기”(마태 22, 14) 때문이다. 뽑힌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 안에 응답하고 따르도록 불리운 사람들이다. 그처럼 의지를 지닌 사람들에게 작용하셔서 그들을 이끄신다.
아우구스티노는 요한 6,44-45를 해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강론하고 있다.
“아무도 성부께서 이끌어 주시지 않으면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들었을 때 강제적인 힘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랑 역시 영혼을 끌어 당기는 힘입니다. 우리는 심판에 관한 말씀의 신중함으로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복음의 이러한 선언에 직면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 내가 이끌어 당김을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나의 의지를 믿을 수 있는가? (세상의 물질적) 즐거움이 우리를 끌어 당길 때 끌어 당김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니다. 즐거움으로부터 끌어 당겨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네 즐거움을 야훼에게서 찾아라. 네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시리라. 그에게 앞날을 맡기고 그를 믿어라. 몸소 당신께서 행해 주시리라.’(시편 37 4). 마음의 즐거움이 존재한다. 그것을 통하여 천상의 빵을 맛본다. 시편작가는 ‘각자가 그의 즐거움으로 끌어 당겨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필요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즐거움에 의해서.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꺼이. 따라서 우리는 합리적으로 말할 수 있다. 인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끌어진다. 인간은 진리 안에서, 지복 안에서, 정의 안에서, 영원한 생명 안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 즐거움을 발견한다. 만일 육체의 감각들이 그들의 즐거움을 지니고 있다면 왜 영혼은 그러한 즐거움을 가질 수 없다고 보는가? 만일 영혼이 그들 나름의 즐거움이 없다면 시편작가는 그렇게 노래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몸을 숨기는 자, 당신의 집 기름기로 배불리 먹이시고 시냇가 단물을 마시게 하시니, 생명의 샘이 정녕 당신께 있고 우리 앞길은 당신의 빛을 받아 환합니다”(시편 36, 7-9).
나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주십시오.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목말라하는 마음을 주십시오. 이 사막에서 나그네이며 목말라하는 것을 느끼게 하십시오. 영원한 조국의 샘에서 숨쉬는 마음을 주십시오. 그려면 그는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할 것입니다. 확실히 아린 마음으로 내가 말하면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의 분명한 의도는 은총의 행위가 어떻게 구성되고 어떻게 은총이 의지의 선택의 충만한 능력을 제거하거나 감소하지 않는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은총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이끌어 당김이요 빛을 비추심이다. 그리고 계시, 즉 그리스도 자신이신 성부의 말씀을 통하여 지성과 의지 안에 작용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느님은 ‘어느 누구도 강제함 없이 그분의 가르침으로 매력을 느끼게 하신다’는 것이다. ‘매력을 느끼다’라는 것은 아우구스티노가 ‘기쁨으로 가르치면서(docendo delectat)’라는 표현으로 지시하는 비춤-끌어당김-즐거움을 종합적으로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과 의지에 대한 은총의 끌어당김은 오직 사랑에 근거해서 이해될 수 있지만, 회개하기 시작하는 순간에 이 끌어당김의 선행적이고 강력한 힘을 강조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노는 그의 편지 131에서 주님은 ‘만일 성부께서 그를 duxerit(이끌지) 않으면 나에게 올 수 없다’가 아니라 ‘성부께서 그를 traxerit(이끌지) 않으면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traxerit non duxerit).
물론 하느님이 끌어당김은 ‘양이 풀밭에 이끌린다’ ‘어린 아이가 사탕에 끌린다’와 같은 유혹의 어떤 것일 수는 없다. 즉 어떤 신체적으로 유혹적인 필요성에 기울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자신의 존재와 관련된다. 인간은 하느님을 통해서 우리 존재를 이루고 그분 안에서 생명의 목적을 발견하며 휴식과 행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의 끌어당김을 영적이고 총체적 가치와 목적 안에서 지복, 진리, 정의, 영원한 생명의 나라, 진정한 충만함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은총은 그리스도의 애정어린 이끌어 당김이다. 우리를 하느님, 존재 자체를 향하여 걸어가게 하고 자신을 실현하도록 한다. 반대로 약물이나 물질적 유혹의 끌어 당김은 인간을 무존재로 이끌며,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고 보았다. 하느님의 끌어당김은 강제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내적으로 작용하실 줄 아신다’. 하느님은 최고로 사랑 안에서 모든 것 위에 자신을 드러내면서 인간을 삶의 유일하고 충만한 행복으로 이끄신다.
396년 De diversis quaestionibus ad Simplicanum으로부터 로마 9, 10-29에 관한 해설에 이르기까지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의 선택과 거부, 즉 구원과 비구원의 문제를 드라마틱한 방법으로 제시한다. 하느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에게 자비를 사용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냉혹하게 대하신다. 그점에 관해 로마 9, 18에서 읽을 수 있다. 원죄로 인하여 인간은 모두 죄인들이요 하느님께 빚진 자들이다. 선택된자 들에게는 그분이 그 빚을 탕감하신다면 그것은 그분의 순수한 자비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가 거부된 사람에게 항거할 수 있는 이유는 없다. 하느님의 자비는 결코 의무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것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하느님은 인격적인 방법을 사용하신다. 각자가 신앙과 구원에 이끌어질 수 있는 그 길과 방법을 아신다. 그러나 어떤 자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항거한다면 그것은 하느님 자신이 그에 대해서 가엾이 여기는 것이 아니며, 하느님이 그의 마음을 무디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를 악에로 이끄시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자비의 은총을 부인하는 것이다. 어떤 불의도 하느님께 탓을 돌릴 수는 없다.
예정에 관한 문제는 훗날 교황 식스도 3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우구스티노는 그의 의견에 반대하는 아프리카 수도자들을 경고하면서 다루고 있다. 그 수도자들은 만일 회개의 시작일지라도 은총이 작용한다면 어떻게 인간의 자유 의지를 주장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였다. 만일 예정된 사람들만 구원된다면 어떻게 고행이나 윤리적 의무가 필요하냐고 반문하였다. 이러한 반-아우구스티노 입장은 세미펠라지아니즘으로 이어진다. 아우구스티노는 은총이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하여 실패할 수 없는 능력을 반복하여 강조하였다. [De correptione et gratia]에서 악을 행한 사람을 위한 질책의 유용성을 드러내고 있다. 죄는 항상 자유롭게 완수되는 것이다. 재생의 은총은 상실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마지막까지 인내할 수 있는 은총은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예정된 자들에게만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의 자녀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비록 세례를 받고, 신앙을 가졌을지라도 인내하지 못하고 따라서 단죄된다. 그들의 상실의 자녀들이다. 어떻든 아우구스티노의 예정론은 많은 문제점을 야기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