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의 은총이론-예정과 보편적 구원의지(상)

 

10. 3. 예정과 보편적 구원의지


토마스는 예정에 관하여 신학대전   I, 23에서 다루고 있다. 그것은 I, 22의 하느님의 섭리( 1항: 하느님의 섭리가 있다. 섭리는 지혜의 일부이다. 섭리는 ‘모든 것을 안배하는 신의 이성과 동일하다. 사물 안에는 존재와 목적을 향한 질서가 있다. 그리고 존재도 목적도 다 하느님의 작품이다. 2항: 모든 것에 하느님의 섭리가 미친다. 하느님은 가끔 어떤 선이 저지되지 않기 위해서 악을 허용하시기도 한다. 3항: 섭리는 질서의 안배 속에서 표명된다. 질서는 하느님 자신이 직접 안배한다. 그러나 그 수행은 2차적인 원인들에게 내맡기신다. 4항: 창조에 있어서 섭리의 목적은 각각의 등급의 존재다들로 구성된 우주의 완성이다) 와 관련되고 있다.




        23문 예정


        1항: 하느님에겐 피조물들이 그들의 고유한 본성의 한계와 기능을 넘어서는 목적, 즉 영원한 생명에로 방향지우는 예정도 있다.


        2항: 질서의 배정으로서 예정은 하느님에게 속한다. 그 수행은 수동적으로 인간에게 맡겨지기도 한다.


        3항: 하느님은 어떤 이들이 자기들의 나쁜 의지로 죄짓는 것을 묵인하고 그것을 하지 목하도록 강요하지 않으시며, 그 점에 대해서 처벌하신다는 의미에서 재가(Reprobatio)도 있다.


        4항: 인간은 사랑하는 것을 선택하시지만, 하느님은 선택한 것들을 사랑하신다. 하느님으로부터 예정된 사람들은 사랑받는 자들이다. 하느님은 일반적으로 모든 이의 구원을 원한다. 그러나 특별히 구원될 자격이 있는 자들이 구원되기를 원한다.


        5항: 하느님편에서 볼 때 하느님의 의지를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 편에서 볼 때 신앙을 선행하는 공로들이 있다. 그러나 신앙을 가지기에 앞서 하느님 앞에 내세울 어떤 변변한 공로도 없다. 예정은 하느님의 의지의 결과이다.


        6항: 우주의 안배 속에는 필연적인 원인들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원인들과도 연결되어 있다.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남아 있고 예정의 결과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신에게는 어느 것도 그의 의지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예정의 결과는 확실하고 빗나갈 수 없다.


        7항: 하느님은 누가 예정된 자들이고 얼마나 되는지 알고 있다. 건축가가 그 건물의 크기와 규모를 미리 규정짓고 알고 있듯이.


        8항: 성인들의 기도는 예정에 도움이 된다. 그것은 그 효과에 대해서만 그렇다.






        하느님은 그분의 다스림 안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다. 창조는 고유한 본성에 상응하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하느님 자신이 각각의 피조물의 목적이며 또 우주 전체의 목적이시다. 마치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자신의 생각과 설계를 바탕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생각과 설계를 가지고 모든 피조물들이 그 생각과 설계에 상응하는 목적을 향하도록 방향을 지워주고 창조하신다. 그 생각과 설계를 하느님의 섭리로 부른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그 설계에 따라서 창조하시기 때문에 그 섭리로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무로 떨어지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즉 섭리는 하느님이 질서를 세우시는 생각, 계획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거기에 인간적 자유와 상충하지 않을 수 있을까?


        토마스의 이러한 이론을 이해하려면, 이성적 존재의 의지는 자유로운 원인이요, 그 결과들이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닌, 우연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토마스는 하느님의 섭리, 즉 설계는 우연유는 우연적인 방법으로, 필연유는 필연적인 방법으로 행위하도록 질서지우셨다. 인간적 자유는 그 목적을 향하도록 되어 있다. 자유로운 원인으로서 인간의 모든 행위는 동시에 하느님의 설계의 결실이며, 그 목적을 향하도록 질서지우신 의지의 결실이다. 의인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어떤 것이 발생하도록 허락하시지 않는다. 한편 악한 자들이 자신의 탓으로 악에 떨어지는 것을 ‘방치하신다’는 의미에서 막지 않으신다. 예정이란 영원한 생명을 향하게 하는 특별한 섭리다. 이것은 초자연적이다. 그러므로 창조된 본성의 목적이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다. 마지막 목표를 향하는 이 섭리는 일반적 섭리와 구별된다. 예를 들면 궁수가 활을 쏘지 않으면 화살이 표적을 향하여 날아갈 수 없다. 그처럼 인간이란 피조물은 하느님에 의하지 않고서는 그 마지막 목표를 향해서 정향될 수 없다. 이 비유가 ‘예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물론 인간은 하느님에 의해서만 아니라 자유롭게 자신이 방향을 정한다는데 궁수의 화살과 다르다. 그렇기는 해도 그 설계는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지 인간이란 창조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예정은 창조물 안에 작용되고 있는 하느님의 동인, 부르심, 은총과 구별된다. 예정은 실행에로 질서지워지 하나의 계획이다. 그러므로 효과를 가져오는 의지와 관련된다.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 어떤 일이 발생할 것을 아신다면, 그것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를 위한 공간이 남아 있지 않다. 하느님께서 어떤 것을 원한다면 그것은 확실하게 실현될 것이다.  그것은 자유를 그렇게 창조하였기 때문에 자유롭게 행할 것을 원하신다. 만일 예정이 틀릴 수 없는 것이라면 거기에는 틀림없이 단죄되도록 정해진 것이 있는가?


        이에 대해서 토마스는 과연 하느님께서 악을 원할 수 있는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답을 제시한다. 그분은 죄를 원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들이 죄를 지는 것을 허락하실 뿐이시다. 하느님은 인간들이 죄를 짓는 것을 방해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하느님을 불의하다고 말할 수 없다.


        토마스에 의하면 구원에 예정된 사람들은 적다. 예를 들면 인간의 대부분은 중간적 지성의 능력을 지닌다. 적은 사람들이 바보에 속하고, 아주 적은 사람들이 심오한 지식을 소유한다. 하느님을 직관하는 것은 자연적이고 평상적인 조건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것이 초자연적인 이유로, 또 인간의 본성이 원죄로 말미암아 은총을 상실했기 때문에 예정된 자들이 적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아우구스티노도 은총은 적은 사람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은총이 구원에 결정적이기 때문에 적은 사람들이 예정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되고 진리에 대한 인식에 이르기를 원하신다”(1 티모 2,4)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 토마스는 아우구스티노의 입장을 따라 해설하고 있다. “그밖에도 예정은 어떤 차별을 내포한다. 그런데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원한다’. 이것은 티모테오에게 보낸 첫째 편지 2장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구원에로 미리 배정하는 예정은 선택없이 이루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느님은 선행적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되기를 원한다. 이 때 원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원하는 것이 아니고 조건적으로 원하는 것이다. 귀결적으로 원한다는 것은 단순하게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토마스는 아우구스티노를 따르면서 하느님은 구원될 그들이 구원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즉 한정적이다. 둘째로 ‘모두’라는 용어는 모든 상태의 사람들, 남자, 여자, 유다인, 이방인, 큰 사람, 작은 사람이라는 의미에서다. 셋째로 선행적 의지와 결과적 의지를 구별하는 요한 다마쉐누스의 견해를 인용한다. 예를 들면 판사는 모든 사람이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살인자를 만나게 되면 공적으로 위험성을 주는 정의가 실행되기를 원한다는 것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은 선행적 의지의 측면에서 모두가 구원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 의지에 의하면 ‘그분은 정의의 요구를 따라서’ 어떤 사람들이 단죄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효과적 의지 측면에서 어떤 사람은 구원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단죄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글은 카테고리: 신학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