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론에서의 중요 쟁점-트리엔트 공의회의 입장(1545-1563)

 

11.2 트리엔트 공의회의 입장(1545-1563)


의화론이 루터를 중심으로 한 종교개혁자들에 의하여 가톨릭 교회를 거스리는 주쟁점으로 나타나자, 교회는 트리엔트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공의회는 ‘의화에 관한 선언’을 통하여 종교 개혁자들의 주장을 반박하며 은총론의 요지를 발표하였다. 여기서 교회는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진 상태의 인간이 구원에 이르는 도정을 묘사하고 있다(DS 1520-1583).


        종교개혁자들은 인간이 자신의 행위로서 영원한 생명을 보수로 가져다 줄만한 완전에 이룰 수 있다고 믿는 것을 일종의 환상으로 보았다. 구원,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신자이면서도 죄인으로 머무는 인간을 예수로 말미암아 은총의 판결을 통하여 무죄판결을 내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자는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다. 이들은 은총만이 인간을 구하고 어떠한 인간 역사도 구원 사업에서 어떤 무엇도 이룰 수 없다고 보았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인간의 공로를 견주려는 것을 불경으로 보았다. 오히려 하느님의 계명은 인간들에게 자신들의 무능력을 가능한한 분명히 가시화하려는데 기여한다. 그래서 이들은 은총만으로(sola Gratia), 그리스도만으로(solus Christus), 신앙만으로(sola fidei)라는 기치를 내세웠다. 이들은 후기 중세의 신학과 신심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 종교 도덕적인 업적 사고의 체계에 직면해서 인간적 역사없는 하느님의 구원의 무조건성을 강조하였다. 이 일방성은 루터 사망 후  일부 추종자들에 의해 선행은 구원과 지복에 필요하다기 보다는 오히려 해롭다는 극단적인 명제까지 내놓을 정도였다. 이러한 일방성에 직면해서 공의회는 교회 방어 반응을 보였고 선행과 공로를 역설하기에 이르렀다.


        교회는 의화를 위한 준비에서 신앙이 의화의 시작이며 근간임을 규정하였다. 이 신앙의 실재가 루터에 의해서 그 성서적 의의와 의화적 의미가 새로 발견되었고, 또 달리 이해되었기 때문에 자세하게 신앙의 본질을 밝혀야 했다. 공의회는 우선 의화의 시초여 근본으로서 신앙과 은총을 강조하였다.


        인간은 노예상태에 있기 때문에 스스로는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기 위한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밝힌다. 하느님이 먼저 당신을 저버린 죄인들을 향하는 가운데 주도권을 장악하신다. 가까이 다가서는 은총 속에서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을 흔든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신앙을 불러 일으키는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인간을 의화시킨다.  바로 이 신앙이 인간 구원의 시초이며 모든 의화의 기반이요 근간임을 선언한다(DS 1532). 이 입장은 신앙을 통한 입장을 강조하는 종교개혁자들과 일치한다. 그러나 교회는 시작하는 신앙이 은총임을 이미 오랑제 공의회(529)에서 선포하였다(DS375, 376). 후에 제1차 바티칸 공의회 역시 은총의 선물과 의화를 위한 준비의 시작으로써 신앙을 지적하였다(DS 3010, 3012).


        공의회는 의화에 필요한 신앙이 무내용적 단순 신뢰가 아니라 하느님의 구체적 자비를 믿는 내용으로 규정된 신앙임을 밝힌다. 즉 하느님의 전능 안에서의 구체적인 계시와 약속에 다가가는 신앙이다. 그래서 신앙은 하느님에 의해 일깨워지고 듣는 속에서 신앙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으로부터 계시되었고 약속된 것을 진실하다고 여기면서 하느님을 향해 자유로이 일어서는 행위이다(DS 1526, 1524). 그리고 교회는 신앙이 행해지는 신앙이어야한다고 강조한다. 즉 죽은 신앙이 아니라 역사를 통하여 살아있는 신앙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공의회는 복음에는 신앙 외에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다른 모든 것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기록되지도 않으며 자유로우며, 십계명은 그리스도 신자들과 상관없다는 주장을 파문한다. 의화되고 완전한 인간은 하느님과 교회의 계명을 준수하는데 억매이지 않고 신앙에만 매여있다는 주장도 파문한다(DS 1569-1570). 이러한 교리 명제가 선포된 것은 루터가 선행을 강조하는 야고버서를 로마서의 바울로의 의화관과 다르다고 배제한 것에 대한 반응이다. 공의회는 행동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라는 야고 2,14-26과 사랑을 통하여 작용하는 신앙을 강조하는 갈라 5,6을 첨가하고 있다(DS 1531). 공의회는 은총을 강조하는 루터의 견해 속에서 인격체로서의 하느님께 대한 책임있는 상대자로서의 인간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위험을 보았다. 즉 하느님의 은총이 마치 인간의 자유를 질식시키는 듯이 보여졌다. 그리고 신앙만으로라는 기본 단어에서 선행이 무시될 위험성을 보았다.


        공의회는 인간의 책임과 선행의 필요성, 그리고 인간의 참된 쇄신을 강조하였다. 사실 루터 역시 선행을 금하지 않았음을 인정해야 한다. 루터의 가르침인 슈말칼튼 조약문(Schmalkaldon Traktatus)에서 의화가 인간의 쇄신을 포함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신앙을 통하여 성베드로가 말하듯이(사도 19, 9) 새롭고 청순한 마음을 받고, 하느님과 우리 중재자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를 온전히 의롭고 거룩하게 보존하려 하고 보존하신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과 쇄신, 죄의 용서, 그 다음에 선행이 따른다. 우리는 선행이 따르지 않는 곳에 신앙은 거짓되다고 말한다. 이처럼 루터 역시 선행의 가치를 알지만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간주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선사된 구원 열매요, 그것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보고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 이기주의적 선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한편 가톨릭 교회가 인간의 협력을 강조하지만 이것은 하느님의 역사를 보완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응답의 자세로 이해한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이 은총만을 강조하는데 비해서 이 의화가 하느님을 통해서 자신의 응답으로 해답된 인간없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틀림없이 알고 있다. 루터가 당신 민중들 사이에 과감하게 퍼져있던 외적인 역사성에 대해, 신앙의 내면성을 강조했으나 공의회가 가르치는 대로 참된 신앙이 행동적 신앙이라는 사실을 원칙적으로 부인하지 않은 점을 미루어 종교개혁자들과 가톨릭 교회의 대립은 외형상의 문제이고 의화론의 일치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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