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화은총과 성화은총-성화은총의 본질(은총과 본성의 관계(상))

 

13.2.2. 은총과 본성의 관계


1) 전통속에서의 은총과 본성 관계


은총의 본질은 본성과의 관계를 규명함으로써 선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성서에는 본성과 은총의 문제가 아무런 역할을 지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은총의 형이상학적 개념이 생소하기 때문이다. 성서에는 인간이 고정적으로 자신 안에 폐쇄된 본성이 아니라, 약동적인 본성, 약동적인 조물로 이해되고 있다. 희랍사상과의 논쟁을 통해서 교회는 피조물을 본성, 또는 자연으로 번역하기에 이른다. 본성이라면 생기는 것, 생성하는 것을 뜻한다. 생성된 사건의 본질이 본성으로 규정되었다. 그래서 본성은 순전한 원천에서 나오는 존재자의 본질을 가르킨다. 중세기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추상적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본성 개념이 수용되었다. 토마스는 인간의 본성에서 출발하여 본성을 그 자체로 폐쇄된 본질로 규정하지 않고 무한대로 개방되어 있는 무엇으로 규정하고 있다. 인간 본성은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하느님을 지향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하느님에게로 향한 인간의 본성적 정향을 바탕으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을 인간 본성의 정의 안에 이끌어들인다. 물론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과의 이 공동체성을 인간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하고 선사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초자연적인 것은 본성에 첨가되는 외적 구조가 아니라 본성 자체를 초극하는 충만에로 이끄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언어적으로 명사 초월적 본성(supernatura)이 아니라 형용사 초본성적(supernaturalis)이 사용되었다. 즉 초자연적인 것이 실체가 아니라 인간 본성 자체에 일어나는 어떤 것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인간의 의의 충만이 은총을 전제하면 은총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은총에 대한 요청을 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하지만 토마스에게서 desiderium naturale(자연적 욕구)는 인간의 요청이 아니라, 하느님에 의해서 인간이 전적으로 요청된 것을 의미한다. 즉 주도권이 하느님에게 주어져 있다. 이러한 하느님의 주도권 안에서 인간의 자주성이 소멸되지 않는다. 인간이 전적으로 요청된다는 것은 인간 자유의 요청됨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유로 받아들여지고 응답되어야 한다. 이처럼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자유를 위한 공간, 여백을 남겨두려고 하였다. 그러나 중세 후기에 들어서면서 토마스의 이론 체계와 견해를 달리하는 주장이 생겨났다. 새롭게 비판적인 본성개념이 발견되었다. 여기서는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본성을 상부에서부터 생각하지 않고 하부에서부터 생각하였다. 본성은 이제 일차적이고 자명하고 규범적이 된다. 본성이 본연의 것이 되고, 은총은 불필요한 것, 상부세계, 특별한 세계가 된다. 은총은 이제 기껏해야 본성이 스스로 이룩할 수 잇는 것을 좀 더 빨리 도달할 수 있게 하는 조력물이요, 교육적 수단으로 평가되었다. 여기서 은총은 순전히 도구적인 관점에서 평가되었다.


        한편 개신교 신학자들은 아우구스티노 이론 체계의 본성과 은총에서 출발한다. 아우구스티노에 의하면 본성과 은총은 사실상 단일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실상의 단일성에서부터 이제는 필요한 단일성이 되었다. 단일성이 죄를 통하여 망실될 때 본성은 은총의 손실을 통해서 부패되었다. 은총은 이제 인간 본성의 통합을 위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주장으로 한편으로는 은총의 본성화가 따라왔고 인간 본성의 완전 부패성이 따라왔다.


        17세기 얀세니즘은 유사한 입장을 취한다. 이 은총이론의 배경은 인간성을 강조하는 르네상스시대였다. 얀세니즘은 인간이 자기 순수 본성에 입각해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기에는 불가능하고 모든 것을 은총에 감사한다는 아우구스티노의 입장을 취한다. 여기서 은총은 다시 인간의 불가결한 조건이 된다. 인간은 탐욕이나 죄에 의해 규정되든지, 아니면 거역할 수 없는 은총에 의해서 규정된다. 이 얀세니즘의 명제는 교도권으로부터 배격되었다(DS 1901, 2001, 2301). 그러나 얀세니즘을 배격함으로써 일방적인 반명게가 생겨났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본성의 질서와 은총의 질서를 말하는 이중질서를 발전시킨다. 말하자면 인간에게는 자연적인 목표와 초자연적인 목표가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토마스의 본연의 의도가 잘못 이해되었다. 토마스에게서는 오직 하나의 인간 본성의 목표, 하느님과의 일치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유일한 목표는 단지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은총 속에서 인간에게 전달할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선사하는 가운데 인간의 자유를 요청하고, 자유를 충만으로 이끈다. 그런데 얀세니즘에 반대하는 스콜라 신학에서는 하나의 움직임이 이제는 이중적인 역사를 지닌다. 근대 세계가 순전히 세계의 외적 첨가물인 은총을 점차적으로 배격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2) 본성과 은총 관계의 현대 신학적 토론


        본성과 은총의 관계에 대한 전통적 스콜라 신학에 대해서 소위 신신학이 비판을 가하였다. 대표적 인물은 앙리 드 루박(H. de Lubac)이다. 루박 자신은 새신학을 전개하려는 것이 아니라 구신학을 쇄신하려 했다. 신학의 쇄신자들은 아우구스티노와 토마스의 신학에로 복귀하려 하였다. 이 활동의 이면에는 하느님의 육화에서 출발하여 하느님이 이 세상에 현존하셔야 하고 세상과 결속되어 증거되어야 한다는 특정한 강생신학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거대한 운동의 배경 뒤에서 그리고 현대 사조와의 논쟁의 배경 하에서 이들은  지상의 실재, 노동, 역사, 그리고 인간 역사성의 의미를 강조했다. 여기서부터 이들은 교회의 역사성의 새로운 이해에 이르게 된다. 


        루박은 블롱델의 철학에 힘입어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을 해석하는 가운데 쇄신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토마스처럼 신중심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하부로부터, 즉 인간의 실천으로부터 나아가는 블롱델의 노선을 따른다. 이 문맥 안에서 루박은 토마스를 해석 본성에 대한 은총의 비채무성을 어떻게 설명하는가에 어려움을 느꼈다. 왜냐하면 하부에서부터, 인간에게서부터 생각할 때, 인간 본성의 내면을 하느님과의 일치에 대한 동경으로 규정할 때, 은총은 거의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황 비오 12세는 칙서 Humani Generis에서 신신학이 은총을 본성과 동일화한다고 비난하였다. 근본에서 루박은 새로운 정당한 문제를 옛 신학 범주로써 해결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한 번 더 본성 개념에서 출발한다. 비인격적 존재자에게서는 무엇에 대한 본질상의 요청을 가질 때, 이 요청의 충만은 이 존재자에게 본질적이고 필연적으로 요청된다. 그러나 루박은 인격적 존재자의 차원에서는 사건이 달리 일어난다고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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