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인간들 앞에 끌려온 죄인
이미 본대로 죄를 저지르게 되면 죄인은 우선 남의 시선을 피하며, 들키지 않는 한 불안 속에서 남의 동정을 살핀다. 그러다가 죄가 발각되면 나의 죄악감이 심화되고 죄책감이 더 무거워진다. 이런 감정 속에 인간이 자기 잘못을 평가하기 힘들고 저지를 죄와 관계없는 다른 행위도 죄로 보게 된다. 곧 남의 시선과 반응이 나의 죄악을 재인식하게 한다. 남의 죄와 죄인을 동일시 할 때 죄인은 가책에 잠겨 죄에서 헤어날 길을 찾지 못한다. 따라서 죄인은 자기 개성을 상실하게 되고(내가 바로 그 ‘짓’이 아닌데도) 남의 판단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도둑질하던 사람이 도둑이 되며, 전과자의 악순환에 빠지고 만다. 남들이 죄와 죄인을 구별할 경우에 나의 죄의식은 크게 달라진다. 대개의 경우 나의 죄를 볼 때 사람들은 관용을 보이든지, 또는 이해하려는 객관성을 보인다. 첫째로, 죄를 오염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죄인을 깨끗하지 못한 사람(더러운 **) 때묻은 사람으로 볼 때, 죄는 사람을 더럽히고 오염시키는 악이기에 전염병으로 취급된다. 과거에는 죄를 ‘정결과 불결’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하여 파악되어 왔는 데 요즘은 죄를 단순한 실수로 본다. 이 죄는 무지와 교육 부족에서 생긴 병이며, 그 병에는 오염된 자를 적합한 방법으로 회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주장은 사회환경만 깨끗해지면 범죄의 건수가 줄 것이라고 말한다.(죄인은 한편으로 가책에서 벗어날 길이 트인 것 같지만, 죄가 죄인의 취지나 도의와 분리되어 죄인이 두 책임자로 취급된다) 성선설에 따라 인간은 선인(善人)으로 태어나지만 사회가 그를 악인(惡人)으로 만든다는 논리에 따라 사회가 개선만 되면 죄가 없어진다고 주장할 수 도 있다. 죄인을 사회의 희생자로 볼 때 인간인 그 죄인은 자기 개성과 자유를 박탈당하는 일이 생긴다. 죄의 자백은 단순한 치료법이 되어 죄의 책임을 피할 기회가 될 수 있다. 죄를 오염으로 보는 견해는 원초적인 상징을 충분히 비판하지 않고, 죄를 가볍게 다룰 수 있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사실상 죄는 오염이 아니다. 오염이란 것은 단순한 상징뿐이지 죄의 성격을 충분히 드러내지는 못한다. 둘째로, 남이 나의 죄를 법에 따라 따지려는 태도를 살펴야 한다. 법을 냉정하게 응용함으로써 형벌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심리학적인 입장에서 죄를 평가하려고 한다. 즉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죄를 범했다 하는 입장이다. 즉 범의(犯意)가 있었는가 아니면 우발적인 범죄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죄인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과학적으로 따지려는 셈이다. 그러나 벽두부터 심각한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벌 개념이 강하고 약함에 따라 죄인의 입장이 달라진다. 벌을 적용할 때 판사의 사고방식과 피고인의 사고방식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판결을 듣고 피고인이 대개 ‘억울하다’고 항의한다. 피고인의 승락없이 만든 법이 과연 구속력이 있을까? 죄인이 법의 구속력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억울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법대로 판결했다 하더라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법을 거부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법 개념 때문이다. 법은 원래 국민들이 서로를 인정한다는 사실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범위가 막연하다. 법, 즉 실증법이 객관성이 있는 것 같지만 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규범은 따로 있다. 이 규범들은 전통과 문화 및 역사와 관련되어 있기에 합리화시킬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바로 이 전통과 문화 때문에 어떤 사회 계층에서는 어떤 짓이 죄로 취급되기도 하고, 또는 그렇지 않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법을 절대화시킬 수 없다. 법 위에, 그리고 법 뒤에 사회의 규범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을 기준으로 하여 죄인의 범의(犯意)를 따지는 일도 그 한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대개의 경우 현대법은 옛날에 사회를 지배하던 관례와 별 차이가 없기에 판사의 재량이 작용하는 때가 많으며, 죄인은 자기 잘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셋째로, 죄를 착각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 특히 현대에 많이 발달된 인문과학의 영향으로 현대인들은 죄인의 잘못을 이해하려 한다. 범인이 의식적이나 또는 무의식적으로 범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그 범행 자체가 의미를 가진다는 심층심리학적인 대전제 아래 죄를 착각으로 본다. 범죄는 범인의 원래 의욕을 탄로시키면서 동시에 욕구불만을 드러낸다. 범인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크게 착각했었기 때문에, 지도만 잘 받으면 범인의 의욕을 잘 분석하여 그 의욕을 순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 죄는 착각으로 남는다. 범인이 착각했다 하더라도 죄는 이미 지난 일이며 결과를 초래하는 짓인 것이다. 착각에서 환멸이 생기며, 환멸에서 단념이 생기고, 단념에서 위축이 생기고, 위축에서 의욕이 생기고, 의욕에서 착각이 생긴다는 악순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결국 죄를 오염이나 위반, 또는 착각으로 보더라도 인간은 자기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들이 인간의 죄를 간섭하면서 어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해명을 얻으려고 하더라도 범인 자신은 책임과 자유를 박탈당할 뿐이다. 죄의 악성(惡性)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서는 이 세 가지 개념인 오염, 위반, 착각을 이용하기는 했으나, 하느님이 보여주신 신의(信義)를 바탕으로 하여 이들 개념들을 아주 새롭게 재해석하였다. 어떤 사회이든지 신의(信義)와 계약(契約)의 개념을 도입하지 않으면 죄인들에게 도움을 줄 수 가 없다. 사목상 현대 사조의 영향을 받아 죄의 양상을 약화시키려는 사목자는 죄인들을 해방시키기는커녕 불안과 부족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래서 죄인을 죄인으로 취급해야 한다.
1.4. 죄의식의 변동
1.4.1. 상징과 법의 역할
죄에 대한 올바른 의식을 가지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다. 누구나 죄악을 저지르면 죄악감이나 죄책감을 느끼나, 감정에서 의식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복잡하다. 가장 어려운 것은 자기 잘못에 대한 판단이다. 판단을 내리려면 우선 죄를 상징하는 표현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죄의 상징을 충분히 비판하지 않으면 죄에 대한 신화나 설화에 빠질 수 있다. 죄에 대한 설화는 위로나 그럴싸한 설명을 제공하기 때문에 개인의 판단을 저해할 수 있다. 인간은 설화에서 당연히 의식으로 넘어가 죄를 제거하고 씻어 주는 의식에 몰두하기 때문에 자기가 범한 행위에 대하여 판단을 피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고해소에 들어가서 나의 죄를 느낀 대로 고백하기만 하면 고해신부나 하느님이 알아서 나의 잘잘못을 판단하리라는 안일한 생각을 할 수 있다. 대개의 경우 교우들은 자신이 느낀 죄는 고백하나 의식한 죄는 고백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죄악감(罪惡感)을 노출하나 죄를 고백하지 않는다. 요약해 말하면 인간이 죄악감에서 죄악을 표현하는 상징으로 넘어가고, 상징에서 사회적인 이야기로 넘어가며, 설화나 신화에서 의식으로 넘어갈 수도 있는 데, 이런 과정을 밟으면 현실과 멀어지고 판단을 내리지 못하며 죄를 의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죄를 의식하게 하는 판단을 내리려면 기준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미 본대로 성서와 교회의 전통이 마련해 준 길잡이를 그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이 길잡이는 보통 계명과 법으로 귀착한다. 계명과 법을 수단으로 생각하면 되지만, 대개 계명과 법을 절대화시키고 그들을 최후 목적으로 생각한다. 법을 절대화시키면 죄가 법의 위반으로 인식되고 법은 그 제재로 보인다. 이제는 법, 위반, 제재가 일련의 법적인 사건으로 이해되어 하느님에까지 소급할 여유가 없으며, 용서가 끼여들 틈도 없다. 그러므로 죄는 더 이상 부자 관계의 기부로도 보이지 않고, 게다가 용서될 나의 행위로도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용서의 확실성이 없는 한 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하느님께서 나의 죄를 제시하시는 이유는 나의 잘못을 지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의 잘못을 용서하기 위한 것이다. 죄가 용서를 받을 만한 행위로 의식되지 않으면 죄의 성격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1.4.2. 현대세계가 미친 영향
죄의 의식이 희박했다고 개탄하기 전에 죄의 의식을 어렵게 만든 현대의 변동 상황을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첫째로, 죄의식과 분리시킬 수 없는 점이 있다면 바로 하느님에 대한 의식이다. 죄관(罪觀)과 신관(神觀)이 서로 직결되고 죄가 신인 관계의 파괴라고 하면 죄의식과 하느님의 의식은 상호 불과분한 관계에 놓여 있다. 창조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아무런 관계없는 원리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원리와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따라서 죄는 원리의 위반으로밖에 보일 수 없다. 그리고 삼위일체 교리를 중요시하지 않으면 하느님은 법의 제정자와 심판자로 인식된다. 따라서 죄는 질서의 파괴로 보인다. 그리스도론을 잘못 이해하면(특히, 십자가 사건) 죄는 한 집단의 행위, 즉 유다인의 집단죄로 볼 수 있고 나의 죄의 비중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종말론도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완성된 구원을 새창조로 이해할 것 같으면 현세사와 후세간의 단절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현대 사조에 따라 많은 사람들은 현세와 후세의 일관성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따라서 교우들이 건설해야 할 정의의 세상이 곧 하느님의 나라라고 생각한다면 죄는 현 창조의 파괴로 인식된다. 그런 경우에 죄의 악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실재로 죄가 영생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종말을 잘못 이해하면 창조와 구원을 분리시킬 위험이 있고, 따라서 죄의 악성도 이해 못할 위험도 있다.
둘째로, 사목자들이 새롭고 폭넓은 죄의식을 심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과거에 법률주의에 얽매인 죄의식이 도움이 되기보다는 압박감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행위 자체보다 상태에 역점을 두고 각 개인의 행위보다 죄를 집단 행위로 보는 경향이 있다. 과거에 인간에게 미친 영향을 외면하다시피 하여 오직 하느님만을 생각해 왔으나, 요즘은 오히려 하느님을 망각하고 인간을 위주로 하여 죄를 대인관계의 파괴로 보는 이가 많다. 요약해서 말하면 법에서 관계로, 행위에서 상태로, 하느님에서 인간으로 죄의 초점을 이동시키는 바람에 많은 신자들이 새로운 죄의식을 가지게 되었는데 많은 경우에 과거와 같은 불균형한 죄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셋째로, 현대 과학의 영향을 받아서 인간이 자기 행위를 재검토하게 되었다. 과거에 자기 행위를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었기에 행위 자체를 분리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불확실성의 세계라서 행위가 애매 모호성을 띠게 되었다. 현대 인간은 모순 속에서 사는 것 같다. 사실 어떤 행위이든 이중효과를 낸다. 행위마다 장단점이 다 있고 관점에 따라 좋게 볼 수도 있고 나쁘게 볼 수 도 있다. 각 개인의 책임과 의도를 떠나서 악행에서도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행위들은 이중효과를 낸다. 우리 생활을 성찰할 때 모순을 발견하면서 우리 행위의 장단점을 평가하기도 어렵고, 죄를 죄로 의식하기도 어렵게 되었다. 현대 과학은 또 다른 영향을 미친다. 현상, 숫자, 화학적 반응 하나 하나를 분석하기보다도 현대 과학자들이 체계적으로 해석하려 한다. 어떤 현상이 어떤 조직을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통상에 관한 행위가 국가경제정책을 분리시킬 수 없고 심지어 세계 추세와 따로 떼어 낼 수 없을 정도로 얽힌 시대에 사는 현대인은 행위 하나 하나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죄의식이 희박해 진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 차원에서 보다 넓게 생각하다 보면 한 개인의 책임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1.4.3. 윤리학의 새 이해
전통적인 윤리가 한 개인의 개성을 중요시해 왔으며, 각 개인을 책임자로 보고 도덕을 인간의 과제로 보았다. 도의(道義)나 도리(道理)란 개념을 바탕으로 하여 법이란 개념이 많이 발달되어 각 개인의 진정함을 규제해 왔다. 그리고 인간의 도리를 마땅히 해야 할 당위성을 띤 업무로 이해하는 통로가 지배적이었다. 변함을 모르는 법(도리)과 인간의 본성이 혼동되다시피 되어서 재검토될 성질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 법에 입각하여 인간은 자기 행위의 선악(善惡)을 판단했다. 곧 법만 잘 지키면 인간은 완성에 도달한다. 법을 위반하는 것은 업무를 불이행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윤리가 달라졌다. 인간의 진정함은 대인 관계속에 이루어진 상호 인식에 의해 드러난다. 이미 지정된 질서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살아가면서 자아실현에 그 중점을 둔다. 법이란 것이 더 이상 행동의 규범이 아닌 자아관여의 원칙이 된다. 법은 이제 단정적인 성격과 확고부동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위반이란 개념도 사라지고 죄의식도 희박해 진다. 죄란 것은 이제 개인주의이며, 숙명주의이다. 죄가 있다면 사회와 경제의 무질서에 있다. 있는 것과 있어야 할 것, 즉 현실과 이상을 비교하면서 죄를 찾으려는 태도는 결국 죄가 폭력사태와 거짓생활에 끼어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죄의식이란 불공평한 상태를 거부하는 응분과 부합하는 경향이 있다. 죄는 이제 집단 행위이며, 인간 중심주의를 기준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행위일 분이다. 오히려 죄를 특정한 행위로 보는 옛 윤리에 대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왜냐하면 행위 자체의 선악성을 따지는 윤리가 죄의 원인을 감추고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의 길잡이가 된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기 대문이다. 죄란 말은 이제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근본적인 태도가 되거나 인간을 억제하는 불의한 객관적인 사회구조가 된다. 따라서 각 개인의 악행은 겨우 실수일 뿐이다. 죄는 인간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실수란 것은 특정한 행위에 국한되어 인간이 얼마든지 스스로 수정할 수 있고 또 정리할 수 있는 상황이다.
전통적인 윤리에 대한 이해가 상당한 문제를 일으켰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없다. 이미 본대로 법은 추상적인 원칙이라기 보다도 인격자 사이의 관계를 통제하는 매개체이며, 하느님과 동시에 인간에 대한 사랑을 규정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 윤리가 법을 절대화시켰고 윤리신학이 법과 하느님의 뜻을 동일시하였기 때문에 하느님의 진면목을 흐리게 했다고 보아야 한다. 새 윤리의 이해가 일단 사람을 법률주의와 개인주의에서 해방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약성서의 기본 개념으로 보아야 할 계약과 역사(구세사)개념을 재발견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불의의 사태에 대한 응분이 폭력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다. 하느님의 용서를 받고 자기 자신을 죄인으로 생각하는 자만이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개인 죄에 대한 죄의식이 약해지면 인간은 공격심을 감당할 수 없다. 그 반면에 용서받은 자는 압제자의 개성을 인식할 수 있고 폭력의 악순환을 깨뜨릴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인간이 자기 잘못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자기가 얼마나 파괴되었는지를 알아 볼 수가 없다. 결국 윤리가 죄의 의식에 대해서 도움을 주기보다도 개인주의와 상황주의로 변한다.
1.4.4. 형법이 미친 영향
원래 사법권이 완전히 독립되어야 하는 데 불행하게도 군주의 재량에 속해 있거나 정치의 도구가 되어 있다. 죄의식에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독재이다. 죄를 조작하던가 상식을 넘어서는 형벌을 내리는 어용판사들과 정치가들이 죄의식을 무너지게 한다. 이런 상태에서는 죄를 평가하는 기준을 찾기가 어려워지고, 또 자기 잘못에 대한 판단을 하는 것은 자살적 행위가 된다. 불행하게도 정치적 송사가 일반 국민들의 도덕 윤리생활에 엄청난 피해를 입히는 것이다. 질서를 유지한답시고 양심을 유린하는 정권만을 탓할 수도 없다. 사상과 행동에 있어서 여유를 주지 않는 정권을 두둔하는 지식인과 종교인들의 책임이 더 크다. 독재하에 팽창하는 교회들은 해방과 자유의 기수가 되기보다는 압제자의 하수인이 되고 만다. 일반적으로 인간들을 법-위반-제재의 악순환 속에 묶어 놓은 위정자들에 못지 않게 무책임한 태도를 취하는 종교인들도 법-죄-형벌의 악순환 속에 신자들을 구속한다. 그들은 하느님을 ‘복수하는 신’으로 전락시키고 죄의 벌에다 별도로 형벌을 가하는 망나니로 보인다. 사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영생에 관하여 공갈을 치는 종교인들이 죄의식을 흐리게 하고 있다. 또 그들은 법의 위반에 따르는 제재와 죄에 부합하는 죄와 벌을 혼동하여 죄의 악성을 약화시킨다. 그리고 용서 대신 속죄를 강조하게 된다. 건전한 신학에서는 속죄와 용서가 원래 서로 상반된 개념이 아니다. 속죄란 것은 행위의 행동에 해당하는 복원(復原)의 시도이다. 용서는 순수한 인격적인 차원에서 성립된다. 그리고 속죄는 깨진 질서를 복구하는 행위인데 죄와 벌 사이에서 그 균형을 찾아 상쇄개념으로 규제된다. 그러나 용서는 인간을 새롭게 하며 더 풍부하게 만든다. 따라서 용서가 속죄를 상대화시키고 속죄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독재와 결탁하는 종교인들은 속죄만 강조하고 용서를 후세로 미루는 경향이 짙다. 이미 말한대로 용서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면 죄를 제대로 의식할 수 없다. 하느님과 화해할 가능성이 없으면 인간은 자기가 입은 상처의 위험성을 헤아릴 수 없고, 자기 파괴조차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약해서 말하면 법의 위반에 해당하는 제재와 죄를 따르는 벌을 혼용해서는 안되며 용서와 속죄의 관계에서 용서의 우의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죄의식을 기대할 수 없다.
1.4.5. 심층 심리분석학
윤리학을 무너뜨리고 기독교인들의 죄의식을 유년시절에 쌓인 죄악감과 혼동하는 것으로 보이던 심층심리분석학이 죄의식에 있어서 결국 도움이 되었다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물론 죄악감과 이성으로 이루어진 판단에 의해 성립된 죄의식은 아주 다르다. 성(性)과 관련되어 있는 죄악감이 죄책감과 혼동될 수 도 없다. 이제 와서 심층심리분석학자들이 프로이드의 독단주의를 버리고 자기네들의 분석의 한계성을 인정하면서 부터 교육자나 사목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사실 무의식층의 요구를 분석하면 행동의 동기를 평가할 수 있다. 각계의 물의를 일으켰던 심층심리분석학자들이 자유와 책임을 약화시키기보다는 각계에 자극을 주고 현대인들의 인식을 새롭게 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들이 죄의식을 더 어렵게 했다고 인정해야 하지만 사실 그들은 성서가 요구하는 그 만큼은 요구하지 않았다.
– 1장의 결론 –
인간이 쌓아 둔 죄에 대한 경험이 죄론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죄를 표현하는데 쓰이는 상징의 역할부터 생각할 수 있었으며 죄악감과 죄의식을 구별할 수 있었다. 죄의 악성은 아직도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죄의 심각성은 짐작할 수 있었다. 죄의식을 변동시키는 상황을 돌아봄으로써 우리는 신앙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이해할 수 있다. 결국 구세사와 관계없이 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2. 죄의 정의
2.1. 구약성서에서의 고찰
2.1.1. 죄의 본보기 : 창세기 3장
창세기는 죄에 대한 귀중한 재료를 제공해 준다. 창조에 관한 이야기를 두번 기록하면서 죄의 역사를 펼쳐준다. 온 인류를 대표하는 인간이란 인물이 저지른 죄를 비롯하여 그 인간의 아들이 범한 살인사건을 거쳐서 온 인류에로 확대되어 가는 죄의 팽창을 노아의 홍수와 바벨탑의 신화까지 동원하여 묘사해 가고 있다. 이어서 창세기의 작가들은 하느님의 반응, 즉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신앙에 의해 이루어진 신인관계를 상술한다. 창세기의 구조를 통해서 구세사의 윤곽이 드러난다. 이 구세사는 하느님의 선물로 시작되고, 인간의 거부로 변절되며, 하느님의 더 큰 사랑으로 완성되는 세 단계로 나뉘어진다. 이것만 보아도 죄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죄는 태초부터 있던 필연악이 아니라 역사 속에 생긴 사고에서 제거할 수 없는 불가사의가 아니다. 하느님의 개입으로써 불행이 행복으로 변한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의 지혜 문학가들이 인류의 공통된 경험을 묘사해 주기 위하여 이스라엘의 역사에 벌어진 사건보다 고대 근동문화권에 속해 있는 설화를 이용했다는 사실을 지적할 만하다. 원래 이 설화가 고대 바빌론의 ‘Enuma Elish’라는 서사시에서 유래한 이야기이다. 사실상 누구나 창조주를 암시해 주는 피조물(로마 1, 19-21)과 양심의 소리(로마 2, 14-15)가 신인관계의 첫 매개체라고 보아야 한다. 그 다음 이 설화는 민담과 흡사하다. 전설같은 이야기가 신빙성이나 역사성을 띠고 있는지를 따지기에 앞서 이 민담은 국한된 어떤 사건보다도 죄의 보편성을 실감나게 말해 주고 있다. 그 내용으로 보아서 누구나 자기 실생활과 들어맞고 있음을 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민담과 설화만이 여러 문화권의 장벽을 넘을 수 있기 때문에 창세기 3장에 기록되어 있는 이야기처럼 널리 알려진 인기있는 민담은 드물 것이다. 야휘스트계출신 사학자이자 현인들인 그들은 솔로몬 시대의 사회악과 죄인의 심리를 묘사하려 했으나, 오늘날까지 죄의 이야기에 대하여 도움을 주고 있다. 요약해서 말하면 인간이라고 불린 주인공을 등장시키는 창세기 3장은 원인론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 즉 인간이 놓여 있는 처지와 정황을 설명하면서 현세에서 겪어야 할 갖가지 시련과 고통, 그리고 죄에 대한 쓰라린 경험을 설명해 주고 있다. 이 대목은 전형적이며 포괄적인 죄의 본보기를 묘사함으로써 각자의 형편을 이해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이 대목은 죄의 위치를 규명함으로써 구원경륜에 대한 개념을 심어 준다. 이스라엘이 실제로 겪어 온 시련들과 그 사건에 따르는 계시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현인들은 사학적(史學的) 개념과 범주를 이용하여 구세사의 출발점과 기본 노선을 그려 주었다.
창세기 3장을 간단하게 분석해 보자. 1절에서 7절까지의 첫 부분은 뱀의 등장, 첫 남녀의 위반, 그리고 위반에 따른 첫 결과를 묘사하고 잇다. 여기서는 바빌론의 신화와 가나안의 신화에서 지신(Baal)과 다산의 신으로 등장하는 뱀의 모습이 달라졌다. 이제 뱀은 피조물인 동물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는 뱀이 더 이상 하느님의 경쟁자로 나오지 않고 인간과 동등한 입장에서, 즉 피조물의 입장에서 나온다. 따라서 인간은 단지 악의 세력의 희생물이 아니라 악이 동조자로 나타난다. 성서의 작가들은 뱀의 상징을 탈신화화(탈신話化)하여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면서도 죄악의 원인에 대하여 인간 개개인이 책임을 혼자서 질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힌다. 즉 인간들은 피조물들과 함께 죄악을 저질렀다고 말한다. 뱀이 먼저 하느님의 계명과 금지령을 왜곡한다. 뱀은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하나도 따 먹지 말라고 하셨는 데 그것이 정말이냐?”라고 하면서 회의(懷疑)를 불러일으킨다. 그러자 여자가 즉시 뱀의 말을 바로 잡아 하느님의 뜻을 재확인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다 주셨으며 생명의 열매까지 허락하셨다. 다른 신화를 보면 신들은 생명의 열매를 제외시켰지만 하느님께서는 생명의 하느님이시니 만큼 생명의 열매까지 허락하신 것이다. 다만 하느님께서는 선악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금지하셨다. 이 금지령은 인간의 판단과 책임에 호소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인간은 모든 것을 선물로 다 받았지만 이 선물들은 거부할 수 있는 사실이 금지령에 의해 나타난다. 이 금지령은 인간의 위치, 즉 하느님과의 의존관계를 뜻함으로써 인간의 자유의 성격을 규명한다. 인간은 절대적인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자유, 즉 하느님과 관계되는 자유를 누린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절대적인 자유 인양 행동할 것 같으면 자기 자신을 파괴하게 된다. 하느님께서 금지령을 내리심으로써 자기 자신, 자기 입장을 잘못 파악하는 판단에서 인간을 보호하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금지령을 통해서 인간에게 경고도 하셨는 데 이 경고는 상대적인 자유를 더 이상 위축시키는 일이 없다. 선악의 나무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이 나무는 다른 신화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나무’이다. 따라서 성서의 범위 안에서 해석하여야 한다, 많은 교부들(금구, 다마스커스의 요한)의 해석에 따르면, 선악수(善惡樹)는 복종을 상징한다. 그리고 근대 성서 해석학자들에 의하면 선악수 열매는 지식을 뜻한다. 빌하우젠에 따르면 이 지식은 문명혜택과 전반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과연 하느님께서 그런 지식을 금할 수 있었을까? 죄의 결과를 보고 이 지식이 성(性)에 관한 지식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죄를 범하고 전에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는데 최후에는 자기 자신을 나체로 발견하면서 부부 관계가 어렵게 되었다고 해서, 인간이 결백한 상태에 놓여 있다가 성(性)을 알게 되었다는 가설은 성(性)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 성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못된다. 리지에(Ligie)신부에 의하면 이 지식은 미래에 관한 지식이다. 곧 첫 여인은 인류의 장래에 대한 비밀을 알고 싶었다고 한다. 고벤스(Coppens)에 의하면 선악수의 상징을 이렇게 풀이한다. 하느님이 금하시는 지식과 뱀이 제시하는 지식과 인간이 탐내는 지식의 공통된 점은 선과 악의 지식, 즉 선뿐만 아니라 선과 더불어 악까지 아는 지식이다. 사실 선과 악을 모르는 것이 복지에 들어가는 조건이 아니었던가?(신명 1, 39) 그러나 이제 선과 악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신명 29, 15-20:30, 15). 신명기에 따라 사람은 선과 악중에 어느 하나를 택하는 데, 선을 택할 경우는 살아 남고 악을 택할 때는 죽음을 당하는 것이다. 둘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하는데 아담은 둘 다를 택했다. 이사 7, 15에 따라 인간의 사명은 선과 악을 아는 것이 아니라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하는 것이다. 잠언11, 23에 따라 의인들은 선만을 원한다.(참조:잠언 16, 27;31, 12;지혜 19,22). 말하자면 인간은 선악의 조화를 시도할 수 없다. 선과 악을 혼동하는 지식은 죄인의 특징이다. 인간은 죄를 범할 때, 즉 선과 악을 골고루 알고 싶어할 때마다 선과 악의 구별을 무시한다. 선과 악의 구별을 넘어서 자기 자신을 높이려 한다. 인간이 선과 악을 인식하려는 것은 현대의 표현으로 인생의 절대 가치관을 수립하는 것이고, 중세기의 표현으로는 기초원리의 제정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선뿐만 아니라 악까지 체험하려는 것은 선과 악을 단정하려는 행동이다. 하느님께서는 악을 체험하신 일이 없고 오직 선만을 아시는 분이다. 따라서 이 금지령은 인간의 본성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신성까지 드러내는 원칙이다. 그러나 창세 3, 22에따라 하느님께서는 “이제 이 사람이 우리들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으니…” 하시며 추방령을 내리신다. 하느님께서는 순수한 선으로서 악을 체험하지 않으면서도 당신과 관계없는 것을 악으로 아신다. 그러나 인간은 경험 없이 악을 알 수 없다. 즉 하느님과 달리 죄를 저지르지 않고서는 악을 알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악과의 상봉이 없어도 당신 자신을 선으로 아시니까 당신 자신이 아닌 것을 악으로 아신다. 그러나 인간은 악과 타협해야만 악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의 차이는 선과 악을 아는 방법뿐 아니라 존재 자체가 다르다. 선이신 창조주만이 선과 악의 기준이 될 수 있지 선의 기준조차도 못되는 인간이 어떻게 악의 기준이 될 수 있을 까?{열매를 따먹는다는 표현은 곧 “행동한다, 실천한다”뜻이다.(참조:호세 10,13)}. 뱀은 첫 단계에서 하느님을 인식한 자로 소개하려 한다.(생명까지 허락하신 데도). 그 다음에는 당신과 관계없는 규칙을 세우는 자, 즉 인간의 자유를 괜히 구속하는 자로 소개하려 했다. 뱀이 인간의 책임을 가중시킨 셈이다. 즉 인간의 존재가 하느님께 달려 있는 데 인간이 이 관계를 인정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악용하였다. 인간이 유혹을 당하긴 했으나 죄는 스스로 범했다. 상대적인 자율성이 무한한 의욕을 변해 버렸다. 창세기의 작가들은 죄의 과정을 설명하기보다도 이해시키려 한 것뿐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왜 죄를 범했을까 하는 질문을 풀어 주지는 않는다. 인간이 경고를 받았고 뱀의 유혹을 물리칠 것 같았는데도 불구하고 왜 넘어갔을까? 뱀은 분명히 피조물일 뿐이지 인간을 능가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죄를 시작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작가들은 뱀이란 신비스러운 존재를 삭제하지 않았다. 탈신화(脫神話) 작업을 끝까지 못해서 그랬을까? 사실상 인간이 죄악을 시작하긴 했으나 결백한 사람도 그 앞에 죄악이 이미 와 있다는 것을 강조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뱀은 하느님의 말씀을 왜곡했고 또 거짓말도 했다. “죽기는커녕 선과 악에 대한 지식을 얻으리라” 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겉으로 볼 때 인간은 범죄 후 당장 죽지 않았고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 악에 대한 지식이 과연 이득인가? 사실 그 지식에 따르는 수치심, 즉 자기의 미약함을 알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알려주신 의존관계가 인간의 미약함을 뜻하지는 않았는 데(단지 인간의 상대성, 제한성 피조물의 형편) 죄악을 범하고 나서야 인간은 비로소 자기의 미약함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 다음에 창세 3, 8-13의 부분은 심문조사와 고발로 형성되어 있다. 결백함을 상실한 인간은 첫 반응으로 자기 자신을 숨기려 한다.(본능적 차원) 하느님께서 나서시자 인간은 비로소 자기의 잘못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고 책임을 질 단계가 아니다. 오히려 남지는 여자를 고발하고 여자는 뱀을 고발한다. 일치되었던 부부 사이에는 금이 가고 피조계에도 분열이 생긴다. 피조물간의 연대성이 파괴되어 이제부터는 죄의 연쇄성이 작용한다. 창세 3, 14-19에서는 하느님께서 벌을 내리시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죄로 말미암아 이미 깨진 연대성, 분열 상태를 확정하시는 것뿐이다. 인간은 자기가 사는 환경과의 관계가 어려워졌고 대인관계도 어려워진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좋게 만드신 피조계에 죄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엄밀히 말해서 인간은 타락하지 않았다. 즉 존재론적 타락이 아니다. 다만 대인관계가 어려웠을 뿐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맡겼던 책임을 취소하지 않았고 여자가 사는 이들의 어머니로서 나중에 야훼의 덕분에 아이까지 낳게 된다.(창세 4, 1) 그리고 20-24절에 나오는 추방령은 가해진 벌이라기 보다도 인간의 거부로 인하여 자초한 결과이다. 이제부터 거부가 결핍으로 변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내버려두시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제 위치를 지키지 않았고 하느님께 자기의 존재를 크게 훼손했다. 하느님의 배려 없이 인간은 오래 살지 못한다는 사실도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의 죄는 과분(ΰβρις)이다. 인간이 제 분수를 지키지 않았다는 주제가 성서에 자주 나온다.(이사 14, 12-15;에제 28, 11-19;다니 4장;지혜 13,7-9; 로마 1,2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