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부 : 죄론-(다)


창세기 3장에 실려 있는 교훈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죄는 이미 완성된 피조계에 역사적인 사건, 사고로 발생한다. 따라서 죄악이 필연적인 악이 아니라, 즉 당할 수밖에 없는 숙명이 아니라 죄를 설명하지는 못할 망정 죄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서 죄를 역사적인 사건으로 취급할 수 있게 되었다.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지만 죄는 유한성을 띠고 있다. 죄가 있기 전에 결백함이 있었고, 인간은 보다 나은 결백함으로 나아가도록 약속을 받았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를 정지시키지 않았고, 보다 못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지속시키신다. 그리고 선물과 사명도 취소하지 않았고, 오히려 보다 못한 조건을 극복할 수 있게끔 인간을 감싸주시고 약속으로써 새로운 역사를 계시하신다. 둘째로 죄는 불순명으로 이루어졌다. 겉으로 볼 때 인간의 불순명이 금지령의 위반으로 귀착하지만 원래 불순명은 신인관계와 대인관계의 파괴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개입으로 자기 잘못을 깨닫게 되었는데, 이는 하느님의 현존이 인간의 상태를 상기시켜 준다는 뜻이다. 인간이 하느님을 멀리했지 하느님께서 인간을 멀리하시지는 않았다.(이사 6, 3;루가 5, 8) 인간은 하느님과 관계없이 해야 할 것과 생각해야 할 것을 결정하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창조주의 역할을 하려고 했다. 사실상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참여했어야 했다. 인간은 창조도, 참여도 순수한 선물로 받아들여야 했는 데 하느님을 하느님이 아닌 것처럼 취급했기 때문에 창조를 거부하게 된 것이다. 노동, 성생활, 제도들, 즉 인간의 여건들은 죄의 결과가 아니고 다만 실천의 조건들이 악화되었을 분이다. 노동은 창조주께 드리는 응답인데 고달픈 시련으로 변하고, 성생활은 신묘한 상봉에서 억압으로 변했으며, 제한성 구속력으로 인정된다. 또한 죽음은 완성에로 가는 길로 인정되어 있었는 데, 이제 공포감과 허탈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죄의 원인을 피조물 가운데서 찾아야 한다. 성서는 악을 인간의 구성요소로 인정하지 않고 이원론을 단호히 배격하고 있다. 인간이 결백한 상태에서 죄스러운 상태로 넘어갔다는 사실은 인간의 책임을 말하는 데 인간이 혼자서 책임을 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를 범하기 전에 이미 다른 피조물의 탓으로(다른 인간의 탓으로) 죄악이 와 있었기 때문이다. 성서는 “죄를 믿는 것”보다 “죄의 사함”을 믿고 있다. 죄악의 발생은 보다 나은 상태의 뒷면이며 죄보다 약속과 희망이 더 강하다. 이런 의미에서 성서는 죄에 대하여 낙관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애초부터 하느님께서 죄인을 내버려두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이 어떤 미련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하여 보다 나은 상태로 나아가고 있다. 죄는 하느님 덕분에 역사의 정지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하느님의 약속을 받아 미래의 디딤돌이 된다. 죄의 탓으로 인간이 자기 자신을 깨닫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데 이는 악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여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닮으려고 하던 인간은 결국 하느님을 흉내냈을 뿐이다. 인간이 하느님과 거리를 두려고 했는 데 이 거리는 오히려 그릇된 자율성과 사람을 소외시키는 거짓말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거리는 용서 덕분에 참된 자율성, 즉 하느님과의 의존관계를 바탕으로 하여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유가 될 수 있다.

2.1.2. 죄와 계약
계약 개념이 창세기의 작성에 있어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약속, 하느님의 개입). 시나이 산에서 체결된 계약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다. 이는 쌍방 계약인 것이다. 제단과 백성 위에 부려진 피는 하느님과 자기 백성간에 통하는 생명을 상징한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하고 실행하셨기 때문에 생명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을 구제하셨다.(신명 2,8;창세 22, 16참조)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약속은 곧 생명의 약속이었다. 인간은 피조물로서 살아나려면 신인관계를 파괴하지 말아야 했다. 이제 더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이 한 백성으로 살아나려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이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계약은 생명의 약속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받았던 약속에 준거하여 체결된 계약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취했던 태도, 즉 신앙이 필요했다. 이 신앙은 하느님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로서 인간적인 보장이나 인간에 대한 신뢰감을 배제한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당신 스스로 하신 약속을 당신의 힘으로만 이룩하시기 때문이다. (창세 17,21. 21,22. 갈라 4,23. 히브11,18.). 법(토라= Torah)의 하사는 하느님에 관한 계시이다. 이 계시는 인간을 견고케 해준다. 인간은 신앙으로써 하느님 안에서 굳어질 수 있다. 황금 송아지 사건이 터지자 계약은 파괴되었다. 비록 모세의 호소가 있었지만은 그 후로부터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더욱 어려워졌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약속을 취소하시지 않았고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돌보아 주셨지만 이미 죄 속에 빠진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하여 하느님께서 더 구체적으로 개입하셔야 했다. 죄가 초래하던 결과(전쟁, 내분, 분열, 반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성공적으로 약속된 땅까지 인도해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죄의 결과인 전쟁, 내분등으로 이스라엘을 치료하셨고 지도하셨던 것이지 벌을 가하신 것은 아니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계약을 맺으신 것이 아니라 흩어져 있던 사람들을 한 백성으로 모으시고 그 백성과 계약을 체결하셨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 백성을 당신의 맏아들로 삼으셨다(출애 4,22). 하느님께서 자녀로 삼으신 백성은 이제 형제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하느님의 부성(父成)이 사람에게 있어서 서로간에 형제성을 수립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따라서 하느님께 해를 끼치는 일은 곧 인간에게도 해를 끼치는 행위가 되고 아울러 인간에게 해 끼치는 행위는 곧 하느님을 거스르는 행위가 된다. 하느님의 약속으로 이루어진 신인관계(新人關系)는 한 백성에로 확대되었고, 계약이란 제도는 법률에 준거해서 시행될 것이 아니라 약속에서 유래하는 의미로 지켜진다. 말하자면 법 그 자체를 중요시하기보다도 법을 하사하신 하느님과 법을 지키는 이스라엘간에 오가는 인격적인 관계가 더 중요하다. 죄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인간들에게 상처를 입혀 주고 하느님께서 베푸신 대외적인 사랑을 거스르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이 각 인간의 최고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죄는 하느님을 멸시하는 행위이며 곧 배은망덕한 짓이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누구보다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을 부합시켰다(예레 22,16. 레위 19,17-18. 1요한 4,20. 마태 25,34-40). 예언자들은 유일하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과 형제들에게 베푸신 사랑을 결부시켰다. 예언자들은 부유층의 호화생활, 노예의 거래, 거짓 증언, 사기 등을 고발함으로서 “하느님의 권리”를 되찾으려고 했다. 신명기의 시대에 개발된 간택 개념은 하느님의 가호와 보호를 이스라엘에게 국한시키려는 시도의 결과라기보다 오히려 하느님의 혜택을 만민에게 확대하려는 데서 나왔다. 왜냐하면 만민 가운데서 선택된 백성이 당연히 만남 가운데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화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선민 의식은 원래 배타주의와 부합하지 않았다. 간택은 배척을 내포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율법을 강조하면서 신인관계를 인격적인 관계라고 강조하기 위하여, 이 관계가 부부간에 오가는 애정(호세 2장)이나 모자(母子)간에 오고가는 사랑(이사 49,15)이라고 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베푸신 따뜻한 애정을 배경으로 하여 하느님의 진노란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죄는 하느님에 대한 증오이며 혐오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도 “죄인을 싫어하신다”(출애 20,5. 시편 15,14). 이는 어느 정도 과한 표현이지만 신인관계(新人關係)의 성격을 적절히 말해 주는 표현이다. 하느님께서는 또 시기하시는 하느님이시다(출애 14,14).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시기하시는 것이 아니라, 잡신에 대한 시기심이 많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즉 인간들이 하느님과 함께 잡신을 숭배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강력한 유일신 사상에서 유래하였다고 볼 수 있다.


2.1.3. 죄악의 표현
구약성서에는 죄란 말이 따로 없다고 할 수 있다. 성서의 작가들은 하느님과 형제들을 거스르는 행위를 표현하기 위하여 일상생활에 늘 사용되는 단어를 골라서 파괴된 신인관계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많은 단어들(40개 이상)중에서 세 가지만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하탓’이란 말이 자주 나오는 편인데 뜻은 “맞지 않다. 어긋나다. 놓치다”이다. 이 단어는 다양하게 쓰인다. 관계를 일방적으로 끊어 버릴 때(판관 11,27. 2사무 16,7), 관례에 어긋나는 짓을 저지를 때(창세 20,9. 29,26. 34,7), 그리고 평상시에도 쓰이며, 또한 하느님과의 관계를 언급할 때, 그런 의미로 사용된다. 예를 들면 하느님을 대할 때(민수 32,23. 신명 9,16. 20,18. 1사무 7,6)와 하느님과의 일치와 화목을 파괴할 때(신명 20,18. 판관 10,10.15), 그리고 이방인들의 잡신을 신봉할 때나 짐승을 우상숭배할 때도 쓰인다. 또한 하느님의 법을 위반할 때(출애 9,27.10.16. 창세 20,6)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하탓’이란 말은 죄를 뜻하는 경우 외에 “죄를 위한 제사”를 뜻하기도 한다(레위 4,32). 2고린 5,21에 따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다.”는 말은 옳게 이해하기 위하여 ‘하탓’이란 개념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많은 교부들과 교회의 전통에 따라 “죄가 되셨다.”는 말은 죄를 위한 제사가 되셨다고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그 다음에 ‘아원’이란 말은 “틀리다. 그릇되다. 부정(不正)하다”는 뜻이다(시편31,11. 57,7. 이사 65,7). 이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잘 쓰이는 단어인데 조상들한테서 이어받은 부정(출애 20,5. 34,7)및 죄인의 근본적인 상태까지 말하는 단어이다. ‘아원’은 죄뿐만 아니라 죄의 결과까지 뜻할 수도 있다.(창세 4,13. 이사 5,18). 그리고 ‘벳사’란 단어도 자주 쓰인다. 이 말은 “법을 위반하다”는 뜻과 “남의 권리를 참해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과분한 탓으로 가해자가 남에게 해를 끼칠 경우와 남을 반대하는 경우, 그리고 남을 모욕하는 경우에도 쓰인다(창세 31,36. 1사무 24,12. 1열왕 12,19). 한 개인의 행위에 제한된 단어가 아니라 집단 행위까지 포함하는 이 단어는 대항, 반란, 민란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하느님에 대한 반항을 표시하기에 적절한 단어로 널리 사용되었다(라틴어의 “Peccatum”이란 말은 히브리어의 ‘벳사’에서 파생되었다).
하느님을 거스리는 행위를 표현하는 단어에 못지않게 성서가 죄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하는 문제도 중요하다. 구약성서가 과연 죄의 경중을 의식했을까? 그리고 죄의 건수 및 죄인의 의도나 취지를 충분히 배려했을까? 곁으로 볼 때 구약시대 초기의 성서 작가들은 죄를 기계적으로 평가한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본능적인 차원과 신앙적인 차원이 구별되지 않는 경우가 많고 신앙이라 하더라도 아직 공포에 얽힌 신앙이기에 죄에 대한 의식이 뚜렷하지 않은 것 같다. 죄는 주로 제례의식을 규정하는 세칙을 위반하는 것으로 귀착한다는 인상을 금할 수 없다. 초기의 작가들은 죄인의 의도를 무시해 버린 채 행위 자체만 평가하는 것 같다. 초보단계에 놓여있는 그들에게 세련된 죄 개념에 정리를 요구할 수 없다. 그러나 성서에서 죄는 고의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시종일관 남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로 여겨졌다. 성서에따라 상대방을 의식하지 않고서는 죄를 인식할 수 없다는 원칙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성서에서는 인간의 의도보다 하느님의 뜻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즉 죄는 하느님이 원하시지 않는 행위나 상태이다. 인간의 책임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은 인간의 책임이 어떻든 간에 오직 하느님만이 인간을 죄에서 구제하신다는 신앙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지혜문학은 인간의 책임을 제대로 평가할 줄 알아야 한다. 차차 성숙해진 양심의 작용과 깊어가는 신앙덕분에 구약성서의 작가들이 올바른 죄의식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나긴 발전과정을 배려해서 첫 단계에서부터 완벽한 죄의식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므로 미숙한 표현을 발견할 때라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양심을 기르기 위하여 백성의 지도자와 예언자들이 일단 죄를 행위로 보고 죄의 건수까지 따졌다. 올바른 죄의식에 도달하기 위하여 계명을 길잡이로 써야 한다. 예컨대 모세가 명령과 금지령을 자주 내렸으며(출애 20,2-17. 신명 27,15-26. 5,6-18) 초기부터 계명편이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예언자들도 계명을 자주 상기시켜 주었다(호세 4,2. 예레 7,9. 아모 4,1-3). 사제계 문학가들도 역시 많은 계명편을 기록했다(시편 15. 에제 18,5-9(12항목으로 되어 있는 계명편) 33,25.26). 후기에 접어들어서 지혜문학가들도 계명을 상기시키기도 하고 피할 죄를 상세하게 서술하기도 했다(잠언 30,11-14. 욥 30장). 계명을 실생활의 길잡이로 이해할 경우 자기 생활을 분석할 수 있고 평가할 수 있다. 생활 전체, 즉 기본태도와 최후 목적을 막연하게 생각하기 보다 계명이 있기때문에 행위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이는 양심의 양성에 있어서 필수적인 기초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계명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계명을 내리신 하느님을 망각할 수 있고 율법과 계명의 취지를 잊어버릴 수 있다. 나아가 법률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스라엘은 그런 폐단을 피할 줄 몰랐으며, 세칙을 수 없이 증가시켜서 계명을 길잡이라기 보다 무거운 짐으로 변화시켰다. 사실 금지령이 많아지면 죄의식이 세련되기보다 오히려 죄의식에 지장이 되는 죄악감이 더 강해진다. 본능 차원에서 법은 금지령으로 이해되고 죄악감이 생긴다고 했듯이, 금지령이 많아질 때 죄악감이 죄의식을 앞지르는 경우가 많다. 이 금지령들이 하느님의 뜻으로 이해될 때, 신뢰감보다 공포가 앞설 수 있다(1열왕 8,39-40. 차세 22,12. 시편 130,4). 따라서 이 금지령을 무의식 중에 위배할 때(1사무 14,24-46), 사람이 난처한 입장에 빠진 일을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이 외에도 성서는 “모르는 죄”를 언급하고 있다(욥 1,5. 레위 4,2.27. 시편 19,13. 90,8). 이스라엘의 사고방식대로 인간의 의도보다 하느님의 입장을 생각해서 객관적인 행위만을 고려한 나머지 자기 잘못을 인정하기 어려워지기에 용서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그러나 성서의 작가들은 그런 폐단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소위 규율주의와 예언자 정신을 대립을 시키지 말아야 한다. 이미 본대로 예언자들이 계명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사제계 출신 작가들이 예언자 못지 않게 법의 정신을 상기시켜 주었다. 따라서 예언자뿐만 아니라 성서의 모든 작가들이 죄인의 마음 자세를 따졌다. 사실상 이스라엘이 계약의 원인인 약속, 그리고 요구되는 기본 자세인 신앙을 다소 잊을 때가 있었지만 법을 엄수하는 것은 어떤 계약의 이행으로 보지않고 하느님께서 베푸신 구원에 대한 순수한 응답으로 보고있다. 법의 업무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경과라고 생각하던 이스라엘인들은 사은(謝恩)하는 마음을 취했다. 계명을 낭독하기 전에 지도자들은 항상 이미 받은 은혜를 상기시켜 주었다(신명 6,10-19. 시편 81,11). 예언자들도 감사하는 마음, 하느님께 의뢰하는 마음을 북돋아 주었다. 신인관계를 인격적인 차원에로 이끌어 주는 그들은 하느님과 더 친밀한 관계를 당부했다. 그러므로 죄는 우정의 관계, 사랑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대신 행위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법보다 하느님이 이상적인 상대방이시고 완벽하신 규범으로 인식되었다(출애 34,6. 참조 마태 5,48. 하느님이 완전하시듯이 너희도 —). 이제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의인이 아닌 위선자는 금지령을 수행했다해서 자신이 의인이 된 줄 알지만 이는 예언자들의 호소를 곡해하여 자기 결백함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한 것 뿐이다. 그러나 구약성서에서의 의(義)가 있다면 하느님이 베푸신 의(義)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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