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성사-성서적 근거

 

2. 성서적 근거




2.1. 질병


질병이란 인간의 출생, 성장, 노쇠 그리고 죽음과 같이 인간의 원초적 체험에 속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질병을 단지 순수 의학적 문제가 아니라 포괄적인 위협으로 간주한다. 왜냐하면 질병은 대부분의 경우에 병자의 육신적 활동능력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그의 정신능력도 마비시켜서 인간 실존 전체를 부자유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질병은 환자 당사자만이 아니라 집안식구들과 친지들에게 걱정과 근심을 안겨준다.


구약시대에는 이렇게 인간 실존 전체에 위협을 주는 질병은 개개인의 잘못(시편 1편; 37편)이나 혹은 그 조상들의 잘못(민수 14,18)으로 빚어지는 벌이요 징계라는 해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질병은 죄, 관계의 파괴, 하느님의 분노, 하느님과 멀어짐과 밀접히 연관되어서 설명되었던 것이다. 이런 설명은 병자에게 육체적, 심리적 고통외에서 사회적, 종교적 고통을 더하여 준다. 그러나 이미 구약성서에서 안에서 이런 설명은 의문에 처해졌다. 그 좋은 예가 무고하게 고통을 당하는 욥의 이야기가 담긴 욥서이다(욥 42,7-9). 신약성서에서 예수는 명시적으로 모든 질병이 여하간 어떤 죄악의 벌이라는 당시의 해석을 거부하였다(루가 13,1-5; 요한 9,1-3).1)


하지만 불행은 그를 당하는 이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다는 확신이 아직도 남아 있었고 이는 중병에서 강하게 체험되었다. “병”은 인간이 당하는 갖가지 역경, 즉 박해, 실패, 실망 그리고 뒤틀린 마음 등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 될 수 있다. 이는 육체적인 질병이 전통적으로 이런 경험들의 집합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에 관련된 시편에서는 육체적인 고통에 대한 호소가 고독, 배반, 적대감에 대한 호소와 함께, 자신의 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부재(不在)에 대한 호소, 하느님께 대한 부르짖음이 뒤섞여 있다. “왜 당신의 얼굴을 제게서 숨기시나이까?” ― “주여, 나를 버려두기 마시고 내게서 멀리하지 마소서!”(시편 88,15; 38,22; 시편 41과 예레 38,9-20도 아울러 참조).




2.2. 치유


질병을 하느님의 부재와 연결시켜서 해석하는 것에 상응해서 치유는 하느님의 호의적인 돌보심에서 이루어진다는 확신이 자리한다. 이런 하느님의 돌보심은 단지 신기한 치유에서만이 아니라 의사를 통한 치유에서도 드러난다.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해서 하느님은 사렙다에서 젊은 이를 살리시고, 엘리샤를 통해서 나아만은 문둥병이 낫는다 (1열왕 17,17-24; 2열왕 5). 의사가 지닌 지혜는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고 약품과 약초를 혼합해서 조제된 약으로 고통을 줄이는데, 이는 “주님의 사업이 그치지 않고 그분의 도움이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이다”(집회 38,8; 38,1-15도 참조).


“질병”과 마찬가지로 “치유”도 포괄적인 은유가 될 수 있다: 야훼는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고 그 터진 곳을 치료해 주신다“(이사 30,26). 그는 당신의 자녀들의 배신의 병에서 치유해주신다(이사 57,18; 예레 3,22). 그의 가르침은 치료약과 같다: “나는 야훼, 너를 치료하는 의사이다”(출애 15,26).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행한 수많은 병자 치유는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 나라에 대한 표징인 동시에 실현을 의미한다(특히 마태 11,5; 루가 11,20; 마태 9,35과 10,7 이하를 참조. 여기에서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와 병자의 치유가 거의 정형화되어서 한 몫으로 언급된다). 병자들을 돌보는 것은 신약의 공동체의 우선적 과제에 속하였고(1고린 12,9; 야고 5,14 이하; 마태 26,36.43 참조), 치유의 은사는 초기 교회 공동체에 왕성하던 여러 성령의 은사중에 반드시 속하여 있었으며, 치유받은 사람과 목격자는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이 새롭게 가까이 오심을 육신적으로 체험하였다(1고린 12,9; 사도 5,15 이하; 19,11 이하; 28,8 3이하 참조). 또한 질병과 의사의 비유가 다시 나타난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마르 2,17 병행). 바로 이 “의사”가 육신적으로 병든 이들을 치유하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날수록 이런 비유의 말씀은 죄에 빠진 이들을 해방시키는 만남에 대한 은유로서 더욱 명확하게 작용한다.




2.3. 표징행동


신약성서에 나타난 치유사화에서는 자주 예수께서 병자들의 몸에 손을 대신다는 것에 대해서 언급한다.


예수께서는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고(마르 1,31), 문둥병자에게 자신의 손을 갖다 대시며(마르 1,41), 허리가 굽은 여인에게 손을 얹어 주신다(루가 13,13). 귀먹은 반벙어리의 치유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예수께서 일련의 행동을 하셨다는 것이 드러난다. 즉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따로 불러내어 손가락을 그의 귀 속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신다(마르 7,32-35). 사람들이 데려와서 손을 대어 고쳐 주시기를 청하는 소경을 치유하실 때에도 예수께서는 비슷하게 행동하신다(마르 8,22-25; 요한 9,6).


이렇게 하느님의 돌보심과 도움, 가까이 다가온 하느님 나라는 육신으로 느낄 수 있게 체험된다. 손을 대는 것은 단지 치유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치유 자체인 동시에 하느님이 가까이 오심으로써 치유를 하시는 것에 대한 표징 행동, 실재상징이라고 하겠다.




2.4. 병자도유


신약성서에 두 대목이 병자 도유에 대해서 언급한다. 마르꼬는 열두 제자가 예수께로부터 파견된 후에 무엇을 하였는지를 요약해서 전한다. 그들은 “떠나가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또한 많은 귀신들을 많이 쫒아내고 많은 환자들에게 기름을 발라 고쳐 주었다”(마르 6,12 이하). 파견되어서 설교하는 것과 치유가 밀접하게 연계된다는 것이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치유가 도유와 연결되어 있다. 고대에서 기름은 보편적인 치료약과 상처 치유약으로 간주되었는데, 고통을 덜기 위해서, 신체를 강하게 하기 위해서 사용된다(이사 1,6; 루가 10,34 참조). 복음사가가 어떤 의도에서 여기에서 도유에 대해 언급하지는 성서학적으로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는다. 분명한 것은 이를 통해서 치유행동을 명료하게 표현하고, 열두 제자가 선포한 구원이 육신적인 차원까지도 포함하는 전체적인 것이라는 것, 그리고 동시에 예수의 표징행동과 제자들의 전교행동의 연관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명시적으로 도유를 언급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라 야고보서에서 말하고 있는 실천과 연관을 지으려는 것은 아닌가하는 점을 배제할 수는 없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앓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장로들을 부르시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고 그들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병자를 구할 것이며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다면 용서받을 것입니다”(야고 5,14-15). 이 텍스트는 분명히 전례적인 성격을 지닌다. 원로들(유다인의 모범을 따라서 이룩된 공동체 지도)이 와서 “환자에게”(안수?) 기도하도록 불리운다. 여기서 도유는 기도와 함께 이루어지는 (기도를 구체화하고 환자가 느끼도록 하는) 행동이다.


기도와 도유는 어떤 효과를 갖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구하다”와 “일으키다”는 동사의 해석에 달려있다. “구하다”(σώζειν) 야고보서의 일반적인 사용법에 따라서(1,21; 2,14; 4,12; 5,20) 종말론적 의를 지닐 수도 있다. 그러나 직접적인 맥락에서는 당면한 질병을 극복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는 해석에 가깝다. 이와 비슷하게 “일으키다”(έγείςειν)는 말도 여러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 신약성서에서는 자주 죽은 이들의 부활에(1고린 15,4 등등), 잠에서 깨어나는 것에(예를 들어서 마태 1,24), 이와 유사하게 종말론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 곳에, 그리고 적지 않게는 병에서 일어나는 것(예를 들어서 마르 1,31; 9,27; 사도 3,7)에 이 단어가 사용된다. 두 단어가 다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어느 한 의미만을 선택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두 단어가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병의 체험과 희망이 여러 차원을 지니고 있음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앞에서 언급한 성서적 질병 이해에 바탕을 두고 생각한다면 이런 해석에 근접한다. 병중에서 환자는 자신이 근본적으로 위협을 당하고 있으며 내쳐져 있다는 체험을 하게된다. 공동체의 기도는 환자를 이런 위협에서 “구하고” “일으켜야” 한다. 즉 기도는 삶을 파괴하려고 위협하는 세력을 대하고 있는 환자에게 힘을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기도는 일차적으로 사람을 (신체적으로) 약하게 하는 질병의 치유를 목표로 하고 더 깊게는 병을 통해서 느끼게 되는 근본적인 위협을 이겨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환자를 구하고 일으키는 분은 “주님”이시다(야고 5,15). 그러나 환자는 이렇게 구하고 일으키는 주님이 가까이 하신다는 것을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의 말과 표징 행동을 통해서 체험한다. 이렇게 해서 나중에 성사 개념에서 발견하게 되는 연계 사항이 암시된다.


현재 토론되고 있는 것들 중에서 두 가지 점이 중요하다고 본다. 하나는 병자도유의 상황에 관한 것이다. 분명히 병자는 장로들에게 살 수 없을 만큼 매우 약해져있지만, 죽음의 위협에 처해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죄의 사함은 단지 조건적으로 따라온다고 언급된다. “그가 죄를 지었다면”. 그러므로 죄의 사함은 병사도유의 본 목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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