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성사-교의사적 전개(교회적 참회 실천의 특별한 형태)

 

3.3.    교회적 참회 실천의 특별한 형태


역사적인 중요성 때문에 교회적 참회에서 두가지 특별한 형태가 언급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종교개혁 시대에 논쟁의 대상이 된 대사(大赦)와 평신도에 의한 고백성사가 그것이다.




3.3.1.  대사


에이레-스코틀란트 선교사들로부터 개별 참회를 받아 들이면서 보속의 부과에 통일성을 얻기 위해서 개개의 잘못에 상응한 ‘보속 정가표(定價表)’, 말하자면 상점에서 각 물건에 정가를 붙여 놓듯이 죄의 종류에 따라 보속의 종류를 정해 놓은 표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개인의 고유한 상황에 더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서 이 ‘정가표’를 변형하게 되었다: 보속을 변형, 예를 들어서 참회를 더 강력하게 하는 대신 참회 기간을 줄인다거나, 다른 보속으로, 예를 들어서 돈을 희사하는 것으로 바꾸고, 다른 사람을 내세워서 보속을 대신하기도 했다. 이렇게 보속을 변형하고, 다른 보속으로 바꾸고, 대신 보속을 하는 데에서 11세기경에 대사 교리가 형성되었다. 즉 기도, 보속행위, 혹은 금전적 희사를 함으로써 죄의 결과인 벌에 대한 면제가 교회 공식적으로 허락되었다.


대사에 대한 신학적 근거 설장과 해석에는 무엇보다도 세가지 생각이 작용하였다: (1) 고대 교회에서와는 달리 중세에는 죄에 대한 속박(reatus culpae)과 죄의 결과인 벌에 대한 속박(reatus poenae)을 논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분리하였다. 이런 실제적인 분리는 파문 형식의 참회에서 사죄 형식의 참회로 변화하는 데에서 이루어졌다: 파문적 참회에서는 죄의 결과가 보속을 통해서 “상쇄(相殺)된” 다음에 죄가 용서되었다. 사죄 형식의 참회에서는 죄가 용서된 다음에도 죄에 대한 벌을 보속해야만 한다. (2) 중세 초기 이래로 죽은 다음의 정화(淨化)와 교회적 보속과 연결 짓게 되었다: 이승에서 다 하지 못한 보속은 연옥에서 끝마쳐야 한다는 것이다. (3) 성인들의 순교, 특히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은 전체 교회에 이익이 된다는 고대 교회의 믿음은 14세기에 “교회의 은총의 보고(寶庫)”(thesaurus ecclesiae)라는 가르침으로 발전된다. 그리고 이 보화는 열쇠 권한을 가진 이에게 “신자들의 이익을 위해서 나누어 주도록” 맡겨져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Clemens VI. [1342-1352]: DS 1026).


대사에 대한 가르침은 중세 말기에 은총과 용서를 상당히 물질적이고 법적으로 상상하도록 이끌었고, 신자들의 두려움과 신앙심을 이용하여 거래하는 폐단을 낳았으며, 영신적인 영역에 대한 교황의 권한을 과도하게 강화하는 것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대사에 대한 가르침은 발도파와 위클리프(John Wyclif, +1384), 후스(Jan Hus, +1415)의 비판을 받게되었고, 16세기에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거부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대사를 부여에 관한 교회의 권한을 변호하였는데, 그러나 이를 부여하는 데에 기준을 지킬 것을 경고하고, 잘못된 관행을 폐지하고 탐욕을 배제하라고 요구하였다 (DS 1835).


현대 신학에서 칼 라너는 대사를 법적인 관점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정향된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즉 열쇠 권한이 아니라 교회의 기도의 능력에서 출발하여 해석하도록 촉구하였다. 여기에서 라너의 “죄에 대한 벌”의 이해는 인격적인 관점을 전제로 한다. 즉 죄에 대한 벌은 밖에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죄가 결과로 낳은 중독과 고통을 의미하는데, 이는 죄인이 회개하고 죄의 용서를 받은 후에도 극복되지 않은채로 남아 있게 된다. 이러한 죄의 결과를 소멸하기 위한 힘겨운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기도는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교회는 특별하고 분명한 행동을 통해서 죄인에게 죄의 벌을 감면하는 것과 관련되는 대도(代禱)의 기도를 확약할 수 있다. […] 바로 이것이 우리가 대사라고 일컫는 것 안에서 이루어진다”.1)




3.3.3.  평신도에 의한 고백성사


동방교회에서는 법률적으로 생각하던 서방 교회와는 달리 참회에 대해서 치유적인 이해가 발전되었다. 참회자의 고백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적 지도자의 기능을 지니게 되었고, 그는 기도, 대화 그리고 훈계를 하는 동시에 함께 참회를 하면서 죄인이 교회에 다시 받아들여지는 것을 도왔다. 그래서 영적 지도자에게서 교회 직무를 통한 공적인 자격보다는 개인적인 완성도, 성덕, 성령의 충만함을 더 중요시하였다. 그 결과로 800년경 이래로 사제는 아니지만 큰 존경을 받는 수도자들이 고백사제가 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졌다. 비로소 13세기 이후에 동방 교회에서는 “영적인 사람”과 교회 직무자를 연결해서 생각하는 것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서방교회에서 평신도에 의한 고백성사는 보충적 역할의 성격으로 형성되었다: 사제를 만나지 못하는 경우에 자신의 죄를 다른 신자에게 고백할 수 있는데, 이는 이런 방식으로도 하느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확신에서 이루어진다. 11세기에서 13세기까지 평신도 고백성사는 (비상시에) 의무적이었다.


이러한 실천이 권장된 배경에는 죄의 사함에 있어서 개인적인 고백이 인간 측에서 요구되는 결정적인 요소라는 중세 초기의 확신이 있었다. 이런 확신은 그 당시에 많이 인용되던 假 아우구스티노서 “De vera et falsa paenitentia”에서 잘 드러난다: “사제가 없을 때에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고백성사를 보아야 할 정도로 고백의 힘은 크다”.2) 이런 맥락에서 야고 5,16도 자주 인용되었다: “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치유를 받게하시오”. 중기 스콜라 신학에서는 평신도 고백성사가 유익하다는 점은 인정하였으나 성사성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성사성을 단호하게 부정하였지만, 비상시에는 평신도 고백이 의무가 된다고 못박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평신도 고백 성사가 “완전한 성사는 아니라 해도 어떤 의미에서 성사적”이라고 하였다; 완전한 성사에는 참회자의 행동과 사제의 행동(사죄경과 보속의 부과)가 포함된다. 그러나 비상시에 참회자는 “자기편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해야한다: 회개하고, 고백할 수 있는 대상에게 죄 고백을 해야한다”. 평신도가 죄를 사할 수는 없다해도 “대사제”(그리스도)께서 이런 결핍을 채워주신다.3) 그러나 회개와 고백은 고해성사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고 단지 전제 조건일뿐이라고 주장한 둔스 스코투스 이래로 평신도 고백성사를 신학적으로 높게 평가하거나 실천하는 것은 퇴조되었다.




이 글은 카테고리: 신학자료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고해성사-교의사적 전개(교회적 참회 실천의 특별한 형태)에 1개의 응답

  1. guest 님의 말:

     

    3.3.    교회적 참회 실천의 특별한 형태

    역사적인 중요성 때문에 교회적 참회에서 두가지 특별한 형태가 언급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종교개혁 시대에 논쟁의 대상이 된 대사(大赦)와 평신도에 의한 고백성사가 그것이다.


    3.3.1.  대사

    에이레-스코틀란트 선교사들로부터 개별 참회를 받아 들이면서 보속의 부과에 통일성을 얻기 위해서 개개의 잘못에 상응한 ‘보속 정가표(定價表)’, 말하자면 상점에서 각 물건에 정가를 붙여 놓듯이 죄의 종류에 따라 보속의 종류를 정해 놓은 표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개인의 고유한 상황에 더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서 이 ‘정가표’를 변형하게 되었다: 보속을 변형, 예를 들어서 참회를 더 강력하게 하는 대신 참회 기간을 줄인다거나, 다른 보속으로, 예를 들어서 돈을 희사하는 것으로 바꾸고, 다른 사람을 내세워서 보속을 대신하기도 했다. 이렇게 보속을 변형하고, 다른 보속으로 바꾸고, 대신 보속을 하는 데에서 11세기경에 대사 교리가 형성되었다. 즉 기도, 보속행위, 혹은 금전적 희사를 함으로써 죄의 결과인 벌에 대한 면제가 교회 공식적으로 허락되었다.

    대사에 대한 신학적 근거 설장과 해석에는 무엇보다도 세가지 생각이 작용하였다: (1) 고대 교회에서와는 달리 중세에는 죄에 대한 속박(reatus culpae)과 죄의 결과인 벌에 대한 속박(reatus poenae)을 논리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분리하였다. 이런 실제적인 분리는 파문 형식의 참회에서 사죄 형식의 참회로 변화하는 데에서 이루어졌다: 파문적 참회에서는 죄의 결과가 보속을 통해서 “상쇄(相殺)된” 다음에 죄가 용서되었다. 사죄 형식의 참회에서는 죄가 용서된 다음에도 죄에 대한 벌을 보속해야만 한다. (2) 중세 초기 이래로 죽은 다음의 정화(淨化)와 교회적 보속과 연결 짓게 되었다: 이승에서 다 하지 못한 보속은 연옥에서 끝마쳐야 한다는 것이다. (3) 성인들의 순교, 특히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은 전체 교회에 이익이 된다는 고대 교회의 믿음은 14세기에 “교회의 은총의 보고(寶庫)”(thesaurus ecclesiae)라는 가르침으로 발전된다. 그리고 이 보화는 열쇠 권한을 가진 이에게 “신자들의 이익을 위해서 나누어 주도록” 맡겨져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Clemens VI. [1342-1352]: DS 1026).

    대사에 대한 가르침은 중세 말기에 은총과 용서를 상당히 물질적이고 법적으로 상상하도록 이끌었고, 신자들의 두려움과 신앙심을 이용하여 거래하는 폐단을 낳았으며, 영신적인 영역에 대한 교황의 권한을 과도하게 강화하는 것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대사에 대한 가르침은 발도파와 위클리프(John Wyclif, +1384), 후스(Jan Hus, +1415)의 비판을 받게되었고, 16세기에 종교개혁자들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거부되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대사를 부여에 관한 교회의 권한을 변호하였는데, 그러나 이를 부여하는 데에 기준을 지킬 것을 경고하고, 잘못된 관행을 폐지하고 탐욕을 배제하라고 요구하였다 (DS 1835).

    현대 신학에서 칼 라너는 대사를 법적인 관점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정향된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즉 열쇠 권한이 아니라 교회의 기도의 능력에서 출발하여 해석하도록 촉구하였다. 여기에서 라너의 “죄에 대한 벌”의 이해는 인격적인 관점을 전제로 한다. 즉 죄에 대한 벌은 밖에서 부과되는 것이 아니라, 죄가 결과로 낳은 중독과 고통을 의미하는데, 이는 죄인이 회개하고 죄의 용서를 받은 후에도 극복되지 않은채로 남아 있게 된다. 이러한 죄의 결과를 소멸하기 위한 힘겨운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기도는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교회는 특별하고 분명한 행동을 통해서 죄인에게 죄의 벌을 감면하는 것과 관련되는 대도(代禱)의 기도를 확약할 수 있다. […] 바로 이것이 우리가 대사라고 일컫는 것 안에서 이루어진다”.1)


    3.3.3.  평신도에 의한 고백성사

    동방교회에서는 법률적으로 생각하던 서방 교회와는 달리 참회에 대해서 치유적인 이해가 발전되었다. 참회자의 고백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영적 지도자의 기능을 지니게 되었고, 그는 기도, 대화 그리고 훈계를 하는 동시에 함께 참회를 하면서 죄인이 교회에 다시 받아들여지는 것을 도왔다. 그래서 영적 지도자에게서 교회 직무를 통한 공적인 자격보다는 개인적인 완성도, 성덕, 성령의 충만함을 더 중요시하였다. 그 결과로 800년경 이래로 사제는 아니지만 큰 존경을 받는 수도자들이 고백사제가 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졌다. 비로소 13세기 이후에 동방 교회에서는 “영적인 사람”과 교회 직무자를 연결해서 생각하는 것이 강하게 대두되었다.

    서방교회에서 평신도에 의한 고백성사는 보충적 역할의 성격으로 형성되었다: 사제를 만나지 못하는 경우에 자신의 죄를 다른 신자에게 고백할 수 있는데, 이는 이런 방식으로도 하느님께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확신에서 이루어진다. 11세기에서 13세기까지 평신도 고백성사는 (비상시에) 의무적이었다.

    이러한 실천이 권장된 배경에는 죄의 사함에 있어서 개인적인 고백이 인간 측에서 요구되는 결정적인 요소라는 중세 초기의 확신이 있었다. 이런 확신은 그 당시에 많이 인용되던 假 아우구스티노서 “De vera et falsa paenitentia”에서 잘 드러난다: “사제가 없을 때에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고백성사를 보아야 할 정도로 고백의 힘은 크다”.2) 이런 맥락에서 야고 5,16도 자주 인용되었다: “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치유를 받게하시오”. 중기 스콜라 신학에서는 평신도 고백성사가 유익하다는 점은 인정하였으나 성사성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성사성을 단호하게 부정하였지만, 비상시에는 평신도 고백이 의무가 된다고 못박았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평신도 고백 성사가 “완전한 성사는 아니라 해도 어떤 의미에서 성사적”이라고 하였다; 완전한 성사에는 참회자의 행동과 사제의 행동(사죄경과 보속의 부과)가 포함된다. 그러나 비상시에 참회자는 “자기편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해야한다: 회개하고, 고백할 수 있는 대상에게 죄 고백을 해야한다”. 평신도가 죄를 사할 수는 없다해도 “대사제”(그리스도)께서 이런 결핍을 채워주신다.3) 그러나 회개와 고백은 고해성사의 본질적인 부분이 아니고 단지 전제 조건일뿐이라고 주장한 둔스 스코투스 이래로 평신도 고백성사를 신학적으로 높게 평가하거나 실천하는 것은 퇴조되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