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 [한] 會堂 [라] Synagoga [영] Synagogue

그리스어로 시나고가(synagoga)는 ‘집회’(集會)또는 ‘집회하는 곳’을 의미하며, ‘유태인이 기도하는 곳’을 가리키는 말이다. 탈무드에서는 ‘집회를 여는 집’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신약성서에서 회당이란 말은 가르침을 베풀기 위한 유태인의 집회(마태 4:23, 마르 1:21, 루가 4:15, 요한 6:60)나 종교적 집회를 행하는 건물(마태 10:17, 루가 7:5, 사도 22:19)을 가리켰다. 그 밖에도 광의로 기도하는 장소를 가리키기도 하였다. 즉 해변, 강가, 옥외 등에서 기도하면서 여기도 역시 회당이라는 의미에 포함된다(사도 16:13 · 16). 회당은 ① 족장시대에 이미 있었다는 설(說), ② 모세시대 설(신명 31:11 · 12에 의거하여), ③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에 정착하던 때부터 있었다는 설, ④ 솔로몬왕이 신전을 건축한 이후부터라는 설(시편 74:8에 입각하여), ⑤ 바빌론 유폐에 의해 이스라엘인이 신전예배를 할 수 없게 된 이후 도시의 교회, 강가, 집 등에 모여 율법서를 읽으면서 함께 기도하다가 예루살렘에 귀국한 뒤에도 이 같은 집회를 계속한 것이 그 기원이라는 설이 있지만 ③이 가장 유력하다. 그리스도와 사도시대에는 팔레스티나 곳곳에 회당이 세워지고, 이밖에도 바빌론, 시리아, 소아시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이탈리아, 아프리카 등지에도 세워졌다. 회당은 장방형(長方形)으로 장축(長軸)은 예루살렘쪽을 향하도록 하고, 그 끝에 모세의 율법을 넣어두는 상자가 놓여졌다. 그 앞에는 ‘영원의 빛’(Ner Tamid)이 빛나며, 전면의 중앙에는 바닥보다 좀 높은 제단이 있고, 그 위의 책상에는 율법서와 예언서가 놓여 있다. 입구에는 물그릇이 놓여 있으며 들어오는 사람들이 손을 씻었다. 원래 회당은 성전의 보조건물이었지만 후대에는 성전 대용으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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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 [한] 悔改 [라] conversio [영] conversion

죄스런 생활태도에서 탈피하여 하느님께 귀의하는 일. 하느님은 당신과 친교를 맺도록 인간을 부르시나 인간은 원죄(原罪)와 본죄(本罪)로 인하여 죄인이므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하고 일생 동안 회개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는 성서 계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회개의 개념은 죄의 관념이 발전함에 따라 확립되어 왔는데, 구약성서에서는 ‘길을 바꾸다’, ‘돌아오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동사(sub)를 사용하여 악을 피하고 하느님께 향하는 행위, 즉 생활방식을 바꾸어 생활전체에 새로운 방향을 설정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회개를 의미하였다. 후기에 와서 참회의 내적인 면과 외적인 행위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생겼는데 특히 신약성서에서는 하느님께 귀의하여 실제 생활을 개선하는 것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동사 에피스트레포(epistrepho)와 내적 방향전환을 나타내는 메타노에오(metanoeo)를 나란히 사용한다.

회개에 대한 예언자들의 가르침은 나탄이 다윗왕을 책망하는 훈계 속에 처음으로 나타나며, 기원전 8세기부터 예언자들은 전 국민에게 회개의 권유를 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권유는 예언자들의 기본사명 중 하나가 되었다(예레 25:3-6). 회개에 대한 구약시대 예언자들의 갖가지 가르침은 최후의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의 설교 중에 다시 나타난다. “하늘나라가 다가 왔으니 회개하라”(마태 3:2)고 외친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표지로서 물의 세례를 주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해야 하고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야 하는 것이다(마태 3:8). 예수님은 선교활동의 서두에서 세례자 요한의 호소를 자신의 말씀으로 되풀이 하셨다(마르 1:15, 마태 4:17). 그 호소는 지상사물의 집착에서 비롯하여(마르 10:21-25)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오만(루가 18:9)에 이르기까지 온갖 인간적 자만심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므로, 하느님을 배척하는 악한 세대를 반대하여 ‘요나의 표지’를 보일 것을 예언하신다(루가 11:29-32).

회개는 자신의 전 생명을 하느님께 내맡기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근본적 결단이요 엄숙한 선택행위이다. 이러한 방향전환은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듯이(루가 15:4-) 항상 섭리하는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나타난다. 이 응답으로 인간은 죄스런 처지와 협소한 한계를 뛰어넘어 용서를 받고 자유를 누린다. 회개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시작되며, 베드로가 마술사 시몬에게 다시 회개하기를 요청했듯이(사도 8:22) 일상생활 가운데 되풀이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서는 회개를 덕행(德行)으로 삼고 있다. 인간은 이 덕행을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의 심판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사도 17:30-). 하느님은 “참고 기다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가능하다면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고”(2베드 3:9)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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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필수 [한] 黃泌秀

황필수(?∼?). 조선시대 후기의 한의(韓醫). 척사론자(斥邪論者). 호는 혜암(惠庵). 본관은 창원(昌原). 도정(都正)을 지낸 황도순(黃道淳)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학(儒學)과 의술을 공부, 명의로 이름이 높았고 고종(高宗) 때 군수를 지냈다. ≪방약합편≫(方藥合編), ≪신식유서필지≫(新式儒胥必知), ≪달도집주대전≫(達道集註大全) 등의 저서를 남겼고, 이외에 자신의 척사론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척사설≫(斥邪說)을 남겼는데 ≪척사설≫에서의 천주교 비판은 학문적 합리적인 면보다는 천주교를 포함한 서양에 대한 배척적 증오와 고루한 유교이념의 수호라는 편협성과 고착성이 더 짙게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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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본당 [한] 黃州本堂

소재지는 황해도 황주군 구락면 인훈리 원동(黃海道 黃州郡 龜洛面 仁訓里 院洞). 황주땅은 일찍부터 복음의 씨가 뿌려진 고장으로, 1866년 병인(丙寅)박해 때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바 있었다. 병인박해로 전멸된 황주지방의 신자촌들은 1890년대 초까지도 회복되지 못하고 있었다. 1898년 황주군에 첫 공소가 설정되었다. 공소 소재지는 삼전면 철도리(三田面 鐵島里)였으며, 소속 본당은 신천군(信川郡)의 청계동(淸溪洞)본당이고, 주임신부는 빌렘(Wilhelm, 洪錫九, 요셉) 신부였다. 당시 이 공소에는 54명의 예비신자가 있었다. 1899년 황주지방은 안악군(安岳郡)의 매화동(玫花洞)본당의 우도(Oudot, 吳保祿) 신부의 관할로 넘어갔으며, 이해에 황주읍에 공소가 설립되었다.

1902년 황주 지방은 매화동본당에서 분립, 본당으로 승격, 동년 5월 서울의 용산(龍山) 신학교 교수이던 한기근(韓基根, 바오로) 신부가 초대 본당주임으로 부임, 황주읍 남문(南門) 밖 외남부마을에 30간짜리 한옥성당이 창설되었다. 창설 당시 황주본당의 관할지역은 황주군 전역과 봉산군(鳳山郡), 서흥군(瑞興郡) 일부였고, 창설 이듬해에는 관할 공소는 33개(황주군 28, 봉산군 4, 서흥군 1)에 달했으며, 총 교세는 1,246명 이었다. 그러나 1904년 2월, 한기근 신부는 전교의 희망이 없는 황주읍을 작별하고 황주읍에서 서쪽으로 30리 떨어진 적은동(三田面 外松里 積銀洞)의 김촌(金村)으로 본당을 옮겼다. 1907년에는 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순회전교여행 길에 적은동본당을 방문하고 견진성사를 집전하였다.

한기근 신부는 적은동본당 근처에 초가집 한 채를 크게 짓고 신학문을 가르치는 해성학교(海星學校)를 개설하고 수년간 운영하였다. 한 신부는 본당 사목 외에 1906∼1911년까지 교구장 뮈텔 주교의 위촉을 받고 성서의 국역사업(國譯事業)에 참여하였다. 종도행전(宗徒行傳)[使徒行傳]의 번역을 끝마치던 1911년 9월, 한 신부는 적은동에서 원동(院洞)으로 본당을 옮겼다. 1913년 4월 한 신부는 서울 주교관의 경향잡지사(京鄕雜誌社)로 전임되고, 평북 비현(枇峴)본당에서 전교하던 김윤근(金允根, 요셉) 신부가 2대 주임신부로 원동에 부임하였다. 1913년 10월에 원동의 교우 김 알로이시오가 성당부지와 건축비 전액을 부담한 가운데 조선식 기와집에다 양식을 가미한 넓고 큰 성당을 완공하였다. 1915년 6월 김윤근 신부는 재임 2년 만에 강원도 이천(伊川)의 망답(望沓)본당으로 전임되고, 원동본당은 후임신부를 배정받지 못해 1918년까지 사리원(沙里院)본당의 이기준(李基俊, 토마스) 신부가 본당주임을 겸임하였다. 따라서 이 본당은 1918년까지는 비록 신부가 상주하지는 않았지만 서울교구 내의 한 본당으로 그 명맥이 유지되었다. 1919년부터 사리원 본당의 관할 공소로 편입되고, 1939년에는 송림(松林)본당의 관할로 넘어갔다.

[참고문헌] 黃海道天主敎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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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종율 [한] 黃鍾律

황종율(1910∼1972). 정치가. 세례명 아우구스티노. 1963년 재무부장관, 1966년 무임소장관, 1967년 체신부장관, 1968년 재무부장관 등을 역임한 뒤 1971년 8대 국회의원(공화당 소속)으로 당선되었다. 교우 국회의원들의 모임인 다윗회를 주도, 간사로 활동하였고 교회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 가톨릭학생회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서울교구 제16차 꾸르실리스타로서 신심운동에도 앞장섰다. 1972년 1월 21일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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