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교황주의 [한] 皇帝敎皇主義 [영] caesaropapism

평신도 전제군주가 치하의 교회에 대해 최고의 지배권을 가지며 교의(敎義)처럼 보통 교권으로 보류된 문제에까지도 이를 행사하는 체제를 말한다. 이 개념은 고대 로마 황제의 ‘최고의 제관’(pontifex maximus)으로서의 기능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기원하며 로마 황제에게 이식된 것으로 5세기 제논(Zenon) 황제 때 시작되어 유스티누스(Justinus) 2세 황제(재위 : 527∼565) 때 전성기를 맞았다. 황제교황주의는 그 뒤 1천년간 비잔틴 제국의 제정일치의 통치원리가 되었는데, 특히 1054년 동방이교(東方離敎) 직후 수세기간의 통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중세의 서부 유럽에서는 거의 문제시되지 않았는데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분쟁은 상당한 부분이 이 통치 형식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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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일광 [한] 黃日光

황일광(1756∼1802). 순교자, 세례명은 알렉시오. 충청도 홍주(洪州)에서 백정(白丁)의 신분으로 출생. 1798년 이존창(李存昌)의 인도로 입교한 뒤,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동생과 함께 경상도의 벽촌으로 이주하였다. 1800년 경기도 광주(廣州) 정약종(丁若鍾)의 분가(分家)에서 8개월간 머무른 뒤 상경하였다가 이듬해 체포되어 1802년 2월 2일(음 1801년 12월 30일) 홍주에서 김귀동(金貴同)과 함께 참수(斬首)당하여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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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심 [한] 黃沁

황심(1756∼1801). 순교자. 세례명 토마스. 충청도 덕산(德山) 출신으로 본명은 인철(寅喆). 내포(內浦)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李存昌, 일명 端源)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로는 지황(池璜), 윤유일(尹有一)과 더불어, 조선 교회와 북경주교와의 연락 일을 담당하였다. 1794년 12월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북경으로부터 영입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주문모 신부의 입국사실이 탄로되어 1795년에 윤유일, 지황이 잡혀 순교한 뒤로는 황심이 주로 북경과의 연락을 맡았다.

즉 1796년에 주문모 신부의 서한을 북경주교에게 전달하기 위해, 동지사(冬至使)의 하인 자리를 돈을 주고 사서 북경에 들어가 밀서를 무사히 전달했고, 그 뒤에도 여러 번 옥천희(玉千禧), 김유산(金有山) 등과 함께 북경을 왕래하면서 조선 교회의 사정을 북경에 알리는 동시, 조선 교회에서 성사집행에 필요로 하는 성유(聖油) 등 성물을 가져와 주 신부를 도왔다. 1801년 신유(辛酉)박해가 일어나자 그는 강원도 춘천(春川)으로 피신하였는데, 이 때 황사영(黃嗣永)이 가까운 곳에 피신해 온 것을 알고는, 제천(提川)으로 그를 찾아가, 주 신부의 순교사실을 알리는 동시, 조선 교회의 이 같은 사정을 북경주교에게 알리는 방안을 의논하였다.

이렇게 해서 황사영은 북경주교와 면식이 있는 황심의 이름으로 이른바 백서(帛書)를 쓰고, 황심은 이를 옥천희를 시켜 북경에 전달하기 위해 그해 9월에 백서를 받으러 다시 제천에 가기로 약속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9월 20일 옥천희가 먼저 잡히고, 이어 황심도 그 달 26일에 잡혔으며 황사영도 10월 3일에 잡혀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갔다. 그는 1801년 10월 24일 옥천희와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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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지 [한] 黃石之

황석지(?∼1833). 순교자. 일명 사윤, 세례명은 베드로. 경기도 수원(水原) 출생. 40세경 온가족과 함께 영세, 입교하였다. 1821년 처자(妻子)를 모두 잃고 10여년간 홀로 살면서 신앙생활에 전념하다가 1832년 상경(上京), 아현동(阿峴洞)에 사는 조카 황(黃) 안드레아의 집에 얹혀살았다. 그러나 9월 조카의 가족과 인근에 사는 교우 10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의 고문으로 함께 체포된 교우들은 모두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홀로 용기를 굽히지 않고 신앙을 고수, 형조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년여의 옥살이 끝에 1833년말 옥사(獄死)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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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두 [한] 黃錫斗

황석두(1813∼1866).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회장. 세례명 루가. 일명 재건. 충청도 연풍(延豊)의 부유한 양반집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성장해서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보러 상경하던 도중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했고, 그 뒤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이나 벙어리 행세를 해 가면서 교리서적을 탐독하는 한편 박대하던 부친과 가족들을 권면하여 입교시켰다. 이러한 뛰어난 교리지식과 덕행으로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를 거쳐 회장으로 활약했고, 또 페레올(Ferreol, 高) 주교에게 절제와 금욕을 위해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고 독신으로 생활하였다.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를 도와 교리서를 번역하며 교회서적 출판에 관계하던 중 1866년 3월 충청도 홍주(洪州)의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당하는 다블뤼 주교를 몇 십리나 뒤따라 가다가 체포되어 주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3월 23일 사형을 선고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의 갈매못에서 다블뤼 주교, 위앵(Huin, 閔) 신부, 오메트르(Aumaitre, 吳) 신부, 장주기(張周基) 등과 함께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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