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식서 [한] 禮式書 [라] Rituale [영] Ritual [관련] 로마예식서

종교의식을 위하여 규정된 문구와 의식의 절차 등을 수록한 서방교회의 전례서. 즉 사제(司祭)의 성사(聖事), 준성사(準聖事) 집행시에 필요한 지침과 규정된 문구, 기도, 의식의 절차, 축복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런 유형의 책들은 원래 수도원을 위하여 12세기에 작성되었는데, 교구사제들은 14세기가 되어서 비로소 그 예식서들을 갖게 되었다. 교구사제는 지역적 관례에 따라 자신의 고유한 전례 예식서를 편찬할 수도 있었다. 이런 유형의 책은 13세기에는 마누알레(Manuale)라고 일컬어졌으며, 14세기에는 리투알레(Rituale) 또는 리베르 옵세퀴오룸(Liber obsequiorum), 파스토랄레(Pastorale) 등으로 일컬어졌다. 리투알레(Rituale)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된 것은 지역적 관례들이 크게 차이나는 것을 막고 각 교구간의 조화와 일치를 이루기 위해 ‘로마 예식서’(Rituale Romanum)가 소개됨으로써이다.

현재 가톨릭 교회의 예식서들은 직무(office)에 따라 ‘주교를 위한 예식서’ 등으로 구별되며 또한 예식의 종류에 따라 서품(敍品)을 위한 ‘서품 예식서’ 등으로 구별된다. 출간 공표되는 공식적인 예식서는 교황청으로부터 인가되어야 한다. 이것이 의식 규정의 공식적인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예식서는 사용의 편리를 위해 각 부분으로 나누어 출간되기도 하는데 음악과 시편 성주간의 독서를 위한 ‘Officium Majoris Hebdomadae’가 그 예이다. (⇒) 로마예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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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한] 預言者 [라] propheta [영] prophet

‘예언자’라는 말의 어원은 그리스어 prophetes인데, 이는 예언자의 기본성격을 암시하는 말로 다른 이를 위하여(pro) 말하는(phemi) 자라는 뜻이 된다. ‘예언자’의 히브리어 nabi가 이와 같은 뜻으로 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이는 아마도 ‘부르다’라는 어원(nabu)의 수동형이었을 것이다. 즉, 이 히브리어는 능동형으로 ‘하느님의 대변자’를 가리킬 사람을 가리킬 가능성도 있으나, 그보다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느 경우에나 중심 개념은 신적(神的) 교제를 나타내는 것이며, 만일 어원이 이 개념을 확실히 나타내지 못한다 해도 성서에 나타난 실제 역사를 통해 예언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명확해진다. 예언은 대개 하느님의 힘이나 성령의 힘에 의거하였기 때문에(민수 11:25-, 1사무 10:6 · 10, 19:20 · 23)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사람(1사무 2:27, 1열왕 12:22, 13:1-, 17:24, 20:28) 또는 성령의 사람(호세 9:7)이라고도 한다.

예언자들은 미래에 대한 예언만을 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일을 과거와 연관시켜 얘기하는 등 과거 · 현재 · 미래를 다 예언의 소재로 했고, 심판에 대한 예언과 구원에 대한 예언을 동시에 하기도 했으며, 이방인에게나 자기 민족에게나 차별없이 예언하였다. 예언의 내용은 신학적인 것만 다룬 것이 아니라 정치(호세), 사회적(아모, 미가) 문제들도 다루고 있는데, 정치적인 예언은 신학적으로도 풀이될 수 있다. 예언자들이 부름을 받았던 구약성서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예언자들이 어떤 기준에 의해 설정되었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이사야 6장 1-13절, 예레미야 1장 4-16절, 에제키엘 1장 1절-3장 2절, 아모스 3장 7-8절, 7장 14-16절 등의 내용에서 다음과 같은 예언자의 역할들이 밝혀진다. 예언자는 야훼를 대리해서 말한다(이사 6:8-9, 예레 1:9). 예언자직은 예언자가 되기를 꺼려하거나 예언자적 자질이 없는 사람에게도 강제적으로 주어진다(아모 3:7-8, 예레 1:7-8). 하느님은 그의 말씀을 예언자에게 전한다(이사 6:9, 예레 1:7-9, 에제 2:8-3:3), 그리고 이러한 교제는 훗날 신비주의자들에게 알려진 것과 유사한 환영과 소리와 혼란된 상태 등을 포함한다.

성서의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의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자이며 영감을 받은 대변자이다. 그러나 예언자들이 직접 예언서를 쓴 것은 아니다. 그들의 말은 구두 전승으로 보존되었고 영감을 받은 기술자들이 전승된 말씀들을 기록하고 정리한 것이다. 현재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성서는 다른 기술자들에 의해 편집되고 배열되고 다소 추가되었으나 예언자들이 전한 말씀인 것이다.

역사에 대한 현대의 관심은 원래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가려내려는 노력에 집중되어 왔다. 이러한 노력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종교를 재건설한다는 점에서는 중요한 일일 수 있으나 신학적인 해석의 견지에서 중요시되는 것은 영감을 받은 예언서이다. 예언서에 현재 나타나는 구조를 편집의 역사(Redaktionsgeschichte)와 함께 연구하는 것이 종종 성서 해석의 효과적인 접근 방법이 되고 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은 이사야, 예레미야, 에제키엘, 다니엘 등 4명의 주요 예언자들과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디야, 요나, 미케아, 나훔, 하바꾹, 스바니야, 하깨, 즈가리야, 말라기 등 12명의 준 예언자들로 구분된다. ‘주요’와 ‘준’이라는 용어는 예언자들이나 그들이 남긴 메시지의 상대적인 중요성과는 상관이 없으며 이들은 단지 구약성서의 예언서의 개별적인 범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구약성서에서 예언자적 명칭과 직책이 현대 성서의 16명의 교회법적인 예언자들 즉, 성서를 직접 기술한 예언자들에 국한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도 기억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에는 엘리야와 엘리사(Elisae) 같은 이들도 나타나는데 이들의 말은 거의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지 않으나 이들도 다른 예언자들이나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말씀의 영감적인 전달자였다. 구약성서시대에는 예언을 하고 보수를 받았기 때문에(판관 13:17, 1사무 9:7) 진리보다도 이를 위해 예언하는 거짓 예언자들도 있었는데(1열왕 13:7, 14:3, 2열왕 5:22-27, 8:8, 아모 7:12, 미가 3:5) 이들 중에는 하느님의 부름을 받지 않았으면서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함부로 예언한 사람들(예레 14:15, 23:32, 27:15, 29:9, 에제 13:6), 자신의 생각을 예언처럼 선포한 사람들(이사 9:14, 예레 5:31, 6:13, 14:14, 23:25, 27:10 · 14, 에제 13:2-23), 충실치 못한 예언을 한 사람들(스바 3:4) 등이 있었다. 신약성서에는 초기 교회의 예언자들의 경험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이들도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나 마찬가지로 예언하고 훈계하는 직무를 수행하였으므로 신약성서의 예언자의 개념은 구약성서의 예언자의 개념을 계승하고 있다고 결론지어도 좋을 것이다.

[참고문헌] R.A. Knox, Enthusiasm, New York 1961 / J. Lindblom, Prophecy in Ancient Israel, Philadelphia 1962 / N. Fuglister, Prophet, Frices Hb The Grdbgr 2:350-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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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절 [한] 禮節 [관련] 전례

교회의 전례(Ritus) 혹은 예식(rubrica)을 지칭하던 옛말. ⇒ 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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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절서 [한] 禮節書 [관련] 예식서

예식서의 옛말. ⇒ 예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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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설 [한] 豫定說 [라] praedestinatianismus [영] predestinatianism

‘예정’은 인간의 행위가 있기 전에 그의 운명이 결정됨을 뜻한다. 하느님은 특정한 인간들의 영혼의 영구적 지위를 미리 결정해 놓으셨다는 사상으로, 이는 초기 교회에서 이단시되었으며 848년 마인츠 공의회에서 배격되었다. 하느님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틀림없는 예지를 지니고 계시기 때문에 ‘예정’은 넓은 의미에서 세상을 통치하는 하느님의 거룩한 섭리로 이해될 수 있으며, 보다 엄격한 의미에서 이는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섭리와 모든 이성적 피조물들의 영구적인 교육의 은총을 통해 인간의 지위를 높여주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예정’은 하느님이 모든 인간들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영광과 그 영광에 이르는 방법의 제시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1디모 2:4-5, 2베드 1:11-18).

하느님은 당신의 은총을 통하여 인간의 의지를 움직이시기도 하지만, 인간을 하느님의 섭리 하에서 항상 자유를 누리고 있다. 아우구스티노는 최초로 예정설문제를 논의한 사람이 되었고 구원에 이르는 내적 은총과 하느님의 모든 인간에 대한 부르심에 응답할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초자연적 질서 안에서 은총 없이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예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만일 ‘예정’을 ‘미리 결정되는 운명’만으로 간주한다면 그리스도의 운명은 우리의 그것과 다른 것이 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예정’의 목적과 대상을 숙고해 본다면 그리스도의 운명과 우리의 운명이 같은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하느님이 그와 우리를 같은 운명으로 묶어 놓으셨으며 우리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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