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수(1924~1950). 6.25전쟁 중 북한 공산군에게 살해된 대전교구 소속 신부. 세례명 요셉. 충남 아산(牙山)에서 태어났다. 1948년 성신대학(聖神大學, 가톨릭대학의 전신)을 졸업하고 이해 12월 18일 사제서품을 받았다. 서품 후 대전 대흥동(大興洞)본당 보좌로 1년간 사목했고 1949년 4월 홍성(洪城)본당의 신설과 함께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 신설 본당의 기초작업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나자 8월 11일 북한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대전감옥에 수감 중, 9월 26일 수감자 1,200명과 함께 학살되었다.
강론대 [한] 講論臺 [라] ambo [영] ambo
초세기 그리스도교회에서 강론을 하고 성서를 낭독하며 공지사항을 전달하기 위하여 회중석(會衆席)에 층계를 만들어 높이 세운 단(壇). 후기에 와서 두 개의 강론대 또는 독서대를 제대 양편에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오른편의 강론대에서 복음성서를, 왼편의 그것에서 서간경을 봉독하였다. 오늘날에는 하나의 강론대 또는 독서대를 두어 모든 말씀의 전례를 봉해하는 지역도 있으나, 현재 한국 천주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성당 내 회중석에 독서대를 재대 옆에 강론대를 각각 설치하여 독서대에서 전례 해설자 기타 보조자가 미사고유문 중 제1독서와 제2독서를 하고 전례를 해설하며 공지사항을 전달하는 한편 복음성서의 봉독과 강론은 사제가 강론대 앞에서 이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강도영 [한] 姜道永
강도영(1863~1929). 서울교구신부. 세례명 마르코. 서울출생. 고모 강마리아의 권면으로 입교(入敎)한 뒤 한문을 공부하던 중 블랑(Blanc, 白主三) 주교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1883년 4명의 신학생과 함께 페낭신학교로 유학하였다가 1892년 귀국, 새로 설립된 용산(龍山) 예수성심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친 뒤 1896년 4월 26일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주례로 약현성당(지금의 중림동성당)에서 강성삼(姜聖三, 라우렌시오), 정규하(鄭圭夏, 레오)와 함께 사제로 서품, 그 해 6월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된 미리내의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 선종할 때까지 34년간을 그곳에서 사목(司牧)하였다. 부임 당시 안성(安城) 일대에는 동학혁명군, 의병(義兵)들이 많이 몰려 있었고, 또 1896년의 민비시해사건과 이에 이어 발생한 아관파천 등으로 매우 불안한 상황이었으나 선교에 전념, 한때 안성, 양성(陽城), 용인(龍仁), 진위(振威), 수원(水原), 이천(利川) 등지까지 관할하였다. 또한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와 페레올(Ferreol, 高) 주교가 묻혀있는 산을 기증받아 교회묘지를 조성하고 1928년 김대건 신부 묘소옆에 기념경당을 설립하는 한편 외교인들에게는 양잠과 농업기술을 가르치는 등 교우, 외교인을 가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사목하였다. 1929년 3월 12일 공소 순방길에서 걸린 열병으로 인해 67세로 선종, 34년 동안 성직생활의 전부를 바친 미리내에 안장되었다.선종 후 장례미사에는 800여명의 교우를 비롯하여 안성군수를 포함한 100여명의 외교인들이 참석하였으며 외교인들은 강성삼 신부의 공덕(功德)을 기리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건립하려 하였으나 교우들의 권고로 중단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