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孔子, 기원전 551~479)를 종사(宗師)로 하여 개인의 인격적 성숙[修己]과 사회적 질서의 실현[治人]을 기본과제로 하는 가르침이다. 유(儒)의 글자를 분석하면 인(人)과 수(需)가 되는데, 그 의미는 한 사회에서 유용하게 쓰이[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한편 교(敎)는 진리를 연마한다는 뜻에서 종교적인 수도(修道)로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는데 이는 인간 내면에 하늘[天]로부터 품부된 본성을 따라 덕을 밝히려는 것이요, 인식과 실천이 통일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교는 학(學)으로 통용될 수 있다. 따라서 유교와 유학은 같은 내용을 갖는다.
유교가 성립된 춘추전국시대는 봉건질서가 붕괴되고 혼란에 빠지자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해 지식인들이 저마다의 이론을 제기했던 제자백가(諸子百家)시대이다. 이 때 공자는 사람다움의 도리[人道]를 내세워 인(仁)과 의(義)의 도덕이 구현되는 이상사회를 추구하였다. 그는 요(堯) · 순(舜) · 우(禹)임금의 화합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덕과 탕(湯) · 문왕(文王)의 천명을 받는 사업과 무왕(武王) · 주공(周公)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진리를 계승하는 다스림을 본받아 경전을 편찬하고 가르침을 집대성하였다. 따라서 공자 자신은 “서술할 뿐 창작하는 것이 아니요, 옛 것을 믿고 좋아한다”고 그 태도를 밝히고 있으며, 주공을 사모하고 주(周)의 제도 문물을 찬탄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의 목표를 단순히 과거로 복귀하는 데 두는 수평적 복고주의가 아니라, “성인이 하늘을 이어 만민의 준칙을 세운다”는 유교이념의 원형을 역사 속에서 반복하여 실현하는 영원성의 회복으로서 수직적 복원 운동이라고 하겠다. 유교의 역사의식에는 발전의 개념보다 순환의 개념이 뚜렷한 것이 사실이다. 현실의 역사적 상황은 치세(治世)와 난세(亂世)가 반복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라 파악함으로써 저류에 흐르는 자연의 질서가 갖는 안정성을 확신하기도 한다. 공자는 백세(百世)의 뒤까지 알 수 있다고 하여 역사 자체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위태롭고[人心惟危] 진리는 숨기 쉽다[道心惟微]”고 인식된다. “세상은 자꾸만 타락해 가고 진리는 숨어들기만 하는 것”[世衰道微]으로 보이는 것이 유교의 현실인식이다. 이러한 역사의 몰락 과정을 극복하고 진리를 밝히며 이를 현실 속에 실현하여야 한다는 것이 유교적 역사관의 과제가 되고 있다.
유교의 원리는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는 것이기에 예(禮)가 옥백(玉帛)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악(樂)이 종고(鐘鼓)만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으며 예의 근본은 사치한 데에 있는 것보다 검소한 것이 좋으며, 상(喪)에서는 익숙한 것보다 슬픈 것이 좋다고 내면을 중시하였다. 공자의 가르침은 고매한 이론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도리라고 강조된다. 그 사상의 핵심적 개념은 ‘인’이라 할 수 있는데 그가 하늘이나 도와 정치나 예악을 언급하고 강조하기도 하지만 모두 ‘인’의 정신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내면에 응축된 덕으로서의 ‘인’이 여러 가지 행동의 덕목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인’을 근거로 하는 행동의 덕목은 개인[誠 · 敬] → 가족[孝 · 弟] → 사회[義 · 信]로 확대 심화되면서 예도(禮道)의 윤리가 실현되는 대동사회(大同社會)가 이룩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공자는 배우기 좋아함[好學]을 스스로 자부할 만큼 학구적이었으며 교육을 필생의 사업으로 하여 문하에 3천의 제자가 나와 그중 육예(六藝)를 익힌 제자만도 72명이 있었다. 논어에서 열거한 공자의 주요 제자 10인[十哲]은 안연(顔淵) · 민자건(閔子騫) · 염백우(-伯牛) · 중궁(仲弓) · 염유(-有) · 계로(季路) · 재아(宰我) · 자공(子貢) · 자유(子遊) · 자하(子夏)이고 그밖에 자장(子張)과 유약(有若)도 비중이 있었으나 자사(子思) · 맹자(孟子)로 이어지는 공자학통의 정맥은 증삼(曾參)을 통해 계승된 것이라 본다.
유교의 경전은 3경(經) · 5경 · 6경 · 9경 · 13경으로 분류되지만 가장 일반적으로 공인된 것은 송대(宋代) 이후 성립된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이다. ‘사서’로서 먼저 ≪논어≫(論語)는 일상생활 속에서 평범한 유교의 본질적 진리를 가르친 공자의 말씀과 그 제자들의 언행록이다. ≪대학≫(大學)은 공자의 정통을 계승한 증자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전해진다. 3강령(綱領), 8조목(條目)을 기본구조로 하여 학문과 덕행을 연마하여 자신의 밝은 덕을 밝힌 후에 다른 사람의 덕을 밝혀 조화를 이르는 것을 유교원리로 제시하였다. ≪대학≫에서 언급된바 자기의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도리[혈矩之道]는 곧 ≪논어≫에서 언급한 충서(忠恕)와 공통된 원리로 인정된다. ≪중용≫은 자사(子思)가 지은 것으로 전해지며 천도와 인도를 통합하는 중화(中和)와 성(誠)의 도리를 밝혀준다. 중화의 도리를 체득하는 기반으로서 지(知) · 인(仁) · 용(勇)의 덕목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되고, 수양의 목표는 성(誠)에 도달하는데 있다. 즉 원리의 기본 형식으로 중(中)과 실질 내용으로서의 성이 하나로 만나는 것이요, 내면적인 덕성의 수련을 통해 참된 인격을 형성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맹자≫는 인의(仁義)의 도덕규범과 왕도(王道)의 정치론과 인간 본성의 착함[善性]과 착함의 근거로서 사단(四端)의 인성론을 전개하였다. 곧 인의를 중요시하고 이익을 경시하여 왕도정치의 이상실현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공자의 도덕천명 사상을 계승하여 윤리의 내면적 근거를 확립하고 민본주의의 정치이념을 제시한 것이다. 또한 주의 무(武)가 은(殷)의 주(紂)를 정벌한 사실을 신하가 임금을 죽인 것이 아니라 한 명의 필부(匹夫)를 죽이는 일이라 하여 혁명론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 인간의 본성이 선천적으로 착하다는 주장에 따라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고[良能] 생각하지 않아도 아는 것[良知]이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욕심을 제거하고 사단을 확충하여 본래인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 타고난 기상의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라고 가르친다. 이에 반해 순자(荀子)는 성악설(性惡說)을 제시하고 인간본성을 억제하여 예를 강조함으로써 법가(法家)로 넘어가는 길을 터놓았다. ‘오경’은 우주 · 정치 · 윤리 · 역사 · 문학 등 다방면에 걸친 논의가 수록되어 있는데, 인간의 정서를 순화하는 문학예술로서 ≪시경≫(詩經)과 풍속 · 종교 · 윤리의 다양한 제도나 규범을 논한 ≪예기≫(禮記), ≪주례≫(周禮), ≪의례≫(儀禮)가 있으며, 또 군왕과 신하들의 언행을 기록하여 민본적 유교 정치철학을 제시한 ≪서경≫(書經)과 언어나 논리로써 포착할 수 없는 우주 원리를 상징이나 수리로 간단하게 표시한 ≪역경≫(易經)이 있고, ≪춘추≫(春秋)는 공자가 도덕원리를 통하여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을 비판한 유교 사관의 표준이 된다.
전국 시대가 끝나고 진(秦)이 천하를 통일하여 법가사상에 의한 전제정치를 펼 때 유가는 맹자가 양주(楊朱) · 묵적(墨翟)의 사상을 배척하여 정도를 밝히던 정신을 이어받아 법가의 치세를 비판하였지만 도리어 극심한 탄압을 받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한(漢) 나라 때는 소멸된 경전을 수집 · 정리하는 훈고학(訓詁學)이 일어났다. 무제(武帝) 때는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어 유학을 장려하고 동중서(董仲舒)는 태학(太學)을 건립하여 인재를 양성할 것을 건의하여 유학을 관학(官學)으로 확립하였다. 당대 후기에 이르러 한유(韓愈)의 불교 비판론과 이고(李-)의 ≪복성서≫(復性書)를 통한 인성론(人性論)을 송대(宋代) 유학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남송(南宋) 때 주자(朱子)는 성리학을 집대성하는데, 이것은 주염계(周-溪)의 ≪태극도설≫(太極圖說), 소강절(-康節), 장횡거(張橫渠), 정자(程子) 형제의 사상을 수용하여 종합 정리된 것이다. 성리학은 궁극적으로 천리[天]와 인성[人]을 어떻게 결합할 수 있느냐의 문제를 내포한다. 태극과 이기문제는 천도에 관한 것이요, 성정(性情) · 선악 · 인심도심(人心道心) 등의 문제는 인간에 있어서는 심성론이 되며, 수양론으로서 성(誠) · 경(敬) 등은 구체적 실천원리로 전개되는 것이다. 명대(明代)에 일어난 양명학(陽明學)은 심즉지(心卽理) · 치양지설(致良知說) · 신민설(新民說) ·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 등을 기본명제로 제시하여 살아 움직이는 인간의 문제를 의지와 감정의 통로를 통해 해결하려는 주체적 입장의 발상이 깃들이어 있다. 주자학이 현상계에 대해 그 배후에 실재계가 있다고 하여 태극과 ‘이’를 실재론으로 해명하려고 했다면 양명학은 이들에 대한 인식도 결국 우리 마음속에 있다는 유심론(唯心論)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렇게 관념적 논쟁은 청대(淸代)에 들어와 고전의 훈고 및 실증적 가치를 밝히려는 고증학(考證學)으로 대치되었다. 고염무(顧炎武)가 제기한 이 실용주의적 학문은 왕부지(王夫之) · 염약거(閻若-) · 황종희(黃宗羲)에 의해 전개되었으며, 청대 중엽의 완원(玩元)은 한대 고증학과 송대 의리학을 절충시키고 있다. 청대말기의 강유위(康有爲)는 ≪춘추공양전≫(公羊傳)의 춘추 삼세설(三世說)을 근거로 진보적 역사관을 제시하면서 육경(六經)은 모두 공자가 지은 것이고 요 · 순은 공자가 의탁한 것이라 하여 공자개제설(孔子改制說)을 내세웠으며 ≪예기≫ 예운편의 대동사상을 부각시켜 유교적 이상사회로서 대동세계를 구상하였다. 그는 유교적 사회원리로 민주주의 · 사회주의 · 세계주의를 추구하였고 이러한 개혁론은 양계초(梁啓超) · 담사동(譚嗣同)에 의한 급진적 개혁론으로 전개되었다.
유교가 한국에 전래된 것은 정확히 규정할 수 없으나 삼국이 부족국가로서 처음 발생하기 이전에 이미 한자가 수입되어 있었으며 한자의 전래는 곧 유교경전의 수입을 지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불교의 수입시기로 기록된 고구려 소수림왕(小獸林王) 2년(372년)은 곧 태학이 세워져 사서와 효경을 비롯한 유교경전으로 교육받은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를 가졌던 것이다. 사회도덕은 유교정신에 근거한 충과 효를 주축으로 하고 있으며 화랑의 기개나 명장 충신이 모두 유교적 윤리를 실천하고 있었던 것은 그 시대의 가치관의 기반이 유교였음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고려시대는 유(儒) · 불(佛) · 도(道)가 교섭하는 시대인데 최충(崔沖) · 김부식(金富軾) 같은 유학자들은 불교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고려말에 왕실의 쇠퇴와 불교의 폐단이 사회문제로 드러났을 때 일부의 유학자들이 왕조개체를 기도하여 조선왕조를 유교이념으로 건국하였던 것은 다만 왕조의 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에 대한 유교의 항쟁과 극복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말선초(麗末鮮初) 왕권 교체기에 유학자들은 정도전(鄭道傳) · 권근(權近) 등 두 왕조의 임금을 섬긴 자와 정몽주(鄭夢周) · 길재(吉再) 등 절의를 지켜 조선조에 벼슬하지 않은 자로 구분되며 이들의 처신에 대해서는 후대에 계속하여 그 의리로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유학을 벼슬의 수단으로 삼거나 과거시험을 위한 학문에 치중하여 대대로 중앙의 관계를 지배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훈구파라는 명칭이 붙었고 사장을 가벼이 보고 경전과 성리학을 연구하며 의리를 존중하는 지방의 학자들은 사림파(士林派)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 사림파들은 길재,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으로 학통이 계승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 초야에서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성종 때에는 김굉필(金宏弼) · 정여창(鄭汝昌) · 김일손(金馹孫) 등이 관료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중앙의 관계에서도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문제로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이 출현하였으며 이들이 보인 절의는 의리를 위하여 생명을 걸고 정치권력에 저항하는 도학정신의 기개를 발휘하였던 것이다. 연산군(燕山君) 때 무오사화(戊午士禍)도 사림 출신인 김일소의 직필(直筆)이 발단이 되어 훈구세력이 모함하는 데서 시작되었고, 중종 때의 기묘사화(己卯士禍)도 유교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조광조(趙光祖) 등의 개혁적 정책에 반발하는 보수적 훈구 세력의 권력투쟁에 사림 출신이 희생당하였던 것이다. 이율곡(李栗谷)은 참된 유학자의 모습을 “나아가서는 한 시대에 도를 행하여 백성들에게 화락한 즐거움이 있게 하고 물러가서는 만세토록 가르침을 드리워 배우는 자가 크게 깨달음을 얻게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유교는 자기완성의 학업이며[爲己之學] 홀로 있으면 선을 닦아야 하는 것이지만 자기의 구원으로 끝날 수 없고 모든 사람을 바르게 이끌어주는 법이요, 세상을 선하게 이룩하려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학자의 이상은 자신의 덕을 밝혀 백성을 새롭게 함으로써 지선(至善)한 데까지 이르는 진지하고 엄숙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광조 자신도 유교의 이상사회인 요순시대를 현재의 이 땅에다 실현시키려는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하다가 세속적 세력에 희생되었던 첨된 유교인의 한 사람이라 하겠으며, 그의 신념이 사림정신의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조 사회는 이러한 원리를 국가의 원기(元氣)로 높이 평가하여 군왕은 선비를 특별히 우대할 의무를 지고 있다. 제도적으로도 간관(諫官)은 직언으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언로(言路)를 확보하는 기관이다. 언로가 통하는지 막히는지가 국가의 안위에 가장 긴요한 것으로 인식되어 서민들의 여론까지도 반영될 것을 주장하고 있으며 언관(言官)의 직책을 사람들이 장악하여 무수한 희생을 겪으면서도 의리 정신에 입각한 직언을 함으로써 조선조 사회의 정신적 지주(支柱)의 역할을 담당해 왔던 것이다.
퇴계(退溪) · 율곡(栗谷) 이후 성리학이 주요 문제로 사칠이기론(四七理氣論)의 논쟁이 벌어지고 학계가 대체로 영남학파(嶺南學派)와 기호학파(畿湖學派)로 갈라져 겉으로 보면 파벌을 조성하여 당쟁(黨爭)의 실마리를 이루는 무의미하고 관념적인 논쟁을 벌이는 것같이 보이나 이 시기는 도학의 근본과제인 인간성의 심성을 철학적으로 구명하려는 요구와 이에 상응하는 진지한 노력으로 충만하였던 때이며 종교적 신념의 논리적 기반을 구축하는 시기라고 볼 수 있겠다. 심성의 본연적인 면과 기질적인 면의 내용을 분석하면서 선과 악은 어디서 근원하는가, 어떻게 하면 선을 확장하고 악을 막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궁극적 관심이었다. 그 방법론의 입장에 따라 인심 내면의 도덕적 근원에 관심을 기울여 이기호발(理氣互發)을 주장하는 입장과 우주론적 체계에서 기발이승일도(氣發理乘一途)를 주장하는 입장의 양립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양쪽 다 근원적으로 도학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의 논리로 도학의 신념을 강화하는 것이다. 율곡이 나랏일을 맡았을 때 지극히 어려운 처지에 닿으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대해 죽을 때까지 밀고 나갈 따름이라는 대답을 하였던 것이나, 그 시대의 폐단을 고치도록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리고서 그의 계책을 3년 동안 시행해도 나라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죽음을 내려 달라고 절실하게 주장하는 것은 국가에 대한 충성의 도리를 실현하는데서 생사의 문제를 넘어선 신념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의사와 의병들이 관군(官軍)의 선두에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조선 중기 유학자들 가운데 관(冠) · 혼(婚) · 상(喪) · 제(祭)의 예제(禮制)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여 정구(鄭逑) · 김장생(金長生) 등의 예학파가 성립되었으며, 왕실의 상복(喪服) 문제에 대한 의견대립으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기까지 하였다. 상례의 오복제(五服制)와 종법제(宗法制) 및 가묘(家廟)의 설치와 제사권에 따른 서얼(庶孼)의 구분, 입후(立後)의 법 등 가족제도가 정비되었으며 사직 · 종묘 · 문묘는 유교적 신앙대상의 기본을 이루었다. 이러한 예제가 봉건제와 종법제에 의한 규제에 근거를 두었던 것은 그 사회계급 조직을 바탕으로 한 질서의 확보와 국가적인 통일성의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양명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명종 · 선조 때인 듯하다. 퇴계가 ≪전습록논변≫(傳習錄論辯)을 지어 양명학을 이단시한 이래 금기로 되었으나 최명길(崔明吉) · 장유(張維) 등의 글에서 단편적으로 엿 볼 수 있고, 정제두(鄭齊斗)는 정연한 논리를 양명학의 이론을 체계화하였다. 그 후 양명학은 소론의 이영익(李令翌) · 이충익(李忠翌)에게 계승되고 이광신(李匡臣) · 이광사(李匡師)를 거쳐 박은식(朴殷植) 등에 전해졌다.
16세기 이래 서양의 상인과 선교사가 중국에 들어오면서 천주교가 전래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초기의 예수회 선교사들은 중국문화의 전통적 기반을 깊이 이해하고 이에 적응하는 입장에서 천주교 교리를 제시함으로써 전교의 토대를 닦는데 좋은 성과를 이루었다. 조선 선조 때 이수광(李晬光) · 허균(許筠) 등이 명나라로 왕래하면서 서양문물과 천주교 교리를 전래해 왔지만 초기에는 오히려 역법(曆法)이나 서양과학에 제한된 관심을 보이는 정도에 그쳤다.
이수광에 의해 ≪천주실의≫(天主實義)가 소개된 이후 정조(正祖) 때 천주교 신앙운동이 일어나기까지는 거의 2세기에 가까운 기간이 경과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 왕조의 문화전통과 사회질서가 강한 자족적 안정성을 지녔기 때문에 쉽사리 새로운 외래문물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서양문물과 천주교 교리에 관한 포괄적인 학문적 평가를 내리는 것도 이익(李瀷)에 이르러서인데 그는 ≪천주실의≫를 읽고 이를 평하여 “천주라는 존재는 유교에서의 상제이나 그를 공경하여 섬기고 두려워하며 믿는 것은 곧 불교의 석가와 같다.”고 언급함으로서 천주의 초월성과 신앙대상의 성격을 유교와 구분하여 불교에 비견하였다. 그와 토론하는 가운데 제자 신후담(愼後聃)은 천주교 교리에 관심을 갖고 본격적인 비판저술로서 ≪서학변≫(西學辨)을 남겼는데, 그는 여기서 천주교 교리서에 조목별로 비판을 하면서 특히 스콜라 철학의 영혼개념을 성리학의 이론에서 반박하고 영혼불멸설과 천당지옥설을 세상 사람들이 “살기를 탐내고 죽기를 싫어하는 마음[貪生惜死之利心]에 근거하여 의리를 저버리고 이익을 좇는 이단”이라 하였다. 또 성호(星湖) 이익의 제자인 안정복(安鼎福)도 성호에게 올린 편지에서 “유교의 자신을 닦고 성품을 기르며 착한 일을 행하고 악한 일을 버리는 것은 마땅히 할 바를 하는 것이요 조금도 죽은 다음의 복을 구하는 일이 없다. 그러나 천주교에서 자신을 닦는 바는 오직 하느님의 심판을 위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 유교와 크게 다른 것이다” 하여 유교와 천주교의 차이를 밝히고 있으며, 또 천주교란 도덕적 당위성을 저버리고 죽은 다음의 복을 구하는 것으로 단정하였다. 18세기 후반부터 성호학파에 속하는 인물들 중에서 이벽(李檗) · 권철신(權哲身) · 이승훈(李承薰) · 정약용(丁若鏞) 등이 서양과학을 연구 심취하고 나아가 천주교 교리를 신앙하는 데로 발전하였다. 1777년부터 권철신을 중심으로 주어사(走魚寺)에서 강학회(講學會)를 열었고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박고 오는 것을 계기로 1784년부터 신앙집회가 일어났다. 바로 그해 안정복은 권철신에게 이단인 천주교를 신봉하는 것에 대해 충고의 편지를 띄우고 있다. 이처럼 천주교 신앙에 대한 학파 안에서의 두 갈래의 경향은 성호의 서학(西學) 이해에 내포된 양면성을 각각 다른 면으로 발전시킨 것이라 하겠다.
조선 말기의 의리학파인 이항로(李恒老)와 그의 제자 김평묵(金平黙) · 유중교(柳重敎) 등은 서학의 궁극존재는 ‘이’가 아니라 ‘기’(氣)의 성격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이’로서의 상제(上帝)는 자기 스스로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형기(形氣)를 지닌 성인을 통해 증험될 수 있다면서 비난하고, 최익현(崔益鉉) · 유인석(柳麟錫) 등의 의병은 민족의 주체성을 수호하려는 것이고, 이들의 척사론(斥邪論)은 그만큼 신앙적 철저성을 지닌 것이었다. 조선사회에서의 양명학은 그 자체로서 정통주자학이 권위를 추종하지 않는 만큼 천주교에 대해서도 극단의 비판을 취하지 않는 추세였다. 한 걸음 나아가 천주교와 접근이 쉬웠으므로 권철신 등은 양명학에 긍정적인 입장을 가졌고 그만큼 주자학에서 벗어났으며, 마침내 천주교 신앙으로 들어갔던 인물이다. 정약용이 ≪대학≫의 ‘명덕’과 ‘친민’에 대한 해석에서 양명학의 입장을 끌어들은 것은 천주교의 교리와 유교의 교량으로서 양명학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양명학은 유교의 이해를 다양화하고, 특히 정감적 입장을 통하여 천주교 교리를 수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도학(道學)의 발전은 성리학을 통한 사회질서의 엄밀화라는 양극의 심화를 추구하는 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에 있어 후기 주자학파에서 보이듯이 그 일관성의 긴장을 유지하지 못하였을 때 성리학은 관념적인 이론을 천착하고 의리학은 비현실적인 명분론을 고집하고 예학은 형식적인 의식에 골몰하는 타락현상을 보이게 되었다. 덕이나 수기(修己)의 내면을 근본으로 삼는 것은 이 근본이 치인(治人)과 생재(生財)의 말단까지 관철하여야 한다는 전체성 속에서 주장된 것이다. 여기서 근본주의적 강조가 전체성의 근본을 깨뜨리고 도덕적 가치의 권위 아래에서 현실의 물질생활이 억압되는 이념과 현실의 분열 내지 괴리에 대한 주자학파 안에서의 자기반성이 일어났다.
영 · 정조 시대에 와서 이미 조선사회는 주자학의 단일성을 유지하기에는 국내외의 사상적 상황이 너무 복잡하였다. 청조의 학풍과 서학이 광범위하게 수용되어 외부적 압력이 되었고 주자학파의 학풍은 현실상황과 유리된 체제 속에 응고하여 내부적 약화를 초래하였다. 이 때 현실문제에 대한 해결의 학문적 탐구는 주자학의 이념이나 청조 고증학 내지 현학풍이나 서학의 문물 등 다양한 사상적 배경에서 추구되었고, 이러한 실학파의 입장에서는 정통주자학과 그 학풍의 현상에 대한 조화 · 비판 · 배척 등 다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주자는 이미 근본과 말단을 일관하는 중용의 정신과 서로 배반될 수 없음을 밝혔지만 유형원(柳馨遠) · 이익 · 안정복 등 초기 실학파를 거쳐 실학파의 중기 이후에는 주자학파와 성격을 뚜렷이 구별짓게 되었고 오히려 반주자학적 태도가 실학파의 특징인 것처럼 부각되기도 하였다. 실학파의 중기 및 후기에 속하는 홍대용(洪大容) · 박지원(朴趾源) · 박제가(朴齊家) · 정약용 · 김정희(金正喜) · 최한기(崔漢綺) 등의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여 상당히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실학파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조선조 유학이 보이는 학문적 경향은 도학에 있어서 성리학이나 예학으로 전문화되는 경향과 실학파에 있어서 이념과 현실이 일치를 추구하는 경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전자가 시대사조의 대세로서 학문의 권위화와 귀족화로 나갔다면 후자는 현실과 대중의 관심에서 전자에 대한 비판적 성격을 띠는 대로 나아갔다. (⇒) 종교 (琴章泰)
[참고문헌] 玄相允, 朝鮮儒學史, 1949 / 李相殷, 儒學과 東洋文化, 1979 / 琴章泰, 儒敎와 韓國思想, 1980 / 尹絲淳, 韓國儒學論究, 1980 / 李乙浩, 韓國改新儒學史試論, 1980 / 琴章泰, 韓國儒敎의 再照明, 1982 / 柳承國, 東洋哲學硏究, 1983 / 劉明鍾, 韓國의 陽明學,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