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화 [한] 張炳華

장병화(1912∼1990). 주교, 제2대 마산(馬山) 교구장. 세례명 요셉. 경북 대구(大邱)에서 출생. 1932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 중등과 · 철학과를 거쳐 1938년 신학과를 졸업하고 사제서품을 받았다. 서품 후 경남 문산본당 보좌신부, 1939년 경남 진영본당 주임신부, 1940년 대구 계산동본당 보좌신부, 1942년 경남 충무본당 주임신부, 194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교수, 1949년 대구교구 재정부장 등을 역임했고 1954년 벨기에 루뱅대학에 유학, 사회학을 전공하고 1956년 귀국하여 진해 중앙본당 주임신부로 사목하였으며 1957년 부산교구가 대구교구로부터 분할, 창설되자 부산교구로 입적되어 부산 중앙본당 주임신부로 재직하던 중 1960년 부주교로 임명되었고 이어 1963년 몬시뇰로 승임되었다. 1968년 제2대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되어 이해 10월 7일 로마에서 주교 성성(成聖)되어 현재까지 마산교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현재 마산교구장으로서 마산교구의 사목과 행정을 총괄하는 이외에 주교회의 사목주교위원회의 위원과 평신도사도직 전국단체인 한국가톨릭 간호협회, 한국가톨릭 여성연합회, 한국가톨릭 의사협회 등의 담당주교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 : 장병화 주교는 1990년 8월 3일 선종하여 경남 고성군 이화공원 묘원 내의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현재 마산교구 제4대 교구장은 2002년 11월 11일 착좌한 안명옥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주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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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의 [한] 長白衣 [라] alba [영] alb

사제(司祭)가 미사 때 개두포 위에 입는 발끝까지 내려오는 백색의 긴 옷. 고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의 어깨에서 발등까지 내려오는 소매 없는 평상복에서 유래되었는데, 로마제국 초기에는 넓은 소매를 달아서 입었다. 오늘날과 같은 모양의 장백의가 되기까지 성직자들이 계속 착용해 왔는데 수단을 가리기 위해 길이가 길어졌고 무릎을 꿇을 때 용이하도록 폭이 넓어졌다. 장백의는 허리부분을 띠로 묶어 끌리거나 벌어지지 않게 한다(띠 없이 입을 수 있는 장백의도 있다). 장백의가 평복의 목을 다 덮지 못하면 장백의를 입기 전 개두포를 착용해야 한다. 장백의를 조금 짧게 변형시킨 중백의로 장백의를 대신할 수 있으나 제의(祭衣)를 입게 될 때와 재의 대신 영대를 하게 될 때, 영대와 함께 부제복을 입을 때는 대신 할 수 없다. 장백의는 사제가 미사성제 때 가져야할 육신과 영혼의 결백을 상징한다. 사제는 장백의를 입을 때 다음과 같이 기도할 수 있다. “주여, 나를 결백하게 씻으시어 내 마음을 조찰케 하시고 고양(羔羊)의 피로 결백하게 되어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또한 장백의는 고대 교회의 영세자들이 영혼의 결백을 표현하기 위하여 성 토요일부터 부활절 다음 주일(사백주일)까지 1주일 동안 입었다. 현재는 사제 외에 성채분배권자도 예식 중에 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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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발 [한] 張勃

장발(1901∼2001). 서양화가, 한국의 성화(聖畵) 개척자. 세례명 루도비코, 호는 우석(雨石). 인천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질을 보이다가 서울에서 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인 1919년에는 고희동(高羲東)이 지도한 고려화회(高麗畵會)에서 양화의 기초를 공부하였다. 그때 양화가가 될 뜻을 굳혀 1920년에 일본으로 가서 동경 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1921년에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의 내셔널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1년 동안 공부한 다음 컬럼비아 대학 미술과에 입학, 1925년에 졸업하였다. 당초부터 그는 성화를 그릴 목적으로 있었다.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그린 <김대건 신부>[유화 반신상, 천주교 서울 대교구 소장]는 현존하는 그의 가장 초기의 성화이다. 그 후 그는 서신을 통해 독일 뮌헨의 그리스도 미술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그 협회의 기관지인 <그리스도교 미술>(Die christiche kunst)을 구독하여 독일의 엄격한 보이론파(Beuron)의 성미술 정신에 감화를 받았다.

1925년 7월에 로마의 바티칸에서 거행된 79명의 한국 순교자 첫 시복식 전에 형제인 장면(張勉)과 더불어 치명복자(致命福者) 친족대표로 미국에서 직행하여 참석하고 서울로 돌아온 후 명동성당의 대작인 <14종도상(宗徒像)>을 위촉받고 그렸다. 같은 시기에 주위의 요청으로 <복녀 김 골룸바와 아녜스 자매>(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소장)도 그렸다.

그 수법은 전형적인 보이론풍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 널리 알려져 있는 1928∼1929년 무렵 제작한 <복자 김대건 신부상>(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은 다분히 인상파적인 밝은 색채와 한결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그려졌는데, 이는 프랑스 나빌파(Nabis) 화가 드니(M. Denis)의 종교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 후 장발은 여러 성당에서 거듭 성화 제작 의뢰를 받았다. 그때의 작품 중 신의주성당 벽화 <성령강림>(聖靈降臨, 1928), 평안북도 비현(批峴)성당의 <예수 성심상(聖心像)>(1935), 서울 가르멜 수녀원의 제단화 <성모영보(聖母領報)>(1945)는 그의 대표적인 역작이었으나 광복 후의 국토분단과 북한지역의 공산화 및 6.25 전쟁의 참화 때문에 <성모영보>만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앞에 든 성화 외에도 평양 서포(西浦)의 성모(聖母)수녀회의 <복녀 골룸바와 아녜스 치명>(1940년 무렵)과 서울 가르멜 성당의 <성모대관>(1945) 제작사실이 있으나 역시 기록뿐이다. 다만 1941년에 그린 매우 자유로운 필치의 소품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하나가 가르멜 수녀원에 보존돼 있다.

광복 후, 장발은 서울대학교 미술과 창설을 주도하고 1961년까지 초대 미술대학장을 역임하는 한편 국전(國展)심사위원, 한국미술가협회 회장을 지냈고, 1954년에는 대한민국 예술회원이 되었다. 1961년 장면 정권의 이탈리아 특명 전권대사로 임명되었으나 5.16혁명으로 부임을 못한 채 해임되고, 다음해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 세인트 빈센트 대학 명예 교수를 지냈다. 1976년에는 미국에서 그린 추상화 작품들을 서울에 보내 전시를 가졌다. 1984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 가톨릭미술 특별전에 출품했고, 1925년의 김대건 신부를 위시한 역사적 한국 순교자 시성식에 로마 시복식 참례 생존자로서 직접 참석하였다. 여러 공로로 서울특별시 문화상(1949년), 예술원상(미술공로상, 1958년), 대한민국 문화훈장(금관, 1984년)을 받았다.

[참고문헌] 張勃, 朝鮮カトリツク藝術, カトリツク大辭典, 東京 富士房, 1940 / 世界文藝大辭典, 上·下, 成文閣, 1975 / 李龜烈, 韓國가톨릭美術 2백년의 궤적, 季刊美術, 29호, 1984.

[참고 : 장발은 2001년 5월 10일부터 뉴욕 한국 문화원 갤러리에서 열리는 100수 기념 전시회를 한 달여 앞둔 4월 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100번째 생일을 지내고 선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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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한] 張勉

장면(1899∼1966). 정치가, 교육자. 본관은 인동(仁同), 호(號)는 운석(雲石), 세례명은 요한. 서울 적선동에서 구한말(舊韓末) 부산 세관장을 지낸 장기빈(張箕彬)의 아들로 출생, 1917년 수원고등농림학교(水原高等農林學校)를 졸업하고 1919년 도미(渡美), 1925년 맨하턴 가톨릭대학 문과(文科)를 졸업한 후,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 79위 복자 시복식에 한국평신도대표로 참석하고 귀국, 평양교구에서 교회일을 보며 메리놀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1931년 동성상업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1933년 정지용(鄭芝溶), 이동구(李東九), 한기근(韓基根) 신부 등과 <가톨릭청년>을 창간하였고 1936년부터 1945년까지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인재 양성에 전력하였다. 8.15광복 후 정계(政界)에 투신, 민주의원의원(民主議院議員), 과도정부 입법위원을 거쳐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이해 제3차 파리 유엔총회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하여 신생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받아내고, 대통령 특사로 교황청을 방문한 뒤, 미국 맨하턴 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9년 초대 주미 한국대사로 부임, 1950년 영국 포덤(Fordham)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6.25동란이 일어나자 기민한 외교적 수완으로 유엔의 참전을 얻어냈다. 1951년 국무총리로 임명되었고 교황청으로부터 교회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기사훈장을 수여 받았다. 1952년 국무총리직을 사임하고 야당의 지도자로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 1955년 신익희(申翼熙) 등과 민주당(民主黨)을 조직하여 1956년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1957년 미국 시튼홀(Seton Hall) 대학에서 다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고, 1959년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에 피선, 이듬해 조병옥(趙炳玉)과 러닝메이트로 입후보했으나 낙선되었다가 4.19혁명으로 자유당 독재정권이 무너지자 제5대 민의원(民議員)을 거쳐 내각책임제의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집권 9개월 만에 5.16군사쿠테타로 실각, 그 뒤 5.16군사정권에 의해 정치활동을 금지당하고 한 때 이주당(二主黨)사건으로 투옥되었으나 석방된 뒤 종교생활에 전념하였다. 이미 청년시절부터 프란치스코 제3회에 입회하여 정회원(正會員)으로 활동한 것은 물론 정치 일선에서도 많은 정치가와 지식인들을 전교 입교케 하였는데 5.16군사쿠테타 이후는 소속본당인 혜화동본당의 평의회회장, 운영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아 보며 교리를 가르쳤다. 1966년 6월 4일 지병인 간염으로 사망, 국민장으로 포천 교회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로는 ≪영한교회용어집≫(英韓敎會用語集, The Summary of Religious Terms, 1929), ≪구도자의 길≫(1930), ≪교부들의 신앙≫(譯書, 1944), ≪현대성녀 젬마갈가니≫(1953), ≪나는 왜 고통을 받아야 하나≫(1953), ≪나는 왜 고통을 받아야 하나≫(1962), ≪성 원선시오≫(1964) 등과 회고록 ≪한 알의 밀이 썩지 않고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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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림절 [한] 將臨節 [관련] 대림절

대림절의 옛말. ⇒ 대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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