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망즈(Demange) 주교의 한국명. ⇒ 드망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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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selmus(1033∼1109). 성인. 북부이탈리아 태생의 그리스도교 사상가. 그는 어머니를 여읜 뒤, 프랑스 각지를 편력하다가 당시의 석학인 랑프랑(Lanfranc, 1005~1089)이 부원장 겸 교사로 있는 베크 수도원에 들어가 철학 · 신학을 공부하고, 1060년 수도사, 1063년 부원장을 거쳐, 1078년에 원장이 되어, 철학적 신학적인 활동이 풍성한 가운데 많은 저작의 완성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1093년 잉글랜드 왕 윌리엄 2세에게 발탁되어 원하는 바도 아니었던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받고 나서부터는 정치에 휘말려 갖가지 사건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는 로마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성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개혁이념을 받들어 교회의 자유와 권리증진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 때문에 윌리엄 2세로부터 1097년 추방되었다. 1100년 왕의 사망으로 뒤를 이은 헨리 1세의 초빙을 받고 다시 캔터베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평신도에 의한 성직자의 임직 즉 서임권(敍任權) 문제에 대해 왕과의 의견 대립으로 다시 추방을 당해 로마에 망명, 1106년 왕의 양보로 협정이 성립되어 또 캔터베리로 돌아와 교회와 국가 사이에 ‘정교조약’(政敎條約, concordat)의 체결을 보았다. 그 이후 왕의 신임이 두터운 가운데 그는 영국에 되돌아온 지 4년 만에 타계하였다.
안셀모의 철학상의 입장은 아우구스티노의 “믿기 위해서 알고자 함이 아니고, 알기 위하여 믿는다”는 매우 주의주의적(主意主義的)인 명제로써 신앙이 앎의 전제라 하여, 신앙의 우위를 주장하면서도, 신앙자가 이성에 의하여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즉 ‘마음 속에서 터득하는 것’(intus legere)을 강조하였다. 그는 경건한 마음으로 진리 또는 실재(實在)를 다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하여 조용히 바라보는 사변(思辨)에 근거를 두고서, 정리신학(定理神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상세히 단독으로 취급하여, 뒷날 이 방면의 노작의 출현을 자극시켰다는 점에서 그가 신학발전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신앙은 지성을 바란다”(Fides quaerens intellectum)는 것은, ‘화해를 바라는 신앙’의 입장이며, 신앙의 사실이나 원리를 논리에 의해 해명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으며, 그의 관념과 이론에서 나온 수많은 해석 · 공식 · 분류 · 정의 · 개념구별 등의 용어가 비록 그의 창시는 아닐지라도, 오늘날까지 신학상의 관용어가 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의 주요저서를 보면, 성서의 의거하지 않고 이성만으로 신을 논한 ≪모놀로기온≫(Monologion, 1076),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되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신의 정의에서 출발하여, 그러한 신의 비존재(非存在)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데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유명한 본체론적(本體論的)인 증명이 전개되는 ≪프로슬로기온≫(Proslogion, 1077), 이밖에 ≪진리론≫(眞理論, De veritate, 1080~1085), ≪왜 신은 인간이 되었는가≫(Cur Deus Homo, 1098), ≪악마의 타락에 관하여≫(De casu diaboli),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 ≪성삼위일체의 신앙에 대하여≫(De fide trinitatis), ≪말씀의 강생에 관하여≫(De incarnatione), ≪성모 잉태에 관하여≫(De conceptu virginali et peccato originali), ≪예지(豫知), 예정(豫定) 및 신의 은총과 자유의지와의 일치에 대하여≫(De concordia praescientiae et praedestinationis nec non gratiae Dei cum libero arbitrio)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은 제자인 라옹의 안셀모(Anselmus de Laon, 1050~1117)를 중심으로 하는 일단을 비롯하여 상 빅토르학파, 13세기의 프란치스코회학파 등이며, 이 밖에도 아벨라르(Pierre Abelard, 1077~1142) 같은 사람이 부분적으로 그의 흐름을 수용하였다.
[참고문헌] Aguirre, S. Anselmi theologia v.3, Salamanca 1679~1685 / J. Fischer, Die Erkenntnislehre Anselmus von C., 1911 / F. Baeumker, Die Lehre Anselmus von C. uber den Willen und seine Wahlfreiheit, 1912 / J. Slipyi, De principio spirationis in S.S. Trinitate, Lemberg 1926 / K. Fina, Anselm von Havelberg: Untersuchungen zur Kirchen- und Geistesgeschichte des 12. Jahrhunderts, AnalPraem 32, 1956 / L.F. Barmann, Reform Ideology in the Dialogi of Anselm of Haverberg, ChHist 30, 1961.
캔터베리 대주교 성 안셀모(Anselmus, 1033~1109)에 의한 하느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유명한 방법. 하느님의 업적에서 추론(推論)하는 귀납적 논법(a posteriori)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개념에서 출발하는 연역적 논법(a priori)에 의한 하느님의 존재의 증명법이다. 안셀모는,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우매한 자(시편 14:13)에게 반론하기 위해서 이 논법을 사용하였다. 그 논법은 다음과 같다. 즉 우리들은, 하느님은 매우 위대한 분이며, 그보다 더 위대한 존재를 생각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 정의는 하느님은 믿는 자의 마음 속에만 존재한다고 말하는 무신론자들에 의해서도 인정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 위대한 존재를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존재가 마음속에만 존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이상으로 위대한 존재가, 즉 같은 것이 마음밖에, 다시 말해서 현실로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마음속과 현실의 쌍방에 존재한다. 안셀모의 논법은 플라톤의 현실적 형이상학에 입각하고 있어서, 여러 세기에 걸쳐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안수를 받는 사람에게 특별한 권리와 능력 및 자격을 수여하는 상징. 옛날부터 손은 축복을 이끄는 신체부위로 일반인들에게서도 존중되었다. 구약 성서에는 장자권 상속(창세 48:14), 육체의 건강기원(1사무 17:21), 직권의 양도(민수 27:18-23), 죄의 이전(레위 8:9, 16:21)에 안수가 행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신약성서에서도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성령수여(聖靈授與, 사도 8:17, 19:6), 직위수여(사도 6:6, 1디모 4:14, 5:22), 병자치유(사도 28:8), 축복(마태 19:13)에 안수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교회에서는 세례지원자에게 악마를 내쫓을 때, 사죄를 할 때, 병자성서, 견진성사, 신품성사에서 안수를 한다. 또 사람(수사, 수녀, 수도원장)이나 사물(세례용 성수, 미사용 빵과 포도주)의 축복에도 안수를 한다. 그러나 안수는 직위와 권능의 수여와 직위계승의 의미가 강하다. 물론 스콜라학자들은 서품에 있어서 ‘용구(用具)의 수여’(Porrectio instrumentorum)를 중시하였지만,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은 안수가 서품식에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1947년 교황 비오 12세는 안수를 서품의 유일한 질료(質料)라고 교황령(Sacramentum Ordinis)에서 밝혔다. (⇒) 견진성사, 신품성사
Ansgarius(801∼865). 성인. 대주교. 축일은 2월 3일. 이름은 Anscharius, Anschar, Ansgar라고도 쓴다. ‘북유럽의 사도’ 서프랑크 왕국(현재는 프랑스)의 코르비 부근에서 태어나 독일 브레멘에서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 모친을 여의고 수도원에 수용, 13세 때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였다. 827년 루드비히 경건왕의 명을 받아 덴마크에 선교하러 갔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829년에 귀국하였다. 그 해에 스웨덴에서 선교사 파견요청이 있자 스웨덴에 진출, 8개월간 선교하면서 최초의 교회를 세웠다. 루드비히의 귀국명령을 받고 돌아와 831년 코베이(Corvey)의 대수도원장, 이듬해 교황 그레고리오 4세에 의해 함부르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곳에서 덴마크 및 스웨덴과 루드비히 사이의 조정에 힘썼고, 교회와 수도원 건설에 노력하였다. 847년 루드비히에 의해 브레멘 대주교로 등용되자 다시 북유럽 선교활동을 지휘하였다. 그가 별세한 뒤 스칸디나비아 제국은 다시 완전히 이교화 하고 말았다. 교황 니콜라오 1세(재위 : 858~867)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