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교 [한] 安息敎

일주일 중 제7일인 토요일(sabbath)은 하느님이 정하신 거룩한 날(출애 20:8-10)이므로 이날을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파의 총칭으로 ‘제7일 침례파'(Seventh-day Baptists)와 ‘제7일 예수재림파'(Seventh-day Adventists)가 대표적이다.

① 제7일 침례파 : 침례교의 한 분파로 1639년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월리엄즈(Roger Williams)에 의해 창립되었다. 그는 본래 칼빈주의적 신학으로 침례교회에서 탈퇴하여 독자적인 교회의 건설을 시도하여 1671년 로드아일랜드의 뉴포트에서 최초의 제7일 침례파 교회를 세웠다. 이 파의 사람들은 교회가 세속화되는 원인을 교회가 안식일을 함부로 변경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여 유대의 안식일, 즉 금요일 일몰로부터 토요일 일몰까지 휴식을 하며 예배일로 지킨다. 이 파는 미국 외에 독일에도 전파되어 있다.

② 제7일 예수재림파 : 1845년경 미국인 밀러(William Miller)가 창립한 재림파 교회 중 가장 유력한 분파로 프레스톤(R. Preston) 부인, 베이트스(Joseph Bates)가 처음으로 제7일 예수재림파 교회를 세웠지만 화이트부부(James & Ellen White)의 지도로 1853년 이후 급속히 발전하였다. 1860년 교회의 이름이 ‘제7일 예수재림파’로 불리기 시작하였고, 1863년 총회를 개최하여 외국전도로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현재 이 파는 미국 외에도 남아메리카, 유럽, 중앙아메리카, 아프리카, 남아시아, 동아시아, 오세아니아 등지에 분구(分區, division)가 있다.

이들은 삼위일체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믿지만 영혼불멸과 지옥 등은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 왕국설, 성인 세례와 침례, 안식일 엄수 등을 주요 교리로 한다.

제7일 예수재림파는 1904년 우리나라에 들어와 평안남도를 중심으로 전교하다가 그 후 서울에 본부를 설치하였다. 현재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에 본주를 두고 있으며, 삼육대학 등의 교육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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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 [한] 安息日 [라] Sabbatum [히] Sabbat

이스라엘 민족이 한 주간 날들 가운데 야훼에게 전적으로 바치기로 정한 날로 주일의 제7일(토요일)이다. 유태인들은 이 날을 거룩하게 보내기 위하여 전혀 일을 하지 않았으며(출애 20:10) 두 번씩 제사를 드리고(민수 28:9-10) 예배를 위한 특별한 모임을 가졌다(레위 23:2-3). 이 날의 유래로는 두 가지 전승이 있는데, 태초에 하느님이 6일 동안 창조사업을 마치시고 제7일에는 쉬셨다는 것(출애 20:11, 31:17)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는 것과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로부터 해방된 것(신명 5:15)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는 것이 있다. 어쨌든 이 날이 지켜진 것은 인간, 특히 노예와 가축의 휴식(신명 5:14)과 신에게의 예배(출애 31:13-17)를 위해서였다. 구약에 의하면 이 날에 노동을 금지하는 법은 매우 엄격하여 마카베오 시대의 신심이 깊은 유태인들은 이 날 전쟁을 치르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였다1마카 2:32-38). 신약시대에는 병자를 치료하고(마태 12:10) 밀이삭을 잘라먹는 것까지도 금지하였다(마태 12:1-2). 그리스도는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지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쳤기 때문에 바리사이인에게 커다란 반감을 샀다(마르 2:27). 원시 그리스도 교도들은 주로 일곱째 날인 토요일에 안식과 기도를 하였지만 그리스도가 부활한 날과 성신이 강림한 날이 주일의 첫날이었기 때문에 곧 일요일을 주일로 지켰다. 현대에까지 제7 재림교회와 몇몇 기독교 교파를 제외한 대부분의 그리스도 교도들은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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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본당 [한] 安岳本堂

황해도 안악군 안악면 비석리(黃海道 安岳郡 安岳面 碑石里)에 위치한 이 본당은 1936년 매화동(玫花洞)본당에서 분리되어 본당으로 승격하였다.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의 안악은 황해도에서의 항일 독립운동의 중심지로서 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하였다. 신천(信川)사람 안중근(安重根, 토마스)의 종제(從弟) 안명근(安明根, 야고보)이 의병자금 모금차 안악에 들어왔다가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데라우찌(寺丙正毅) 총독 암살 음모사건으로 일경에 의해 날조된 이른바 ‘안악 105인사건’에 관련, 안명근 이하 많은 사람이 검거 되었는데, 안명근을 비롯한 주동인물들은 모두 천주교 신자였다.

안악읍에는 1899년 매화동본당의 우도(Oudot, 吳保祿, 바오로) 신부에 의해 처음으로 공소가 설치되었었다. 1936년 본당 승격과 함께 초대 양덕환(梁德煥, 안드레아) 신부가 부임, 이듬해에는 황해도 감목대리 김명제(金命濟, 베드로) 신부의 도움과 여러 교우들의 성금으로 일자형(一字形)의 한식 성당과 사제관(2층 양옥)이 신축되었다. 8.15광복 이듬해인 1946년 2대 김경민(金景旻, 루도비코) 신부가 부임,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던 날 새벽에 김 신부는 공산당국에 검거되어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해주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유엔군 북진으로 북괴당국이 후퇴할 때 살해된 것으로 추측됨).

유엔군이 북진하던 그 해 10월 북괴당국의 눈을 피해 은신 중이던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사창(社倉)본당의 김충무(金忠務, 글레멘스) 신부가 월남 도중에 안악본당에 들러서 마지막 목자역할을 대행하다가 그 해 12월 5일경에 서울 피난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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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 [한] 安益泰

安益泰(1905∼1965). 작곡가. 지휘자. 첼리스트. 세례명은 리카르도. 평양(平壤) 출생.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를 수료하고 도일(渡日), 일본 구니다찌음악학교(國立音樂學校)에서 첼로를 전공한 뒤 1930년 다시 도미(渡美), 필라델피아 커티스음악학교와 신시내티음악학교에서 첼로와 작곡을 공부하였다. 1936년 유럽으로 건너가 1937년 빈(Wien)에서 리히아르트 슈트라우스(R. Strauss)에게 사사, 이 때 영국민요 ‘Auld lang syne’의 곡조에 맞추어 불려졌던 애국가를 새로 작곡하였다. 1939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립음악학교에 입학, 공부를 마친 후 각국을 순회하며 교향악단을 지휘하였다. 1945년 영세, 입교하고 스페인 여인 타라베라와 결혼한 뒤 스페인에 정착, 마드리드 마요르카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가 되어 그 뒤 사망하기까지 세계 각국의 200여 교향악단을 지휘,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1957년 귀국하여 <강천성악>(降天聲樂), <한국환상곡>(韓國幻想曲) 등을 지휘했고,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매년 귀국하여 서울에서 국제음악제를 개최하는 한편, 1958년에는 유럽순방 중인 노기남(盧基南) 주교를 스페인으로 초청, 한국 교회의 재정적 후원을 돕기도 하였다. 평소 음악을 신(하느님)의 영감(靈感)을 인간에게 전하는 ‘신의 메시지’라고 말하고 자신의 소명(召命)이 바로 그 메시지의 전달자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음악적 계보는 후기 낭만파에 속하고 베토벤, 브람스, 드보르작, 리히아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즐겨 지휘하였다. 1965년 7월 런던에서 뉴필하모니 교향악단의 초청지휘자로 자신의 최후작품인 <애(哀)! 강상(江上)의 의기(義妓) 논개(論介)>를 연주하고 그해 9월 17일 스페인 바로셀로나병원에서 사망하였다. 1957년 정부로부터 문화포상을 받았고 1965년 문화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으며 1977년 7월에는 유해가 스페인으로부터 동작동 국립묘지에 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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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복 [한] 安鼎福 [관련] 천학고

安鼎福(1712∼1791). 조선 정조(正祖) 때의 학자. 충청도 제천(堤川) 출신으로 본관은 황주(黃州). 자(字)는 백순(百順). 호(號)는 순암(順庵). 호조참판(戶曹參判) 극(極)의 아들로 태어나, 이익(李瀷)에게 사사하였다. 일찍이 관직에 나아가 목천현감(木川縣監),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등 헌직에서 선정을 베풀어 광성군에 봉해졌다. 한편 학자로서 이황(李滉)을 사숙하고 이용후생의 실학을 일으켜 ≪열조통기≫(列朝通紀), ≪가례집해≫(家禮集解), ≪순암집≫(順庵集), ≪동사강목≫(東史綱目), ≪성호사설유편≫(星湖僿說類編) 등 많은 편저를 남기었다.

그는 천주교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어서 1785년 을사년(乙巳年)의 옥사를 일으켰다는 혐의를 받을 정도였다. 사실 그는 을사년에 ≪천학고≫(天學考)와 ≪천학문답≫(天學問答)을 저술하였는데, 그 저술동기는 젊은 사람들로 재기가 있는 자들이 근자에 천학(天學)이란 사학을 창도하기 시작한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므로 이를 바로잡기 위함이라고 하여 리치(Matteo Ricci, 李瑪寶)의 ≪천주실의≫(天主實義), 마이야(De Mailla, 馮秉正) 신부의 ≪성세추요≫(盛世芻-) 등 조선에 전래된 천주교서적들에 대해 비판을 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1784년에는 권철신(權哲身)에게 서신을 보내어 서학을 하는 무리가 공의 친구가 아니면 제자인데, 어찌 이를 보고 금하지 않고 같이 좇아가고 있는가 하고 문책하는 동시, 그로 인해 자초할 패가망신을 경고하였다. 또한 1786년에는 당시의 재상 채제공(蔡濟恭)에게 서신을 보내어, 척사(斥邪)에 대한 그의 미온적인 태도를 꾸짖으며, 서학을 배척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여, 그의 적극적인 천주교 배척의 입장을 나타냈다. (⇒) 천학고

[참고문헌] 崔奭祐, 韓國天主敎會의 歷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 正祖實錄 / 韓國人名大事典, 新久文化社,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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