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온 [영] aeon [그] aion

그리스어 aion은 히브리어 성서의 olam을 번역한 말로 계속적인 긴 시간, 즉 영원을 의미한다. 그노시스파에서는 플라톤의 이데아설(說)과 신화학의 영향을 받아 이 낱말을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인 플레로마(pleroma)를 형성하는 것으로, 이것을 신에게서 유출된 것이라고 본다[플레로마는 눈에 보이는 세계인 케노마(Kenoma)와는 구별된다]. 그래서 그노시스파는 신의 속성을 설명할 때 종종 이 말을 사용하고, 또 어떤 때에는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데에도 사용하는 등 그들 사이에서도 엄밀한 규정없이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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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와 [라] Eva [관련] 하와

⇒ 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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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노미우스주의 [한] ∼主義 [영] Eunomianism

미시아(Mysia)의 치지쿠스(Cyzicus)에 살던 후기 아리우스파의 지도자 에우노미우스(Eunomius, ?~395) 주교가 제창한 이단설(異端說). 스승 아에시오스(Aetios, ?~370?)를 따라서 정통파의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同質)설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반(半)아리우스파의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 同質)설과 중간파의 호모이오스(homoios, 相以)설을 모두 반대, 초기 아리우스파 이상으로 성부(聖父)와 그 아들의 불상사(不相似, anomoios[athomoios])를 주장하였다. 따라서 아노모이오스설(說)이라고도 칭한다. 결코 태어나지도 않았고, 다른 것으로부터 유래하지도 않은 하느님으로부터 출발, 오리제네스의 영원한 생탄을 배척하고, 성부와 성자의 본질적인 불상사를 강조하였다.

하느님의 본질(ousia)의 면과 힘(energeia)의 면을 구별하는데 그 특색이 있다. 하느님은 그 본질의 면에서는 자기분여(自己分與)나 작위(作爲)를 모두 행하지 않지만, 힘의 면에서는 의지(意志)에 의해 이것을 행한다. 창조가 바로 그것이며, 만물은 무(無)에서 창조되었다. 그 최초의 피조자(被造者)가 아들, 로고스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지에 의해 무에서 만들어진 아버지의 힘의 상(像)이다. 이 아들에 의해 만물은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에우노미우스가 하느님에 있어서의 절대무한의 본질과 상대유한의 의지를 구별했기 때문에 니사의 그레고리오에 의해 마니교(敎)와 유사한 것이라고 배척당하였다. 그의 저서는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칙령 및 정통파의 공격으로 인해 불태워졌으며, 그 사상은 점차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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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데스 [라] Eudes, Jean

Eudes, Jean(1601∼1680). 성인. 프랑스의 설교가. 사제. 영신작가. 축일 8월 19일. 노르망디(Normandy)의 리(Ri)에서 출생, 독실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카앵(Caen)의 예수회 대학에서 교육받았다. 1623년 오라토리오회회원, 1625년 서품, 1639년 카앵 지부의 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627년과 1631년, 페스트가 유행했을 때 교구 신자들을 위해 영웅적인 봉사를 하였다. 1633년 교구 설교가로 활동을 개시, 특출한 재능으로 많은 명성을 얻었으며 선교단체를 건립하는데 주력하였다. 타락한 여인들을 돌보기 위해 1641년 ‘애덕의 성모 마리아회’(Order of Our Lady of Charity)를 창설, 성모 성심께 봉헌했고, 1644년에는 카앵의 방문회(Visitatio B.M.V.) 수녀원에 위임하였다. 교구 사제로서 영신적 발전에 큰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오랜 숙고 끝에 1643년 오라토리오회에서 물러나, 신학교 건립을 위한 사제들의 모임인 ‘예수 · 마리아회’(Congregation of Jesus and Mary)를 창설, 예수 성심과 성모성심께 봉헌하였다. 그는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코크(St. Margaret Mary Alacoque)와 함께 예수성심 신심의 개척자 역할을 하였다. 예수성심 신심에 대한 신학적 기초를 세우려고 노력했고, 축일의 전례문들을 작성, 1648년 성모성심을 공경하는 축일을 ‘예수 · 마리아회’에 소개하여 지키게 하는 등 성모성심 신심도 전파시켰다. 영신 작가로서 그는 쉬운 교리에 근거한 실제적인 묵상서, 신심서,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에 관한 신학적 저서 등을 저술했는데, ≪La Vie et le Royaume de Jesus≫(예수의 생애와 왕국, 1637), ≪Le Coeur admirable de la Mere de Dieu≫(하느님 모친이신 성모의 공경하올 성심, 1681)이 특히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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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세비오 [라] Eusebius

① 체사레아의~(E. Caesariensis, 260?~339). 최초의 그리스도 교회사가. ‘교회사의 아버지’로 불린다. 팔레스티나 태생. 스승인 팜필로스(Pamphilos)를 통해 오리제네스(Origenes)의 계보 학통(學統)을 이어 오리제네스가 수집한 카이자리아의 그리스도교 도서관에서 학구의 일생을 보냈다. 로마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 284~305)의 대박해 때까지는 카이자리아의 장로로 있다가, 후에 주교로 취임하였다(313년). 그의 신학적 경향이 오리제네스적인 종속론(從屬論) 계통을 계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리우스 논쟁 때는 아리우스의 입장에 동정하였다. 니체아회의에서는 ‘호모우시오스 신경(信經)’에 일단 서명했지만, 그 후의 논쟁 발전에서는 아타나시오파(派)에 반대입장을 취하며, 항상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 : 306~337)의 통일정책을 받아 들였다. 대박해에 종지부를 찍은 대제의 출현은 그로서는 대망의 ‘구원의 시기’가 도래한 것으로 생각되어 대제에게 여러 번 송사(頌詞)를 바쳤고, 대제의 사후에는 ≪콘스탄티누스전≫(Vita Constantini)을 저술하였다. 이 전기에는 대제가 경건한 신앙자로 묘사되어 있어서, 후세의 학자간에서 여러 가지 평가가 나오기도 하였다.

이 ≪콘스탄티누스전≫이나 송사에서 그는 대제의 제국을 하느님의 지배의 지상(地上)에 있어서의 모상(模像)으로 생각하고, 황제는 하느님의 대리인, 하느님의 모상, 하느님이 선택한 사람이란 황제이념을 창조하였다. 이 이념이 바탕이 되어 황제를 교회의 수장(首長)으로 보는 동방교회의 전통이 생겼고, 1917년의 혁명 때까지 러시아에 존속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콘스탄티누스에 관해서는 그밖에 ≪콘스탄티누스 치정 30년 기념연설≫(335)이 대표작이다.

그의 저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서(歷史書)로, 아브라함의 탄생(기원전 2015년?)에서 303년까지를 연표(年表)로 만든 ≪연대기≫(年代記)는 중세 역사기술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303년부터 재삼 증보되어 325년에 10권으로 완성한 ≪교회사≫는 그리스도교 승리의 역사를 기록함으로써 호교적(護敎的)인 목적을 추구하려고 한 것이며, 수많은 귀중한 문서 · 저서 발췌를 수록, 고대교회사를 아는 데 없어선 안되는 사료(史料)의 보고(寶庫)이다. ≪교회사≫의 부록(附錄)에서 후에 확대 독립된 ≪팔레스티나 순교자전≫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의 실제를 아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호교적인 2대 저술로는, 이교도를 대상으로 한 ≪복음의 준비≫(Praeparatio evangelica, 15권), 유태인을 대상으로 한 ≪복음의 증명≫(Demonstration evangelica, 20권)이며, 이 두 개의 저서에는 고전 그리스의 사상가들로부터 방대한 인용이 있어, 그의 박학을 증명해 준다. 그밖에 성서석의(聖書釋義)도 많이 썼지만, 오늘날 잔존한 것은 적다.

그의 사상은 본질적으로 오리제네스적, 중용적이다. 정통파인 호모우시오스를 배척하는 동시에 아리우스주의도 배척한다. 그는 또한 아타나시오(Athanasius)의 교설을 ‘사벨리우스주의’라고 비난하였다.

[참고문헌] M. Weis, Die Stellung des Eusebius im arianischen Streit, Freiburg 1920 / J. Stevenson, Studies in Eusebius, Cambridge 1929.

② 베르첼리의~(E. Vercellensis, 283/~371). 성인. 축일은 8월 2일. 주교. 수도원 창건자. 반(反)아리우스주의자. 사르디니아에서 태어나 이탈리아 베르첼리(Vercelli)에서 별세하였다. 교황 율리오 1세(재위 : 337~352) 밑에 성직자로 있다가 344년경 베르첼리의 초대주교로 임명, 수도원을 세우고 많은 성직자들과 공동신앙생활에 들어갔다. 그는 서방에서의 수도원 생활의 도입자로 일컬어진다. 아리우스 문제 해결을 위해 교황 리베리오의 사절의 한 사람으로 로마황제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가서 교회회의 개최를 요청하였다. 355년의 밀라노 교회회의에서는 성 아타나시오(Athanasius)를 비난하는 선언에 서명을 거부하고 팔레스티나로 추방되었다가, 콘스탄티우스 2세가 죽고 율리아누스 황제가 즉위하자 귀국이 허용되었다. 362년 성 아타나시오와 함께 알렉산드리아 교회회의를 주최, 비타협적인 주교들 사이를

화해시키는 결의사항에 찬동하였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프와티에(Poitiers)의 주교 힐라리오(Hilarius)와 협동으로 아리우스주의자들에 대항하였다. 그는 추방당했을 때의 고난 때문에 순교자로 숭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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