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라] Antonius [관련] 수도생활

① 은수자(A. Eremita, 250~365). 성인. 아빠스. 축일 1월 17일. 수도자의 아버지. 최초의 은수자(隱修者). 이집트 코무스(Comus)에서 태어나 20세에 부모를 여의고 복음이 권하는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재산을 처분하고 누이를 그리스도교적 동정녀들에게 맡긴 뒤 처음에는 마을에서 떨어진 빈무덤에서 생활하였고, 그 뒤 차츰 사막 깊숙이 들어가 고행과 금욕의 생활을 하였으며 악마의 유혹도 받았다. 그의 성성(聖性)과 악마를 이기는 능력에 대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자가 늘어나자 이들에게 영성생활, 유혹을 이기는 방법, 성령과 악령을 구별하는 능력 등에 대한 많은 설교를 남겼다. 은둔지를 떠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아리우스(Arius)의 이단과도 싸웠으나 105년의 생애를 주로 은수생활과 형제들에게 수도생활을 가르치기 위한 여행에 바쳤다.

사후 1년 만에 성 아타나시오(St. Athanasius)가 쓴 안토니오의 전기(傳記)는 ≪Vita Antonii≫는 뒤에 안티오키아의 주교 에바그리오(Evagrius, 345~399)에 의해서 라틴어로 번역되어 로마제국에 널리 퍼졌으며 서방교회의 수도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전기에서 그는 이상적인 수도사로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후세에 나온 성인전과 문학 및 회화예술에도 반영되어 있다. (⇒) 수도생활

② 파두아의∼(A. de Padua, 1195∼1231). 성인. 프란치스코회 사제. 교회학자. 축일은 6월 13일. 포르투갈의 귀족 출신으로 궁정 후원 하에 있는 자신의 아우구스티노 참사회(慘事會)의 수도정신에 실망, 모로코에서의 순교의 열망 속에 산 안토니오(San Antonio)의 프란치스코회에 가입하여 자원해서 모로코로 출발하였으나 병으로 곧 귀국하였다. 서품에 즈음하여 설교가로서의 소명을 자각하고 북부 이탈리아의 이단에 대하여(1222~1224, 1227~1230년), 남부 프랑스의 알비파에 대하여(1224년) 설교하였으며, 1231년에는 파두아에서 매일 연설하였다. 1223년 성 프란치스코(St. Francis of Assisi)에 의해 프란치스코 신학교의 첫 신학교수로 임명되었으며 성 아우구스티노의 신학을 그곳에 소개하였다. 그러나 정열적인 활동은 병약한 그의 육체를 크게 해쳐서 36세의 나이로 영면하였다. 1232년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비오 12세는 ‘Doctor evangelicus’라는 칭호와 함께 교회박사로 선포하였다. 그는 영육적 필요에 대한 사랑의 사도로서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아 주는 이, 연인과 결혼과 임신부, 그리고 광부의 주보성인이다. 파두아에서는 그에 대한 숭배가 성 안토니오 축일에 절정에 오르는데 사람들은 그의 통공을 비는 뜻에서 ‘성 안토니오의 빵’을 그의 이름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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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회 [한] ∼會 [라] Antoniani [영] Antonians

이집트의 성인 안토니오(St. Antonius, 251~356)의 이름을 회명(會名)으로 하는 수도회의 총칭으로 대체로 다음과 같은 수도회들이 있다. ① 안토니오의 직계 제자들이 모여 수도생활을 하던 수도회로 현재의 마론파 교회는 자신들이 그들의 후계라고 주장한다. ② 1095년 가스톤 드 도핀(Gaston de Dauphine)에서 창립되어 프랑스 대혁명으로 폐쇄될 때까지 존속한 수도회로 성 안토니오 병원 수사회라고도 불렸다. ③ 17세기 아르메니아 교회에서 창립된 수도회. ④ 시나이산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 소속 수도회. ⑤ 1965년 플랑더스 지방에서 창립된 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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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그리스도 [라] antichristus [관련] 가그리스도

⇒ 가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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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키아교회 [한] ∼敎會 [라] Ecclesia Antiochiae

로라제국 제3의 도시였던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시작된 그리스도 공동체. 4세기경에는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제3의 총대주교좌가 되었다. 스테파노 순교 이후 예루살렘에서 축출된 헬레니스트가 주축이 되어 세웠으며 베드로 사도가 초대 주교라고 전승되어 있다. 여기서 신자들은 최초로 ‘그리스도인’으로 불렀다(사도 11:26). 이 곳 교회는 사도 바울로의 반유대정책을 강력히 지지하였으며 기원 후 70년경 예루살렘이 파괴되자 대(對) 동방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2세기 초까지 성 이냐시오(St. Ignatius) 주교 밑에서 순탄한 발전을 이룩한 교회는 총대주교좌가 되면서 4세기말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으나 그 뒤 콘스탄티노플의 영향권이 증대되고 예루살렘이 총대주교좌로 승격되자 그 중요성은 떨어지고 이후로는 네스토리아니즘 이단과 그리스도 단성설(單性說)로 진통을 겪었다. ㅣ1954년 동방 대이교(東方大離敎) 때는 콘스탄티노플을 지지하였다. 십자군 원정 때 라틴총대주교가 임명되었으나 14세기부터는 유명무실해졌다. 현재는 정교회의 총대주교가 시리아 최대의 도시 다마스커스에 주재하고 있다. 원래의 안티오키아에는 현재 터키의 소도시가 있을 뿐이며 1931년부터 1939년까지 미국 · 프랑스 탐사반에 의한 발굴작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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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키아전례 [한] ∼典禮 [영] Antiochene rite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사용하는 전례양식, 순수한 안티오키아식 전례는 미사에 주기도문과 성인 호칭기도가 빠져 있었는데 그 후 예루살렘에서 전래된 야곱전례의 영향을 받아 첨가되었다. 이것이 곧 시리아 서부지역의 전례양식이 되었다. 그리스어로는 연 2회만이 집전되고, 대개의 경우 시리아어로 집전된다. 이 전례를 사용하는 교회로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야곱파 교회, 시리아의 가톨릭 교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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