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원봉본당(三元洞本堂)의 이명(異名). ⇒ 삼원봉본당
영언여작 [한] 靈言蠡勺
이탈리아 출신의 중국 선교사였던 삼비아시(Francis Sambiasi, 畢方濟, 1582~1649)가 구술한 것을 중국인 학자 서광계(徐光啓)가 받아 쓴 책으로 천주학의 입장에서 ‘아니마’(anima, 亞尼瑪), 즉 영혼에 관하여 논한 철학서이다. 상하 2권으로 1624년 상해에서 출간되었고, 후에 ≪천학초함≫ 총서에 다시 인쇄하여 포함시켰다.
≪영언여작≫은 영혼의 존재와 존엄성, 그리고 그의 기능과 우월성에 대해서 이를 4장으로 나누어 논하고 있다. 삼비아시는 우선 그의 서문에서 아니마를 영혼 또는 영성(靈性)으로 번역한다고 하면서, 아니마의 학(學)은 철학에 있어서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존귀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알아라”는 뜻의 인기(認己)라는 글은, 모든 학문의 근원이며, 누구나가 힘써야 할 일인데, 여기서 말하는 자신을 안다는 것은 먼저 나의 아니마의 존엄성과 그 기능을 터득하는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인용하여, 아니마의 학은 육체를 치료하는 의사도 배워야 하며, 더구나 마음의 병을 고치는 사람으로서는 더욱 이를 배워야 할 것이라고 그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영언여작≫ 제1장은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아니마는 본래 자재(自在)하는 것이어서 생혼(生魂)이나 각혼(覺魂)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고 하였다. 즉 생혼과 각혼은 질(質)로부터 생겨난 것인 만큼, 모두가 그 체(體)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그 체가 없어지면 생혼가 각혼도 따라서 없어지지만 영혼은 사람에 있어서 질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니며 그 체에 의거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이 죽어도 멸하지 않고, 본래가 자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즉 영혼의 불멸설이다. 이어 제2장에서는 영혼의 기능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아니마는 생(生)과 각(覺)과 영(靈)의 세 가지 기능을 구비하고 있다고 하였다. 제3장은 아니마의 존엄성에 대해 언급하였고, 제4장에서는 영혼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영언여작≫은 신후담(愼後聃)이 그의 저서 ≪서학변≫(西學辯)에서 그 내용을 각 편에 따라 하나하나 비판한 것으로 보아, 그리고 권철신(權哲身)이 그의 아우 권일신(權日身)과 더불어 이 책을 보고, 처음엔 허황하여 믿을 것이 못 된다고 배격하였으나, 후에는 흠숭주재(欽崇主宰)의 설, 생혼 · 각혼 · 영혼의 설과 화기수토(火氣水土)의 설에 타당성이 있어 믿기 시작하였다고 말한 점으로 보아, 우리나라에는 1624년에서 1724년 사이에 전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L. Pfister, Notices Biographiques et Bibliographiques, Chang-Hai 1932 / 韓國天主敎會史 論文選集, 第1輯, 한국교회사연구소, 1976.
영웅적덕행 [한] 英雄的德行 [영] heroic virtue
일상수준을 초월한 방법으로 실천한 덕행으로, 이를 마지못해 수행한 것이 아니라 장기간에 걸쳐 기쁜 마음으로 수행할 때 이를 영웅적 덕행이라 한다. 시성(諡聖)의 제1조건으로 요구되는 영웅적 덕행을 실천하는 자는 시복이나 시성되기 전까지 가경자(可敬者, Venerable)로 선언되고, 하느님의 종(Servant of God)이라고 불린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한] 永遠∼聖母修女會 [영] Sisters of our Lady of perpetual Help
1932년 6월 27일 당시 평양교구장 모리스(J.E. Morris, 睦) 몬시뇰에 의해 평양 상수구리(上水口里)에 창설된 방인(邦人)수녀회. 수녀양성을 위촉받은 영유읍(永柔邑)에 있던 메리놀(Maryknoll)회 수녀들은 1931년 상수구리에 기와집 2채를 매입하고 1932년 3월에는 교황청으로부터 설립인가와 회칙인준을 받았다. 1940년에는 평양 관후리(館後里), 대신리(大新里), 서포(西浦), 평안북도 비현(枇峴), 신의주(新義州), 마전동(麻田洞)본당에서 활동할 수 있는 만큼 성장하였다. 1941년 12월 2차 세계대전으로 사태가 악화됨에 따라 장정온(張貞溫) 수녀가 초대 원장수녀로 임명되어 메리놀수녀회와 완전히 분리 독립되었다. 1945년 광복은 되었으나 1950년 5월 14일 공산당원들로부터 수녀원 건물이 점령당하자 수녀들은 귀가하게 되었고 이로써 평양에서의 수녀원생활은 끝이 났다. 1950년 12월 부산(釜山) 메리놀수녀들과 함께 메리놀병원, 군부대 세탁일을 하면서도 피난민과 고아들을 돌보았는데 이것이 현재 성모보육원이다. 1955년 4월 본원을 서울 흑석동(黑石洞)으로 이전하고 그 옆에 성 마리아 의원을 개원하였다. 1959년 10월에는 당시 춘천교구장 퀸란(Thomas Quinlan, 具仁蘭) 주교의 주선으로 수련소를 춘천으로 이전하였다가 1966년 11월 현재 서울 정릉에 신축된 본원 건물로 1969년 2월 이전하였다. 1964년부터는 서독으로 회원을 파견함과 아울러 1971년 8월에는 부인들로 구성된 성모자매회를 발족하였다. 1980년에는 경기도 용인군에 소화의원(小花醫院)을 개설하여 영세민을 위한 진료를 시작하였다. 1980년에는 서울교구장으로부터 새로운 회헌 인준을 받았다. 현재 정릉에 있는 본원고 수련원을 비롯하여 국내외 60여 개의 분원에서 선교와 특수사목에 봉사하고 총원장 이영자(李英子, 글로리아) 수녀를 중심으로 286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1972년 7월에 시작된 가톨릭 성서모임도 대단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영유본당 [한] 永柔本堂
1902년 평남 평원군 영유읍 이화리(平南 平原郡 永柔邑 梨花里)에 창설되어 1950년 폐쇄된 평양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 파트리시오. 영유지역은 1895년 영세 입교한 이 고장 출신의 한학자(漢學者) 조상순(趙象淳, 노르베르토)에 의해 전교된 후, 1897년 섶가지[薪枝里]본당 관할 공소로 개설되었고, 이어 1902년 군청소재지인 영유가 전교요충지로 선정되어 섶가지본당이 폐쇄되고 그 후신으로 창설되었다. 초대 주임신부로 섶가지본당 주임이던 망(Meng, 明) 신부가 부임, 교세신장에 주력하는 한편 1908년 영청(永淸)학교를 개설했고 1911년 보댕(Bodin, 邊) 신부가 2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1916년까지 사목하였다. 그 후 1919년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신부가 부임하여 각종 신심단체를 조직했고 1923년 메리놀회가 진출하여 1924년부터 메리놀회 신부들이 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기 시작하면서 교세가 급격히 신장, 본당 내에 시약소, 양로원, 고아원, 기술하교 등이 개설되었다. 또한 1925년 이 지역 최초의 고딕식 연와조성당이 건축되고 이듬해 메리놀수녀회 한국지부가 본당 내에 설치되어 동(同)회의 수녀들이 본당사무 일부와 부속사업을 전담하게 되었고, 1926년 순천 · 마산본당, 1930년 안주본당, 1931년 숙천본당 등을 분할 독립시켰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평양교구 내의 모든 메리놀회 성직자들이 일경(日警)에게 체포 구금되자 영유본당은 한 때 마산본당 관할 공소로 격하되었으나 평양교구가 방인교구로 재정비되어 1942년 10월부터 신부들이 부임하면서 다시 본당으로 재출발하게 되었고, 1945년 2월에는 메리놀수녀회의 사업을 계승하여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영유분원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광복 후 북한공산정권의 교회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1949년 12월 10일 주임신부이던 홍도근(洪道根, 요한) 신부가 체포되고, 이어 1950년 6월 25일 성당을 비롯한 사제관 · 양로원 · 수녀원 등 모든 부속건물이 몰수됨으로써 본당도 폐쇄되었다.
본당 내의 신심단체로는 가톨릭청년회, 명도회, 안나회, 가톨릭소년단, 예수성심연맹, 가톨릭운동연맹지회 및 분회, 소화데레사회, 성모회 등이 있었고, 부속사업체로는 영청학교, 1927년 개설된 여자기예학교(女子技藝學校), 1926년 개설된 시약소와 고아원, 1931년 개설된 양로원 등이 있었으며, 관할공소로는 평남 평원군과 대동군(大同郡) 일대의 송림(松林), 추흥(楸興), 금학(金鶴), 남양(南陽) 등이 있었다. 그리고 1937년의 교세는 신부 2명, 수녀 4명, 총교우수 1,500명, 공소수 12개소, 주일학교 10개소 등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