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주교 윤시제우서 [한] 張主敎輪示諸友書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지도서(指導書). 조선 교구 4대 교구장에 의해 1857년 8월 2일자로 반포된 이 교서(敎書)는 그 해 3월 25일 다블뤼(Daveluy, 安敦伊) 보좌주교의 성성식(成聖式)을 이용하여 소집한 3일간에 걸친 최초의 성직자회의 결과를 정리한 것이데, 윤서(輪書)의 형식으로 수신인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모든 신자로 되어 있다. 당시는 교회 내에 인쇄시설이 없었으므로 교서를 회람형식으로 전달하여 이를 베껴 두게 하였으므로 윤시라고 하였다. 이 서한은 교우들의 행동지침, 도리, 칠성사(七聖事), 성영회(聖嬰會) 규칙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적으로 엄격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혼인에 있어서 자녀의 의사를 존중할 것, 과부의 재혼을 권고하는 등, 당시의 전근대적인 봉건사회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용단이었다. 또한 고아나 기아(棄兒)를 거두어 양육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성영회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 서한은 간행된 적은 없으나, 그 뒤 한국교회지도서에 부분적으로 수록되었고, 많은 필사본이 오늘날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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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온 [한] 張貞溫

장정온(1906∼1950?). 수녀.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초대 원장. 세례명 마리아. 수도명 앙네다. 경기도 인천 화수동에서 장기빈(張箕彬)과 황루시아의 3남 4녀 중 2녀로 출생하였다. 1922년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도미(渡美)하여 메리놀회 수녀회에 입회, 1925년 4월 30일 첫 서원을 한 후 귀국했고 귀국 후 평북 의주본당에서 전교수녀로 활동하다가 1931년 다시 일본 성심(聖心)여대에 유학, 1935년 동(同)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교육담당 수녀로 활동하였다. 1938년 동 수녀회가 교황청으로부터 정식인가를 받자 수련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평양교구 내 모든 메리놀회 신부와 수녀들이 일제(日帝)에 체포되어 이듬해 6월 강제 추방되자 오셰아(O’Shea) 주교에 의해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원장으로 임명되어 일제말기의 가중되는 종교탄압 속에서도 회지 를 창간하는 등, 수녀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광복 후 이북에 수립된 공산정권에 장면(張勉) 박사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많은 탄압을 받았고 1950년 6.25동란 중 평남 대동군 송림리 공소(영유본당 관할)에 피신해 있다가 이해 10월 4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행방불명되었다.

[참고문헌]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50년사,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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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연본당 [한] 長淵本堂

소재지는 황해도 장연군 장연읍 서리(黃海道 長淵郡 長淵邑 西里). 장연본당의 전신은 1898년에 창설된 장연군 낙도면(樂道面)의 두섭[道習洞]본당이다. 본당이 설치되기 전에 두섭 공소는 장연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공소의 하나로, 천주교 박해시대에 제4대 서울교구장 베르뇌(Simeon Berneux, 張敬一, 1854∼1866) 주교가 황해 · 평안도 지방에 전교여행을 다닐 때 이곳에도 들러 교우들에게 성사를 준 바 있었다. 1880년에는 뮈텔(Augustin Mutel, 閔德孝, 후에 제8대 서울교구장) 신부와 리우빌(Anatolius Liouville, 柳) 신부가 만주 요동(遼東)에서 뱃길로 장연군 대동만(大同灣) 태탄(苔灘)에 상륙, 리우빌 신부는 극락(極樂)공소로 가고, 뮈텔 신부는 백천(白川)의 돌다리 공소를 거쳐 서울로 잠입, 피신하였었다.

1898년 두섭공소가 본당으로 승격되고, 경상도에서 전교하던 파이아스(Camillus Pailhasse, 河敬朝) 신부가 초대 본당 사제로 부임하였다. 관할지역은 장연 · 송화(松禾) · 은율(殷栗) · 문화(文化) · 해주(海州) 등지였고, 당시의 교세는 489명이었다. 부임 후 파이아스 신부는 두메산골인 두섭을 떠나 장연읍내로 본당을 옮겼다. 1901년 2대 김문옥(金紋玉,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11년간 본당 사제로 봉직하였다. 김 신부는 한일합방(1910년)을 전후하여 교육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이 고조될 때 장연읍에 경애학교(敬愛學校)를 설립, 관내의 각 교우촌에도 학교 설립을 권장 후원한 결과 두섭공소에 정심학교(淨心學校), 장방골[長芳洞]공소에 장흥학교(長興學校), 문화에 월산학교(月山學校)가 설립되었다.

1911년 김문옥 신부는 경북 김천(金泉)본당으로 전임, 그곳에서 사목하던 김성학(金聖學, 알렉시오) 신부가 3대 본당 사제로 부임하여 한옥 성당을 신축하였다. 1916년 4대 김명제(金命濟, 베드로) 신부가 17년간 봉직하는 동안 장연본당은 황해도 굴지의 교회로 성장하게 되었다. 1921년 김 신부와 유지 신자들은 황해도 내 교회학교 교사와 전교회장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해우양성회(海友養成會)를 결성, 교우소년들에게 중학정도의 교육을 받도록 성공적으로 도왔다. 한편, 1917년에 진출해 온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들을 중심으로 하여 경애학교를 6년제 인가를 받게 하여(1925년), 사제 지망생을 다수 양성 · 배출하게 함으로써 일종의 예비 신학교로서의 기능을 훌륭히 수행케 하였다. 본당에서는 경애학교 유지를 위해 송화군(松禾郡)의 황무지를 개간했고, 청년신자들은 상조회(相助會)를 조직, 자선사업도 전개하였다. 김명제 신부는 그밖에 많은 건축사업을 전개하는 한편 대규모의 양잠사업과 과수원 경영을 하여 주민들의 소득 증대에도 기여하였다. 1931년 한국 공의회 참석차 내한한 주일(駐日) 교황사절 무니(Mooney) 대주교가 전국 주요 본당 순방 중 장연본당을 시찰한 바 있었다.

1933년 5월 5일 이종순(李鍾順, 요셉) 신부가 강원도 평강(平康)에서 부임해 온 후 가톨릭 여자청년회가 발족, 문맹퇴치사업으로 야학을 운영하였다. 1934년에는 황해도에서 처음으로 성체거동행사가 장연에서 거행될 때 도내 성직자 15명과 수천 명의 신자가 참여하였다. 1935년 6대 이선용(李善用, 바오로) 신부가 부임, 1937년의 본당 총교세는 1,866명이었다. 7대 박우철(朴遇哲, 바오로) 신부는 1941년부터 1년간 봉직한 후 전임되고, 1942년 8대 강주회(姜周熙, 방그라시오) 신부가 부임, 일제 말기와 8.15광복 후 공산치하의 어려움 속에서 교회를 이끌어 나갔다. 북한 공산정권은 과수원을 비롯한 수만평의 교회토지를 몰수, 경애학교도 접수했고, 6.25전쟁이 발발하자 공산군 모(某)부대에서 장연본당을 지휘부 건물로 징발하였다. 그 해 10월 백령도(白翎島)근방의 공산군 후퇴부대가 장연을 통과할 때 강 신부의 부친 강재규(베네딕토), 모친 이 아녜스, 누이동생 강 마르티나를 총살하고, 성당, 사제관, 수녀원에 불을 지르고 도주하였다. 그 동안 어느 과수원에 은신하고 있던 강 신부는 그 해 12월 유엔군 후퇴 때 매제(妹弟) 김원식(金元植, 마티아) 외 여러 교우들과 함께 구사일생으로 월남하였다.

[참고문헌] 黃海道天主敎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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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미사 [한] 莊嚴∼ [라] Missa sollemnis [영] solemn Mass [관련] 미사

사제가 부제(副祭)와 복사(服事)를 거느리고 특별한 음악과 함께 향을 피우며 장엄하게 거행하는 미사. 초기 교회의 주교 공동 미사에 기원을 두며 중세의 로마 예식서에서 발견된다. 전례 개정 전에는 부제와 차부제(次副祭)가 사제를 도왔다. 수세기 동안 사제를 보조하는 부제와 차부제의 수가 변해 왔는데 각각 한 사람만으로도 가능하다는 최초의 명백한 증거는 10세기경에 보여진다. 장엄미사란 용어는 사제들이 시종하는 교황이나 주교의 미사에도 적용된다. 공동 집전이 시행됨에 따라 장엄미사의 상당한 부분을 흡수하여 대체되었다. (⇒)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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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약슬 [한] 張若瑟 [관련] 베르모렐

베르모렐(Vermorel) 신부의 한국명. ⇒ 베르모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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