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학 [독] Hermeneutik [한] 解釋學 [영] hermeneutics

정신과학의 대상이나 역사적 현상을 학문적으로 이해하는 방법과 이론을 다루는 학문을 말한다.

고대 그리스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성행한 문헌학의 방법이었는데 르네상스시대에 이르러 고대문서의 해석기술로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그 뒤 실라이에르마허(F.E.D Schleiermacher)에 의해 ‘이해의 기술론’(技術論)이라 불렀고, 그의 제자 벡(Augut Boeckh)은 해석학을 “문서에 정착되어 있는 삶의 표현을 이해하는 기술론”이라 정의하고, 문자로 표현된 문서나 문학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주어진 모든 인간정신 산물을 체험의 표현으로 보아, 해석학은 삶과 세계를 해석하고, 인간의 모든 것을 해석하는 것을 의미하는 학문으로 확대시켰다. 그에 의하면, 인간정신의 산물은 하나하나가 모두 개성이 강한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 체험에는 근본적으로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표현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보편타당한 해석의 방법 및 규칙, 논리의 학문으로서 해석학을 제창하고 그것을 정신과학과 역사학의 기초적 방법으로 채택하였다. 딜타이의 영향을 받은 하이데거는 그의 존재론을 현존재(現存在)에 속하는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해석학이라고 규정하였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변증법을 신학에 도입, ≪로마서강해(講解)≫(Der Romerbrief)를 내놓아 성서해석의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했고, 딜타이와 하이데거의 영향을 받은 불트만은 성서의 내용과 형식을 분리하여 고대의 세계관의 껍질을 뒤집어 쓴 신화적 표현방식을 벗겨 내고 복음이 주는 내용, 즉 중심 메시지를 읽어야 한다는 비신화화론(非神話化論)을 주장하였다. 그는 이어서 기록으로서의 역사와 사건으로서의 역사를 구별하고 기록만으로는 역사의 주체와의 관계가 별로 없고, 사건으로 일어나야 비로소 현실성과 의미를 지닌다고 하였다. 해석학은 이제 언어의 학으로 나아가고 있다. 하나의 단어나 문장이 지닌 의미에 대한 해석의 차원을 넘어 그것이 어떤 사회의 배경에서 표현되고, 표현될 수밖에 없었던가의 문제를 해석학은 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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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사핵사보 [한] 海西査覈使報

서울대학교 규장각(奎章閣) 도서목록 17146호. 1900년부터 1903년 사이에 황해도 해서지방, 즉 해주(海州), 신천(信川), 재령(載寧), 안악(安岳), 장연(長淵), 봉산(鳳山), 황주(黃州), 서흥(瑞興) 등 여러 곳에서 천주교인과 주민, 교회와 관청 사이에 일어난 여러 충돌사건의 진상을 조사한 사핵사(査覈使) 이응익(李應翼)의 보고서이다.

황해도 지방에 천주교가 전파된 것은 삼남(三南)지방에 비해 훨씬 늦었고,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 때에 이르러서야 신자수가 늘기 시작하여 1866년 병인(丙寅)박해 때에는 25명의 순교자를 배출하기까지 하였다. 그 뒤 개항(開港)이 되면서부터 신앙의 자유가 어느 정도 허용되자 황해도 지방의 천주교세도 점차 신장되었는데 특히 1897년부터는 영세자의 수가 부쩍 늘어났다. 그러므로 이같이 급작스러운 교세확장은 자연 토착사회와의 마찰을 빚게 되었고, 교회와 관청, 그리고 이 지방에 새로 전파된 개신교들과도 상호 갈등이 생겨나 여러 가지 충돌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충돌사건은 천주교 선교사들이 신도들을 대변하게 됨에 따라 비단 국내 문제에만 그치지 않고 프랑스 공사관이 개입하는 외교문제로까지 확대되어 갔다. 이에 정부에서는 이런 사건들의 해결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1903년 이응익을 사핵사로 임명하여 그 진상을 조사케 하였다. 이응익은 그 해 2월 3일 해주에 도착하여 서흥군수 유석응(柳錫應) 등 현지 지방관과 함께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신문을 시작하여, 4월 20일에 종결짓고 이 보고서를 작성하여 의정부(議政附)에 제출하였다.

모두 320면 단권으로 된 이 자료는, 사핵관 이응익과 지방관리들이 조사과정에서 이른바 천주교도들에게 피해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하급관리나 주민들 중심으로 하여 증거를 채택하였기 때문에 공정을 잃은 일방적인 조사였다는 비난을 받아 교회측에서 이를 승복치 않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참고문헌] 宋順姬, 海西敎案硏究, 1978년도 高麗大學校 碩士學位論文 / 黃海道天主敎會史,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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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교안 [한] 海西敎案

1902년 정점으로 이를 전후하여 황해도 지방에서 천주교회와 관청 사이에서 빚어진 일련의 충돌 사건을 말한다. 교안은 이미 1886년, 즉 한불조약(韓佛條約)이 체결된 직후부터 발생하였다. 한불조약은 프랑스 선교사에게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으나 선교의 대상인 한국인에게는 아직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고 또한 선교사들에게 개항지(開港地)에서의 정착은 인정하였으나 기타 지방에서의 정착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미 지방에 정착해 있던 선교사들이 적지 않았고 뿐더러 본당의 증설로 인해 선교사의 지방진출이 잦아졌으므로 자연 지방관리와의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다. 교안이 주로 지방에서 발생하게 된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한국인에게도 종교자유가 인정된 것은 1899년의 교민조약(敎民條約)에서 비롯되었고, 선교사에게 지방에서 정착할 권리가 인정된 것은 1904년의 선교조약(宣敎條約)에서 시작되었다. 비록 교민조약에서 한국인의 종교자유가 인정되었을지라도 아직 이에 대한 계몽과 이해가 부족하였고, 특히 유교적 대중사회 속에 깊이 뿌리박은 척사정신(斥邪精神)과 양이(攘夷)에 대한 적대감정으로 말미암아 그 후에도 교안은 그치지 않았을 뿐더러 1901년에는 제주교난(濟州敎難)과 같은 최대의 교안마저 낳게 함으로써 교민조약을 지방적으로 재확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교민조약의 채결 이후에도 일부 지방관리들이 반천주교적 행동을 계속한 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었으니 즉 첫째는 중앙정부의 행정문란과 둘째는 그들의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은폐 또는 정당화하려 한 때문이었다. 행정의 문란과 가렴주구에 몹시 시달려오던 백성들은 이에 대항하고자 천주교에 입교함으로써 교회에서 그 의지처를 구하려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로 인해 개종률이 갑자기 높아지게 되었는데, 황해도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였다. 물론 지방관장들은 외국인 선교사 앞에서 신자들에 대한 불의한 행위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회만 있고 구실만 있으면 그들의 부정행위를 가로막는 선교사와 신자들을 괴롭히고 복수하려 하였다.

황해도는 1896년 빌렘(Wilhelm, 洪錫九) 신부가 파견됨으로써 선교사가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빌렘 신부는 안악(安岳)의 매화동(玫化洞)에 최초의 본당을 설립한 후 이어 신천(信川)의 청계동(淸溪洞)에 제2의 본당을 세웠다. 그가 청계동으로 간 것은 안중근(安重根)의 아버지 안태훈(安泰勳)의 요청 때문이었다. 그의 개종동기는 종교적인 것보다는 세속적인 요소가 많았다. 어쨌든 그는 천주교로의 개종을 결심하고 빌렘 신부를 청계동으로 초청하여 일가친척과 주민들을 모두 천주교로 입교시켰다. 미구에 황해도는 전국에서 가장 높은 개종률을 기록하면서 선교사가 속속 파견되고 신자수가 급증하였다. 처음에 600명에 불과하던 신자수가 1902년 벌써 7,000명이 되었고, 본당수도 8개, 따라서 선교사수도 8명으로 증가되었다. 한편, 지방관장들은 일찍부터 천주교로의 개종운동을 저지하기 시작하였다. 관찰부(觀察府)에서는 1897년 교도단속훈령(敎徒團束訓令)을 통해 소위 ‘근자에 천주교도들에 의한 각종 행패가 자심하다’고 하며 신천과 안악 등 각 군에 천주교도 단속을 지시하였다. 이때 안태훈이 개종운동과 관련되어 신천군수에게 체포되었는데 빌렘 신부는 신천군수에게 항의하고 그를 석방시켰다. 이로써 빌렘 신부와 지방관장들과의 마찰이 시작되었다. 다음 빌렘 신부는 해주감사에게 체포된 안태훈의 동생 안태건(安泰健)을 석방시켰다. 1898년에는 안태훈 등 신자 4명이 도둑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자 안악군수를 찾아가 항의하고 석방시켰다.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안의 발생은 더욱 잦아졌다. 먼저 옹진에서 김응호(金應鎬) 등 옹진교우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그들을 구타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빌렘 신부와 김문옥(金紋玉) 신부는 서신으로 또는 직접 군수를 찾아가 항의하였고, 한편 해주관찰사는 옹진군수를 통해, 또 옹진군수는 순검과 보부상들을 통해 도리어 교우들을 죄인으로 다스렸다. 1902년 이용직(李容稙)이 신임 관찰사로 부임하면서 교안을 더욱 확대되었다. 그는 반천주교의 훈령을 자주 선포하고, 천주교인을 해고시키는 등 천주교를 전멸시키려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보부상들과 특히 그 두목인 박정모(朴貞謨)를 이용하였고, 심지어 개신교도들까지 이용하여 천주교를 공격하게 하였다. 박정모는 1902년 6월 황주(黃州)의 한기근(韓基根) 신부댁을 습격하였다. 빌렘 신부가 이에 항의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같은 무렵 재령(載寧)의 신환포(新換浦)와 장연(長淵)에서 처음으로 개신교도들과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신환포에서는 교우들이 새 강당을 짓기 위해 개신교들에게까지 애긍을 강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재령의 르각(Le Gac, 郭一良) 신부는 즉시 금전을 강요하는 일을 중단시켰고, 빌렘 신부는 헌트(Hunt) 목사를 직접 만나 일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려 하였으나 개신교도들의 거부로 좌절되었다. 장연에서는 교우 조병길(趙秉吉)이 김윤오(金允五)에게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김윤오는 향장(鄕長)으로 있으면서 공금을 유출한 때문이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언더우드(Underwood) 목사는 빌렘 신부에게 서신을 통해 항의하였고, 빌렘 신부는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2년 9월에는 은파(銀波)성당의 물건들을 도둑맞은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때 김문옥 신부는 은파성당의 책임자였다. 끝으로 1903년 3월에 재령의 성당문을 파괴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상의 사건들은 소송사건으로 발전하였다. 원고(原告)는 대개가 외교인이나 개신교도들이었다. 물론 천주교인이 원고인 적도 없지 않았으나 관장들의 천주교에 대한 적대심으로 말미암아 입장이 뒤바뀌어 결국 피고가 되고 말았다. 사건은 군에서 관찰부를 거쳐 법부(法部)나 외부(外部)에까지 상소(上訴)되었고, 한편 천주교 측에서도 선교사를 통해 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보고되고 뮈텔 주교는 법국공사에게 보고함으로써 결국 외부대신과 법국공사 사이에서 해결을 모색해야 하는 이른바 교안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에 개신교의 목사와 신도들이 개입됨으로써 사건은 더욱 복잡해지고, 해결도 더욱 어려워지게 되었다. 사건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법국공관 측에서는 교회당국과 협의한 끝에 정부측과 교회측에서 작기 현지로 조사관을 파견하기로 정부에 건의하였고,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이응익(李應翼)을 해서사핵사(海西査覈使)로 파견하였고, 교회측에서는 부주교(副主敎)인 두세(Doucet, 丁加彌) 신부를 조사관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사핵사 이응익과 관찰사 이용직의 천주교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 개신교 선교사들의 개입, 빌렘 신부의 조사불응과 일부 천주교 피고인들의 은닉 등으로 재판을 일방적으로 천주교에 불리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그 결과가 ‘해서사핵사보’(海西査覈使報)로서 정부에 제출되었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빌렘과 르각 신부의 소환과 법국공사를 통한 그들에 대한 재판이 요구되었다. 이에 대해 법국공사는 오히려 사핵사와 관찰사 등을 황해도 사건의 장본인으로 고발하고 황해도사건에 대해 재심을 요구함으로써 외부와 법국공관 사이의 대립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1903년 11월 법국공사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葛林德)가 귀국에 즈음하여 대리공사에게 해서교안을 포함한 그간의 모든 교안에 대한 일괄해결을 지시함으로써 해서교안을 위시한 그간의 모든 교안들이 일괄적으로 타결되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정치적이요, 외교적인 해결이었다. 이에 따라 무엇보다도 빌렘 신부가 황해도 임지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해서교안의 결과 황해도에서의 신자의 감수현상은 신자 중 3부의 1이 배교하였고, 3분의 1은 냉담하였으며, 3분의 1만이 교우로 남아있을 정도로 참담한 것이었다. 해서교안은 한불조약의 미비, 한국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척사양이 정신, 행정의 문란, 지방관리들의 가렴주구, 교파간의 경쟁심, 일부 천주교인들의 불순한 개종동기와 강요된 개종운동, 신자들의 세속사정에 대한 빌렘 신부를 위시한 일부 선교사들의 지나친 관여 등 복잡다단한 요소와 배경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崔奭祐)

[참고문헌] 李元淳, 朝鮮末基社會의 對西敎問題 硏究(敎案을 中心으로 한), 歷史敎育, 15, 歷史敎育硏究會 1973 / 崔鍾庫, 韓國에 있어서 宗敎自由의 法的 保障過程, 敎會史硏究, 3, 韓國敎會史硏究所, 1981 / 黃海道天主敎會史, 韓國敎會史硏究所,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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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절 [한] 解放節 [라] Pascha [영] Passover [관련] 과월제

오순절(춘계 감사절) 및 초막절(추계 감사절)과 함께 의무적인 순례축제. 원래 근동 유목민들이 봄에 어린 짐승을 잡아 제사 지내면서 가축이 번성하기를 빈 축제였는데 근동 유목민에 속한 이스라엘 백성 역시 이집트에서 탈출하기 이전부터 가축 번성 외에 별다른 뜻 없이 이 축제를 지낸 것 같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탈출하고 나서 극적인 민족해방을 기념하는 축제로 변모하였다(출애 12장). 무효절(無酵節)은 누룩 및 누룩을 넣어 만든 빵을 집안에서 없애버리는 명절로서 해방절과는 성격이 다른 축제였으나 예수 시대에는 전자가 후자에 흡수 통합되었다. ⇒ 과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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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 [한] 解放神學 [영] theology of liberation

광의로는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로 인해 발생되는 모든 억압과 수탈로 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신학, 즉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등 제 3세계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해방의 신학들을 총칭하는 말이지만, 협의의 해방신학이란, 라틴아메리카에서 일어난 새로운 신학을 지칭한다. 해방신학의 주된 관심은 사회의 구조 악으로 부터 인간을 해방시킴으로서 하느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데 있다. 이를 위해 해방신학은 선진 자본주의에 종속되어 불이익을 강요당하는 후진국의 탈종속(脫從屬), 후진국 내의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으로부터 탈피, 백인과 유색인종 사이에 존재하는 인종차별의 철폐,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억압과 지배 상태의 해소 등 인간성을 억압하는 구조악(構造惡)으로부터의 해방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다.

해방신학은 현세에서의 해방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에 연결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하느님은 압제받는 자들의 고난을 함께 하며, 고난받는 자들의 해방을 위해 투쟁에 함께 하고 있음을 선언한다. 해방신학이란 개념은 1968년 콜롬비아의 메델린에서 개최된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에서 처음으로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해방신학이 다루는 성서적 제재(題材)는 출애굽, 사막에서의 행진, 예언자들의 목소리, 묵시문학, 예수의 구속사업 등 대단히 다양하다. 이러한 성서적 제재를 가지고 하느님이 인류에게 원하는 바, 그것을 추출해 파악하고, 그것이 라틴아메리카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를 추구하였다. 그래서 해방신학은 전통적인 신학이 언급하지 않던 진보, 변혁, 혁명, 사회운동을 적극 수용하고 나선다. 그러면서 참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투쟁하는 가난한 자, 억눌린 자의 행동에 교회는 동참해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회 · 경제 · 정치 · 문화적인 종속관계를 죄가 구체적으로 현실에 나타나는 형태라고 파악하기 때문이다.

해방신학은 하느님의 구원사업을 현실과 분리시키지 않는다. 항상 타인의 구원만을 문제삼고, 현세에서 죄의 치유가 후세의 영생과 관련된다는 종래의 구원관에서 벗어나 구원이란 저 세상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친교이며, 인간과 인간의 친교라고 파악한다. 그래서 인간과 인간과의 친교를 해치는 불의한 사회 · 경제적 관계를 해소해야 함을 강조하며, 신학이 사회 · 경제적인 시각을 확보할 때 인간구원의 학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해방신학은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들에 의해 논란이 되고 있다. 왜 정치문제에 깊숙이 개입하는가, 계급투쟁을 주장하는가, 폭력을 사용하는가라는 3개의 쟁점이 해방신학을 둘러싼 논의의 대상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해방신학은 이 시대의 두드러진 현상은 압제자와 피 압제자라는 두 개의 적대적인 사회계급으로 분열되어 계급투쟁이 현실적으로 존재함을 인정해야 하고, 이들 싸움에서 하느님은 어느 편에 설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또 폭력사용 문제에 대해서는 압제자들이 기존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제도적 폭력’(institutionalized violence)이 정당화된 상태에서 그에 대항,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서 ‘대응 폭력’(counter violence)은 오히려 ‘정당한 폭력’(justified violence)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교회의 공식 태도와 정통신학은 계급투쟁과 폭력혁명을 정면으로 거부하며, 하느님을 특정 인간들의 편에 세우는 편견을 배척한다. 교회는 해방신학의 의도는 이해하지만 해방신학의 과격하고 일방적인 성서해석과 교의해석을 인정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G. Gutie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성염 역, 해방신학, 1977 / J. Moltmann, Theology of Hope, 정경연 외역, 희망의 신학, 1975 / 염홍철, 종속이론,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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