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한] 人權 [영] human rights [관련] 인권선언

인권은 가톨릭 교회의 사회원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리이다. 가톨릭 교회는 다른 어떠한 종교보다도 인간의 기본적 권리와 인격의 존엄성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고 인권을 수호하고 신장시키기 위한 활동에 정력적으로 헌신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가톨릭 교회가 반드시 언제나 인권수호자의 입장에 서지는 않았다. 때로는 지배자와 결탁함으로써 가난한 자와 버림받은 자의 편에 서기보다는 보잘 것 없는 자에 무관심하거나 인권문제를 외면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가톨릭 교회는 세계 어디에서나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을 수호하고 신장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최근의 교황의 공문서나 메시지를 보면 인권유린을 날카롭게 공격하고 있다. 이러한 인권옹호는 인간의 권리가 하느님에 의하여 부여되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

인권은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었다(창세 1:20-27)는 사실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 우연성 없이 완전무결하게 지력과 의지와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이러한 선물은 개인의 특수한 재능이나 배경이나 사회적 신분과는 관계없이 인간 자체로써 누리는 기본적 권리와 존엄성을 말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양신에 새겨진 도덕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로마 2:15). 양심의 명령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인간의 권리와 자유는 양도할 수 없는 것이다. 하느님의 백성은 이미 유태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노예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아무런 차별없이 동등한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갈라 3:28).

따라서 인간 존엄성을 경시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성을 갖춘 영혼을 가지고 하느님의 모상을 따라 창조되어 같은 본성과 같은 원천을 가졌으며 그리스도께 구원되고 같은 목적에로 함께 불리었으므로 모든 사람의 평등은 더욱 명백한 것이다. 물론 육체적 능력이 다르고 지성적 내지 윤리적 역량이 다르므로 모든 사람이 똑같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 기본권에 관한 모든 차별대우는 그것이 사회적이건 문화적이건 혹은 성별 · 인종 · 피부색 · 지위 · 언어 · 종교 등에 기인한 차별이건 간에 극복되어야 하고 제거되어야 한다. 인간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인간으로서 평등한 존엄성은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

사적이거나 공적이거나를 막론하고 인간의 제도는 인간의 존엄성과 목적에 봉사해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사회적 내지 정치적 노예화를 거슬러 투쟁하고 어떠한 정치체제 하에서도 인간의 기본권을 수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 특히 인간의 지성은 존엄하다. 인간의 지성은 하느님의 지혜로부터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적 본성은 또한 예지로써 완성 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완성되어야 한다. 인간은 오직 자유로서만 선을 지향할 수 있다. 그리고 참된 자유는 인간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모상을 말해 주는 표지(標識)인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의식적 자유선택에 의하여 행동하기를 요구한다. 즉 맹목적 본능이나 외적 강박에 의하지 않고 인격적 · 내적 동기에 의하여 움직이기를 요구한다. 인간이 사욕(邪慾)의 압박에서 자신을 해방시키고 자유로이 선(善)을 선택하여 자기의 목적을 추구할 때 인간의 존엄성은 성립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인격체이며 주체이므로 과학적 영역이건 사회적 정치적 영역이건 인간이 제도와 기구의 객체(客體)가 되는 것은 잘못이다.

비오 11세는 인격으로서의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받은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부정하고 폐지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사회는 인간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이유에서든 인간의 기본권을 빼앗을 수 없다. 인간은 그 자체가 인격이요 자기 자신과 그 행위의 완전한 지배자이며 목적으로서 여러 가지 권리를 가지는 것이다. 권리의 개념은 도덕적 의무보다 더 근본적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피조물 위에 주권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런 도덕적 의무를 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각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 책임과 지위를 가지고 활동할 수 있는 권리를 필요로 한다. 그 이유로서 인간은 자기 권리를 행사하고 자기 의무를 이행하고 또한 수많은 협조의 형식하에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자기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교회는 세계와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육화요 현존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억압받는 사람의 해방을 위해서 선포한 복음은 교회가 인권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잘 가르쳐 준다. 교회는 그 예언자적 사명을 계속 수행함에 있어서 가난한 사람과 억압당하는 사람과 버림받은 사람들의 해방과 권리를 힘차게 선포하고 더욱 효과적으로 현실화시켜야 하며 또 다른 이들과 협력하여 인종이나 종교나 목적의 차별 없이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 의해서 강요되거나 예속된 상태로부터 해방되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최초의 설교는 억압받는 사람들의 해방을 선포한 것이다. 따라서 인권문제에서 가장 강조해야 할 것은 약자의 권리를 수호하는 일이다.

자유는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선물이다. 따라서 인권과 자유를 신장하는 일은 모두 고무되어야 한다. 그러기에 인간의 기본권 또는 인간 영혼의 구원이 요구될 때 교회는 정치질서에 관한 일에 대해서도 윤리적 판단을 내릴 권리가 있다(사목헌장, 76). 오늘날의 현실을 보면 어떠한 통치형태도 인권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더구나 인간의 권리에 대해서 가장 나쁜 결과를 초래하고 있는 가장 중대한 억압형태는 인간을 한낱 생산수단으로 간주하거나 경제적 이득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일이다.

인간의 인격적 자유와 존엄성을 무시하고 인간을 순전히 물질적으로 평가하며 인간을 사회조직의 톱니바퀴로 격하시키는 것은 큰 잘못이다. 그리스도를 본받고 이 세상에서 그분의 공생활을 물려받아 그것을 계속하는 교회는 개인적 차원에서나 집단적 차원에서나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위해 전력하도록 소명을 받고 있다. 인권을 향상시키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 요구이며 인권을 향상시키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 요구이며 인권의 향상은 사목의 핵심이다. 따라서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이 짓밟히고 있을 때 교회는 침묵을 지킬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 교인은 성서의 완전한 계시와 교회의 가르침에 입각하여 인간의 존엄성과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서 선봉적인 증인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비록 한 사람이라도 그가 누구이건 어디에 있건 인권이 무시되고 침해되는 것을 방치할 수 없다. 오늘날 사회의 많은 계층이 살고 있는 지역사회에 정신적 · 물질적 재화를 언급하는 것을 가로막는 구조적 장애들이 있다. 이러한 장애들은 소외 현상을 조장한다. 이러한 사태를 지속케 하는 사람들의 무책임한 태도는 인권의 요구에 상반된다.

한편, 인권이나 인간의 인격과 양심의 존엄성이 불가침의 기본권리라 하더라도 거기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인간사회의 여러 가지 관계가 권리와 의무의 관계로 표현될 때 사함들은 정신적 가치들을 의식하고 진리 · 정의 · 사람 · 자유의 의미와 중요성을 이해하며 또한 자기들이 이와 같이 가치 있는 세계의 일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권리와 의무의 기본적 상호관계는 어떤 권리를 가진 사람이 그 권리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 권리와 분리할 수 없는 의무를 자각할 때 명백히 드러난다. 인간은 자신의 권리에 수반되는 의무를 양심적으로 존중할 때 자기의 권리를 전적으로 존중해 주기를 요구할 수 있다. 절대적으로 불가양도한 권리라 하더라도 그 행사에 있어서는 제한을 받는다. 이 제한이 바로 책임이요 의무인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권리를 과장하고 절대화하는 나머지 타인의 권리를 과소평가하거나 망각하기 쉽다. 따라서 자기의 권리가 소중한 만큼 남의 권리도 소중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여기에 인권의 보편성이 있다. 인권 신장에 있어서 교회의 첫째 임무는 인권에 관한 복음과 평화 및 정의의 메시지를 말과 행동으로 선포하는 일이다. 교회 사목자들의 말은 언제나 그리스도 교인을 격려하며 인권 신장에 헌신케 함으로써 이 어려운 투쟁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원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적 기본원리는 인간의 인격을 일종의 사회적 도구로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으로서 존중하는 것이며 또한 인권이 바로 복음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명시할 때 가장 큰 성과를 거두는 것이다. 교회는 항상 개개인에 대해서나 집단에 대해서나 이웃사람에 관한 복음을 따라 인권을 옹호해야 한다. 왜냐하면 인권운동이 그릇된 가치관에 입각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교회는 교회 밖에서 전개되고 있는 인권 운동을 높이 평가하면서 선의의 사람들과 서로 협력하여야 한다. 인권을 수호하고 신장하기 위한 사목활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전개될 수 있다. 때에 따라 인권을 신장하는 적극적 방법도 있고 인권의 침해를 규탄하는 소극적 방법도 있다. 이렇게 한편으로는 선포하고 한편으로는 규탄하는 두 가지 기능을 각각 별개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고 서로 보충하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의 인권운동은 몇몇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맡겨지고 있는 현상이다. 그래서 정부의 시책에 효과적인 영향을 못 미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함으로써 실효를 거둘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인권 침해의 죄를 범한 사람들로 하여금 인권 침해의 사실을 인식시키고 그 잘못을 깨닫게 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진리를 옹호하고 오류를 규탄하는 사명이 있을 뿐 아니라 현세적이거나 영원한 것이거나 진정한 인간적 가치들을 최선의 완전한 방법으로 보호해야 한다. 특히 명백한 인권 침해의 사례들에 대해 공식적으로 판단을 내리거나 행동을 취하기에 앞서 모든 사실에 관하여 분석하고 객관적인 지식을 얻고 심사숙고한 뒤에 비로소 행동을 취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의 인권존중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누가 어떤 모양으로 교회에 속해 있다고 해서 정당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빼앗길 수는 없다. 교회에 봉사하는 사람들은 그 지위를 막론하고 합당한 생활을 보장받아야 한다. 남에게 정의와 인권을 말하는 자는 먼저 자기의 눈이 정의로워야 한다. 인권을 위한 투쟁에서 영감을 주고 지원하고 선도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교회 스스로 자기반성을 하고 교회조직 안에서 인권이 제대로 존중되고 있는가를 상세히 살펴야 한다.

교회 내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때때로 봉사와 희생을 강요당하며 적절한 보수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인권을 수호하고 신장하는 교회의 사명으로 볼 때 참으로 불합리한 일이므로 시정되어야 한다. 교회는 일반 자연과학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인간학에 대해서 충분한 신뢰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 어떠한 인간학도 인간의 인격을 평가함에 있어서 교회의 인간학에 따라올 수 없다. 인간의 개성, 독창성, 인격적 존엄성, 인간의 기본권에 관해서 뿐만 아니라 인격적 완숙에 대해 교회는 참으로 그 어떠한 학문보다도 앞서고 있다는 것을 자부하면서 인권신장에 앞장서야 한다. (⇒) 인권선언 (韓庸熙)

[참고문헌] 교황청 정의평화위원회, 교회와 인권, 분도출판사, 1976 /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제1부 제1장, 제2장 / 한용희, 가톨릭 정치윤리, 분도출판사, 1980 / J. 마리탱 著, 김창수 譯, 자연법과 인권, 1943 / J. 마리탱 著, 한용희 譯, 인간과 국가, 가톨릭출판사,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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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한] 人間 [라] homo [영] human being

1. 서론 : “인간은 어디서 왔는가? 자연에 대한 인간의 능력과 인간에 대한 자연의 능력의 한계는 어느 정도인가? 우리가 목표로 나아가는 곳은 어디인가? 이런 문제들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새로운 관심을 가지고 나타난다”(헉슬리). 인간에 대한 연구를 인간학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으나 현대에 와서 이 말은 주로 다음 세 가지 의미로 쓰인다. ① 물질적이고 신체적 측면에서 인간을 연구하는 신체적 인간학, ② 인간의 역사적 기원이라는 관점에서 연구하는 민속지리학적 문화적 인간학, ③ 인간의 궁극 원리를 찾는 관점에서 인간을 연구하는 인간학이다. 생물학적 인간학에서는 해부학적 인간학, 생리학적 인간학, 정신적 인간학, 심리학적 인간학, 사회 문화적 인간학 등으로 나누기도 한다. 하느님의 계시에 입각한 신학적 인간학도 인간학의 한 분야이다.

2. 철학적 인간학 : “철학의 모든 근본적 문제들은 결국 인간이 무엇이며, 인간이 전체 존재와 세상과 하느님 안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하는 질문으로 요약할 수 있다”(막스 셀러). 그러나 인간실존(實存)에 관한 연구는 인간을 탐색하는 자 자신이 또한 동시에 대상이 된다는 데서 어려움이 있다. 인간 자신이 인간을 문제로 제기하기 때문에 인간 자신을 객관적으로 떼어 놓고 볼 수 있는 관점이 없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문제는 인간을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답이 내려지고, 인간에 대한 문제는 다양한 관점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해답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 이제까지 학자들이 본 인간을 나열하면, 마르크스의 경제적 인간, 프로이드의 본능적 인간, 키르케고르의 불안한 인간, 블로흐(Bloch)의 유토피아적 인간, 하이데거의 실존의 인간, 리쾨르(Ricoeur)의 오류의 인간, 가다메르(Gadamer)의 해석학적 인간, 마르셀(Marcel)의 문제의 인간, 겔렌(Gehlen)의 문화적 인간, 루크만(Luckmann)의 종교적 인간 등이다.

인간 연구의 근원적 방법을 제시한다면, 현상학적 방법과 초월론적 방법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현상학적 방법에서는 인간 존재와 관련된 모든 소여(所與)들을 수집하고, 초월론적 방법은 이 소여들의 궁극적 의미를 찾고 이 소여들에게 의미를 주고 가능성을 주는 깊은 이유를 찾고자 한다. 경험에서 직접 주어지는 인간 현상들은 먼저 인간이 육체적 존재로서 성장하고 운동하고 감각하는 존재이며, 무엇을 지향하고 원하고 말을 하며, 사고하고 일하며, 문화를 창조하고 여가를 즐기는 인간이다. 그러나 이 많은 현상들 중 어느 하나도 인간을 모두 설명하지 못하며, 인간 자체는 이런 현상들을 차례로 넘어 더 높은 차원의 현상에로 향한다. 인간에게는 자기가 자기로 넘어가는 자아 초월적 현상이 있다. 공간과 시간, 물질과 역사의 한계를 넘어가는 인간의 자아 초월현상은 영원하고 비연장적(非延長的)이고 비물질적인 무한한 영(靈)의 수평을 향한 도약이다. 이러한 인간의 자아 초월형상에서 인간은 육체와는 다른 존재론적 구성 요소인 영혼 혹은 정신, 영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3. 성서학적 인간 ① 구약 : 인간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영과 육의 합성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육체’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구원의 희망은 “육체의 부활이었다”(이사 26:19, 다니 12:2-3, 2마카 7:14 참조). 인간의 육체성은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기초가 된다. 구약의 인간 실존은 다른 인간들과 공존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공존관계는 하느님과 같은 일차적 관계에 기초를 두고 있다. 인간 각자는 하느님의 초월성 앞에 동등하고 똑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도 서로 사랑해야 한다(레위 19:9-18 · 34, 25:35-38). 인간의 공존관계와 의존관계가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성적(性的) 관계에서다.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인간은 남녀 사랑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인간 본성은 곧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이며 정치적이다. 그리고 공존과 의존관계에서 인간은 책임을 가진 존재요,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존재이다. 구약에 의하면 인간은 역시 죄많은 존재이다. 인간은 교만으로 가득차서 하느님의 부르심이나 이웃의 부르짖음에 대해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자들이다. 죄가 세상에 번져가지만(창세 3-11) 주님이 용서해주시는 영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는 존재이다.

② 신약 : 신약에서도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구별 한다든지, 지성과 의지로 구별하는 등 인간에 대한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이해는 없다. 인간 존재란 역사적 실존으로서 제한된 존재요 죄에 물든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회개해야 하는 존재이다. 마음과 정신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타인들과의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우리는 구원에 이른다. 바울로 사도는 인간 실존의 육체적 조건을 강조한다. 인간은 육체(soma)이다. 그러나 죄로 인해 우리는 소외된 세력 즉 하느님께 반항하는 육(sarx)의 지배하에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인간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업과 성령의 능력에 희망을 가진 인간이다. 사도 요한에 의하면 우리가 인간임을 우리 마음과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느님에 의해 즉 은총에 의해 사는 것을 말한다. 죄많은 우리 자신들과 세계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멸망하고 말았겠지만,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로운 생명으로 우리는 살아가게 되었다.

4. 신학적 인간화 : 인간 실존의 문제는 교의신학 문제 중 하나가 아니라 “전체 교의신학의 문제로 봐야 한다”(칼 라너).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하는 신학적 인간학의 ‘관점’은 하느님이 실재(實在)하신 다는 확신이다. 실재적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각자의 의식과 인식과 윤리행위의 원리이시다. 비록 하느님의 현존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은 사람들이나, 인간 실존의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는 사람들이나, 인간 실존의 신적 원리를 명시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느님은 원리가 되신다.

우리 인간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아는 인격들이다. 즉 우리는 인식을 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인식하는 것도 알며, 인식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체로서의 우리 자신을 소유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학이라는 이름이 붙은 여러 가지 학문의 관점에서 인간 실존에 대한 반성을 할 기회를 갖기 전에 있는 현상으로서, 곧 우리가 인간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와 반성을 하기 전에 우리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험적 인식(a priori Knowledge)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인간에 대해 가지는 선험적 인식에는 ‘초자연적 실준’이라는 신앙의 빛을 갖게 된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아는 자아 인식의 원리와 능력으로서 처음부터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인식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인격적 주체로서 또는 인간 존재로서 참으로 의식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인간에겐 선험적인 하느님의 인식이 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 인간은 피조물이고 제한되어 있으며, 금이 간 피조물이긴 하나 하느님의 의해 역사안에 존재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현존(은총)과 접촉하고 있는 인격으로서의 존재이다. 인간 각자에게는 하느님 현존(은총)의 빛으로 인격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알 수 있는 근본적 능력이 있고, 또한 인간 성신을 알 수 있는 근본적 능력이 있고, 또한 인간 성장과 완성의 궁극 대상으로서 하느님을 아는 근본적 능력이 있다. 순수 자연이란 가정적인 것이다. 즉 은총과 분리되어 있는 인간 존재 혹은 하느님에 대한 근본적 능력[중세 스콜라 신학에서 말하는 ‘순종적 가능유’(順從的 可能有, Potentia obedientialis)나, 현대의 초월론적 토마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초자연적 실존’]이 없는 순수 자연의 상태에 있는 인간이란 가정적(hypothetically)으로만 가능하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혹은 역사적으로는 이러한 능력없이 인간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은 은총 안에서 하느님의 자아통교와의 관계없이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신학적 인간학은 그리스도론을 외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아는 것들 중에 많은 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그리스도와는 별도로 우리 인간 자신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가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분을 인간으로 인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학은 그리스도론만을 추종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론과 항상 관계를 가져야 한다.

5. 인간에 대한 교회의 공식 가르침 : ① 하느님은 물질계만이 아니라 정신계를 합친 전체 세계의 창조주이시고, 섭리를 총해 이 세계를 현존시키고 계시다. ②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모두 다 좋은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하느님 창조에서 최고봉에 있다. ③ 인간의 신적 본성은 그 인격이 하느님과 내밀한 관계를 가지는 데서 나오는 것으로, 이것이 인간이 자신 안에 자신을 넘어가는 원리에 의해 실존한다는 인간의 초월적 차원이다. 그래서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다. ④ 그러면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타인에게로 향하고 있는 사회적 실존이다. ⑤ 인간 조건은 역시 분열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 인간은 연약함과 죄에 떨어지고, 스스로가 제한된 피조물이라는 것을 경험한다. 이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불안을 느끼게 한다. ⑥그러면서도 인간은 하느님에 의해 우리 자신과 우리 환경을 지배하도록 불림을 받고 있다. 우리는 은총에 의해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해 그렇게 할 힘을 받고 있다. ⑦ 죽음이란 인간 실존의 끝이 아니다. 생명이란 변하는 것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영광을 받도록 되어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헌장>에서 가르치는 인간은 ①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되었고(이것은 교부들의 사상이다), 하느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지배하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다(12항 창세 1:26, 지혜 2:23, 벤 시라 17:3-10, 시편 8:5-6). ②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외로운 존재로 창조하시지 않으시고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그래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다(12항). ③ “인간은 숭고한 부르심과 심각한 비참을 경험한다”(13항). ④ 그러나 인간은 우리 자신의 육체나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피조물 세계를 경멸하지 못한다. 비록 이들이 고통과 불안의 원천이 될지라도 그렇게 못한다. 인간은 자기들의 내면적 특성 때문에 인간 이외의 피조물을 능가한다. 하느님은 우리 마음 안에 현존하시고, 우리가 거기 계시는 그분을 발견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14항). ⑤ “양심에 충실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결합되어 진리를 추구하고, 그 진리를 따라서 개인생활과 사회생활에서 야기되는 여러 가지 윤리문제들을 해결하게 된다”(16항). ⑥ 맹목적인 내적 충동이나, 단순한 외적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유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 선에로 향할 수 가 있다. 그러나 우리 자유는 죄로 손상되었기에 하느님 은총의 도움으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고, 이에 따라 전체 피조물이 완전 개화하게 된다. ⑦ 죽음에 직면해서 인간 실존의 수수께끼는 매우 명확해진다. 기술이 우리 죽음의 불안을 잠재우지 못한다. 생물학적 생명 연장이란 인간 정신에 부여된 고차원적 생명을 만족 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18항). ⑧ “어떠한 상상(想像)도 죽음 앞에서는 맥없어지지만 하느님의 계시를 들은 교회는 인간이 지상 불행의 한계를 넘어서 행복한 목적을 위하여 하느님께 창조되었음을 가르친다”(18항).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인간 구원자>(1978)라는 회칙에서 구원의 빛에 비추어서 인간 품위와 자유에 대해 긍정적으로 선언하신다. <자비로우신 하느님>(1980) 회칙에서는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인간 상호간의 자비로운 인간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 인간 완성이라고 가르치신다. 또한 <노동하는 인간>(1981)에서 인간은 자기 노동으로 하느님 창조사업에 참여하여 자기완성을 가져온다고 가르친다. (朴石熙)

[참고문헌] M. Baily, Biblical Man and Some Formulae of Christian Teaching, IrTheol Q., 1960 / M.J. Adler, What Man Has Made of Man, New York 1937 / N.A. Luyten, La Condition corporelle de l’homme, Friburg 1957 / R. Guardini, Freedom, Grace and Destiny, tr. J. Murray, New York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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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페토 [라] in petto

‘가슴 속에’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말이며. 교황이 어느 문제에 관하여 일반적인 결정사항을 공포했으나 이를 구체적인 형태로 발표하기 전에 일정기간 마음속에 유보해 두고 있는 상태를 일컫는다. 이 용어는 특히 추기경의 서임에 적용되어 왔는데, 교황이 특정인을 추기경으로 선정할 것을 결정했을 때 그 이름을 마음속에 품은 채 아직 발표하지 않고 추기경의 서임 사실만을 공포한 경우 그는 교황의 마음속에서 추기경으로 선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추기경의 우선 순위권과 관련하여 실익(實益)이 있는 용어이다. 교황이 어떤 이의 이름을 마음속에(in Petto) 품고서 추기경에 서임하였음을 공포한 경우에는, 추기경에 서임된 자는 추기경의 의무와 권리를 갖지 않고 있다가 교황에 의하여 그의 이름이 공포된 뒤에 그 의무와 권리를 가진다. 다만 우선 순위권은 마음속에 이름을 품고 서임 발표한 날부터 따진다(교회법 제351조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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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영 [한] 李喜英

이희영(1756~1801). 순교자. 세례명은 루가. 신유박해 때 순교한 이현(李鉉)의 숙부(叔父). 경기도 여주(驪州) 출신으로 1797년 김건순(金建淳, 요사팟)의 전교로 입교한 뒤 상경(上京), 성화(聖畵), 상본(像本) 등 주로 종교화를 그리며 생활하다가 1801년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이해 5월 10일(음 3월 29일) 김백순(金伯淳)과 함께 서소문밖 형장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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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한] 離婚 [라] divortium [영] divorce [독] Ehescheidung [관련] 결혼

이혼은 ① 별거(別居, a mensa et thoro)에 해당되는 경우와, ② 결합관계로부터의 이탈(離脫, a vinculo) 즉 부부의 유대를 끊어버리는 경우 두 가지의 뜻을 갖고 있다. 첫째 별거의 경우는, 식탁과 침실을 달리하여 서로 한자리에 있지 않는 상태인데, 부부 중 한 쪽이 살아 있는 한, 다른 한 쪽은 재혼할 수 없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이나 법률에 의해 인정되거나 또는 허락되는 것으로서, 부부가 적절한 이유로 말미암아 함께 살 수 없을 때를 말한다. 둘째 이탈의 경우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말하는 결혼의 영구성에 모순되는 경우인데, 이런 의미의 이혼에 있어서는 부부 둘 다 자유롭게 재혼할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별거의 경우에 대하여는, 중대한 이유가 있을 때 교회법도 이를 인정하나, 다만 별거에 있어서는 재혼권을 수반하지 않는 까닭으로, 별거로써 사실상의 이혼으로 보아 넘겨 재혼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간통의 경우에는 종신토록, 그밖의 이유에 있어서는 그 이유가 끝날 때까지 별거를 인정한다. 부부의 유대를 완전히 끊는 이혼의 경우, 결혼 불가해소주의(不可解消主義)의 입장을 취하는 가톨릭 교회나 영국성공회의 교회법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다만 결혼을 무효로 할만한 원인이 있을 때, 그 결혼의 불성립을 인정함에 그칠 뿐이다. 이를테면 가톨릭 교회에서는 세례받지 않은 두 사람이 법적 결혼을 한 뒤 어느 한쪽이 가톨릭 교회에 입교하고 다른 한쪽이 계속하여 하느님의 뜻에 따르지 않은 경우 이혼이 가능하다. 또 세례받은 두 사람의 결혼이 끝났으나 신방에 들지 못하는 완료되지 못한 상태가 계속될 때 이혼이 가능하나 그 절차는 매우 까다롭고 복잡하게 되어 있어, 이혼의 사유에 따라 이혼 가능성 여부에 대한 큰 차이가 생긴다. 성공회에서는 대개의 경우 비록 이혼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한쪽 배우자가 생존해 있는 한, 교회에서의 재혼을 거부하고 있다.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법전(法典)에서 비롯된 동유럽의 법령 및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에서는 이혼과 재혼에 관한 규제가 매우 자유로운 편이어서 특정한 이유에 의한 이혼을 인정하고 있다. 즉 남자의 동의 없이 고의적으로 낙태하거나, 4년간 남자에 의해 버려져 있을 경우, 4년간 불치의 정신이상이 계속될 때, 혹은 문둥병에 걸렸을 때 이혼이 가능하다. 개신교에서는 부부 중 한 쪽이 음행한 것이 판명되었을 경우, 이혼과 재혼을 허락하고 있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일반 법정에서 이혼 사유가 인정되어 이혼선언이 내렸을 경우, 많은 개신교가 이를 묵인하는 경향에 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결혼이란 부부가 평생을 같이 사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을 뿐 아니라 이것은 곧 자연적 윤리적인 법칙으로 규정하고 있다. “부부는 자녀들과 사회의 행복을 목적하는 이 성스러운 인연이 인간 임의(任意)에 맡겨질 수는 없다. 혼인제도의 창설자이신 하느님께서 친히 여러 가지 가치와 목적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혼인과 가정의 신성성(神聖性)을 재강조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제2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천주교의 경우 개신교보다 이혼에 관한 규제가 매우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그 규제에 다소 신축성을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오늘의 현실은 비록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사회윤리와 사회법률의 고도의 법제화로 인하여 이혼에는 윤리적 결단과 법적 결과에 따라야 하는 입장을 벗어나기 어렵게 되어 있으며, 사회학적인 의미에서의 이혼도 결혼의 의미가 갖는 다양성 못지않게 그 정의를 내리기 매우 어렵게 된 탓이다. 이를테면 부부간에 정신적 육체적 관계가 소원해지기 시작한 상태를 이미 ‘이혼’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으며, 다처주의(多妻主義), 자유연애, 그 밖의 여러 가지 탈선 풍조로 이혼이 유행되고 있는 생활조건의 변모 속에서 결혼생활의 본연의 존엄성과 그 탁월하고 성스러운 가치를 수호, 촉진하는 데 있어 꼭 강요하는 결혼 불가해소성(不可解消性)만으로 대응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점도 안고 있다. (⇒) 결혼

[참고문헌] Fourneret, Le mariage chretien, Paris 1925 / Knecht, Handbuch des Katholischen Eherechts, 1928 / E. Magnin, Les proces en nullite de mariage dans l’Eglise Catholique, Paris 1929 / Mussener, Das katholische Ehereht in der Seelsorgspraxis, 1934 /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제2부 제1장 / 유봉준, 혼인성사에 관한 현대 윤리신학적 고찰, 가톨릭대학 논문집, 제1집,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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