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영 [한] 李~

이호영(1803~1838). 성인(聖人). 축일은 9월20일. 회장. 성녀 이 아가다의 동생. 세례명 베드로. 경기도 이천(利川)에서 태어나 어려서 입교하였다. 부친이 대세(代洗)를 받고 사망하자 서울로 이주하여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고 그로인해 유방제(劉方濟) 신부에 의해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835년 2월 한강변 ‘무쇠막’에서 누나 이 아가다와 함께 체포되어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가혹한 고문을 당했으나 비명 한 마디 지르지 않고 참아 냈다. 결국 형조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이 때 결안(結案)의 ‘사학죄인’(邪學罪人)이라는 문구(文句)에 대해 천주교는 사학이 아니라 거룩하고 참된 도(道)라 수결(手決)할 수 없다고 버티자 관헌들이 강제로 수결시켰다. 그 후 형집행이 연기되어 옥에 갇혀 있으면서 누나 이소사와 함께 한 날 한 시에 순교하자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옥살이하다가 1838년 11월 25일(음 10월 8일) 4년간의 옥살이 끝에 얻은 병으로 옥사(獄死),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성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에 올랐고, 이어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聖人)의 반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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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 [한] 李鉉

이현(?~1801). 순교자.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경기도 여주(驪州) 출신으로 1797년 김건순(金建淳)의 전교로 삼촌 이희영(李喜英)과 함께 입교했고 주문모(周文謨)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후 홍필주(洪弼周), 최해두(崔海斗), 최필제(崔必悌), 홍정호(洪正浩) 등과 모여 축일(祝日)을 지내고 교리를 연구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체포되어 이해 7월 2일(음 5월 22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강완숙(姜完淑) 등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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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헌경 [한] 李獻慶

이헌경(1719~1791).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몽서(夢瑞), 호는 간옹(艮翁). 1743년 진사에서부터 1784년 대사간(大司諫)이 되기까지 관직을 두루 거쳐 1790년 한성부 판윤(判尹)이 되어 관계에서 은퇴하였다. 척사론자(斥邪論者)인 안정복(安鼎福)과 동시대 사람인 이헌경은 역시 ≪천학문답≫을 지어 천주학을 비판하였는데, 특히 그는 유교의 상제가 천주교의 인격적인 천주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는 안정복과는 달리 주자학적인 입장에서 서학을 비판하고 배척한 것은 아니다. 저서로서 ≪간옹집≫(艮翁集)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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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신자사목부 [한] 離鄕信者司牧部 [영] Migrants Pastoral [관련] 이주사목위원회

1960년대 이후 농촌을 떠나 도시로 집중하는 인구가 급증하여 이향자에 대한 새로운 사목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1965년 1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틀리에(Olivier Tellier, 太) 신부는 이러한 사실에 관심을 갖고 이들에 대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조사를 통하여 자료를 수집한 다음 이를 각 본당에 발송하여 이향자사목의 필요성을 환기시켰다. 1971년 주교회의 가을총회는 이향신자에 대한 문제를 안건으로 상정하여 심의한 후 1972년 봄 총회에서 이향신자사목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1981년 주교회의 가을총회는 이향신자사목부와 해외교포사목부의 통합 필요성을 인정하고 이를 통합, 이주사목위원회로 개편했다. 이향신자 사목부는 이향으로 인해 발생하는 무교적(無敎籍) 신자를 파악하여 교적을 회복시켜 냉담(冷淡)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이향신자명단 접수, 전입본당 및 해외본당 확인, 이향신자 카드작성, 이향신자에 대한 조사서 작성. 이들 자료를 각 해당 본당에 발송하는 일을 하고 있다. (⇒) 이주사목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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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로 [한] 李恒老

이항로(1792~1868). 조선시대 후기의 학자. 척사론자. 초명은 광로(光老), 자는 이술(而述), 호는 화서(華西). 경기도 양근(楊根)에서 이회장(李晦章)의 아들로 태어났다. 3세 때 천자문을, 6세 때 십팔사략(十八史略)을, 12세 때 상서(尙書)를 각각 떼고 17세 때인 1808년(순조 8년)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했으나 과거(科擧)에 부정이 있음을 알고는 이후 오로지 학문에만 힘썼다. 1840년(헌종 6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휘경원 참봉(徽慶園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퇴했고, 1862년(철종 13년) 이하전(李夏銓)의 옥사 때 김순성(金順性)의 무고로 체포되었다가 무죄임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1864년 고종이 즉위하자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가 되고 이어 전라도 도사(都事), 지평(持平), 장령(掌令) 등을 역임한 후 1866년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어 병인박해 때에는 휘하의 문인(門人)들과 강력한 척사론을, 병인양요 때에는 주전론(主戰論)을 주장하였다. 그 후 공조참판에 승진, 경연관(經筵官)으로서 대원군의 경복궁중건과 과중한 조세정책에 반대하여 이로 인해 사망할 때까지 대원군의 배척을 받게 되었다. 이항로의 학설은 주리론(主理論)에 입각한 이원론(二元論)을 주장했고, 또 직언자(直言者)로 존왕양이의 대의명분을 주장했기 때문에 그의 휘하에는 많은 문인들이 모여들었다. 저서로는 ≪화서집≫(華西集), ≪화동합편강목≫(華東合編綱目), ≪벽계아언≫(蘗溪雅言), ≪주자대전집차의집보≫(朱子大全集箚疑輯補), ≪주역석의≫(周易釋義), ≪문인어록≫(門人語錄), ≪벽사록변≫(蘗邪錄辨) 등이 있다. 저서 중 ≪벽사록변≫에는 그의 척사론이 체계적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학문적 근거보다는 고루한 존왕양이의 대의명분 위주로 척사론을 전개했기 때문에 편협하고 비합리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사후 내부대신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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