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연사 [한] 赴燕使

중국 연경(燕京)[지금의 北京]으로 파견되던 조선시대의 외교사절을 말한다. 정사(正使),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 등 3인의 사신(使臣)과 200여명의 수행원으로 구성되며, 부연사의 종류로는 동지사(冬至使) · 정조사(正朝使) · 성절사(聖節使) · 천추사(千秋使) 등의 정기 사행(使行)과 사은사(謝恩使) · 주청사(奏請使) · 진하사(進賀使) · 진위사(陳慰使) · 진향사(進香使) · 고부사(告訃使) 등의 비정기 사행이 있었다. 부연사행(赴燕使行)의 성격은 사대(事大)라는 정치적 목적 이외에 조공(朝貢)과 하사(下賜)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공무역(公貿易), 수행원들과 중국 상인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던 사무역(私貿易) 등 경제적 목적을 갖고 있었고, 또한 문화 접촉과 전달의 수단이기도 하였다. 특히 명말(明末) 청초(淸初)에 이르는 17∼18세기 동안 부연사행들은 서구문화(西歐文化)의 전달에 크게 공헌하였다. 1603년 이광정(李光庭)이 리치(Ricci, 利瑪竇)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를 갖고 귀국하고 이듬해 황윤중(黃允中)이 <양의현람도>(兩義玄覽圖)를 갖고 귀국한 이래, 1631년 정두원(鄭斗源)은 북경에서 예수회선교사 로드리게스(J. Rodriquez, 陸若漢)와 만나 서학(西學)에 대해 담론하고 자명종(自鳴鍾)·화포(火砲)·천리경(千里鏡) 등 과학기계와 서학서를 선물로 받아 가지고 귀국하였다. 1720년 이이명(李-命)도 북경에서 예수회선교사 쾨글러(P. Kogler, 戴進賢)와 수아레스(J. Suarez, 蘇霖)를 만나 역산 · 지리 · 종교에 대해 담론했으며, 1776년 홍대용(洪大容)도 북경의 남당(南堂)에서 예수회선교사 할레르시타인(A. von Hallerstein, 劉松齡)과 고가이슬(A. Gogeisl, 管友管)을 만나 서학에 대해 담론하였다.

이를 통계적으로 살펴보면 1636년 병자호란 이후 1784년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세례받기 전까지 147년 동안 167여회의 부연사행들이 북경을 왕래했고, 1603년부터 1783년까지 부연사행에 의해 ≪천주실의≫(天主實義), ≪영언여작≫(靈言蠡勺), ≪직방외기≫(職方外紀), ≪변학유독≫(辨學遺牘), ≪칠극≫(七克) 등 37여종의 서학서와 많은 과학기구 등이 전래되었다. 이러한 부연사행들의 서학서, 서구과학 기술에 대한 소개는 실학자들로 하여금 서구와 서구 과학기술에의 관심과 연구를 유발시켰고 드디어는 한국 천주교회가 자생(自生)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뿐 아니라 부연사행은 한국 교회와 북경 교회와의 연락수단으로도 이용되어 1784년 이승훈은 동지사의 서장관에 임명된 부친 이동욱(李東郁)을 따라가 북경에서 예수회선교사 그라몽(Grammont, 梁棟材) 신부에게 성세성사를 받았고, 1790년 윤유일(尹有一)의 북경 방문을 비롯하여 1793년 지황(池璜), 1796년 황심(黃沁)과 옥천희(玉千禧), 1823년 정하상(丁夏祥) · 유진길(劉進吉) · 조신철(趙信喆) 등의 북경 방문도 부연사행 특히 동지사행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들 조선 교회의 밀사들은 부연사행을 통해 북경을 왕래하며 조선 교회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보고하고 아울러 성직자영입운동을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李元渟, 赴燕使行의 經濟的一考―私貿易活動을 中心으로, 歷事敎育, 第7輯, 歷史敎育文硏究會 / 朴鍾鴻, 西歐思想의 導入批判과 攝取, 韓國天主敎會史論文選集, 第1輯, 韓國敎會史硏究所, 1976 / 李元渟 赴京使行의 文化史的 意義, 史學硏究, 第36號, 韓國史學會, 1983 / 裵賢淑, 朝鮮의 傳來된 天主敎書籍, 韓國敎會史論文集,Ⅰ, 韓國敎會史硏究所,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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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골 [관련] 부흥골

⇒ 부흥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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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본당 [한] 扶安本堂

1926년 창설된 전주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녀 소화 데레사. 전라북도 부안 지방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900년대 초 정복조(鄭福朝, 시몬) 회장에 의해서였다. 그는 부안군 주산면 덕산리(德山里)에서 전교를 시작하여 곧 덕산리와 인근 공작리(孔雀里), 만석동(萬石洞), 등용리(登用里) 등에 공소를 개설, 신성리(新城里) 본당[현 井州본당]주임 미알롱(A. Mialon, 孟錫浩)신부의 순방을 받게 되었다. 그 후 1926년 6월 등용리에 이기수(李己守, 야고보) 신부가 부임함으로써 이 지역은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1935년 본당은 등용리에서 서외리(西外里)로 이전되었으며 본당 이전 후 교우자녀와 빈민아동을 위한 학교가 개설되었다. 1958년 김종택(金鍾澤,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현 성당터인 부안읍 서외리 90번지의 대지를 사들여 성당개축을 시작, 1963년 김영구(金榮九, 베드로) 신부 재임 중 성당을 완공하여 이해 7월 7일 한공렬(韓王公烈, 베드로)의 주례로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현재 주임신부는 서석기(徐錫基, 베드로) 신부이며 1983년 교세는 교우수 1,956명에 공소 12개소이다.

역대 주임신부 명단은 다음과 같다. 1대(1926∼1937년) 이기수, 2대(1937∼1946년) 이기순(李基順, 도미니꼬), 3대(1946년∼1951년) 김반석(金盤石, 베네딕토), 4대(1951∼1952년) 강윤식(姜允植, 베네딕토), 5대(1952∼1954년) 박성운(朴聖雲, 베네딕토), 6대(1954∼1957년) 이약슬(李若瑟, 요셉), 7대(1958∼1961년) 김종택, 8대(1961∼1963년) 세르스테반스(D. Serstevens, 池正煥), 9대(1963∼1969년) 김영구, 10대(1970∼1974년) 이상호(李祥浩, 아우구스티노), 11대(1974∼1977년) 이용기(李龍起, 가브리엘), 12대(1977∼1977년) 김정원(金正元, 토마스), 13대(1977∼1982년) 김종길(金鍾吉, 라파엘), 14대(1982∼현재) 서석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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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속가 [한] 附續歌 [라] sequentia [영] sequence

특별한 축일(祝日) 미사 때 제2독서 후, 즉 복음 전에 노래되거나 외워지는 찬미가. 원래 ‘sequentia’란 알렐루야(Alleluia)의 마지막 ‘a’가 노래되는 일련의 음조(melody)를 말했던 것 같다. 그러나 후대에 음절로 된 텍스트가 소개되었고 음조가 아니라 찬미가와 비슷한 형식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성시(聖詩)를 뜻하게 되어 알렐루야 앞에 놓여졌다. 성시는 미사의 내용을 담고 있다. 중세기에는 많은 수의 부속가가 정규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이들 중 대부분이 도미니코회 등 여러 수도회 전례에 남아있다. 로마 전례서에는 부속가의 수가 5개로 축소되었다. 이들은 널리 알려져 있는 부활축일의 ‘victimae paschali’와 성신강림 축일의 ‘veni, sancte Spiritus’, 성체성혈 축일의 ‘Lauda Sion’, 위령의 날의 ‘Dies Irae’, 성모통고 축일의 ‘stabat Mater’ 등이다. 현재는 이 중 처음 두 가지만 사용되고 있다. 다른 것은 임의로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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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진본당 [한] 釜山鎭本堂

주보로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모시는 이 본당의 설정은 1889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때 교구로부터 영도에 있는 김보윤(金甫允, 로무알도)에게, 부산지방에 본당을 설정하니 신부를 영접해 가라는 통보가 왔다. 당시 경상도에는 로베르 (Rovert, 金) 신부가 대구에서 약 30km 떨어진 ‘신나무골’에 은거하면서 대구는 물론, 경상도 북부와 남부지방을 두루 사목하였는데, 경상도지방을 신부 혼자서 전교하기에는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그래서 교구에서는 경남일대를 관할하는 부산본당을 독립시키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박해 때 경주에서 피난와 영도에 은거하고 있던 김보윤은 그 해에는 신부를 맞으러 가지 못하였다. 그리고 1890년에 대구 새방골 이장언(李章彦, 프란치스코)과 함께 김보윤은 조조(Mouse Jozeau, 趙得夏) 신부를 안내하여 부산에 부임케 하였다.

조조 신부는 현 청학동성당 수녀원 자리를 임시 본당으로 정하고, 여기에서 2년 가까이 부산지방과 경남일대를 전교한 뒤, 1891년 7월경 영도를 떠나 지금의 부산시 대청동(大廳洞) 2가 15번지에 임시 성당을 지어 옮겼다. 1900년 7월에는 초량(草梁) 3동 47번지(현 초량입구 정발장군 동상 근처)로 다시 본당을 이전하여 10여년을 지낸 다음, 또 본당의 위치를 부산의 중심지인 범일동으로 옮기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교구장으로부터 허락받아, 대지(현 데레사 여자 중고등학교 자리)를 마련하여 목조건물의 성당을 짓고, 본당을 초량으로부터 이전함과 동시에 교회 이름도 ‘부산진본당’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부산본당을 동래 지역에 정하여 활발한 전교를 하려던 창설당시의 꿈이 실현된 셈이었다.

당시 본당의 관할구역은 낙동강 동쪽지역인 양산 · 동래 · 김해를 비롯하여, 영도 · 경주 등 32개 공소를 관할하였다. 교세의 확장에 따라 1932년 청학본당 등을 분할하였으나, 일제 말기의 종교탄압으로 신부는 감금당하고 본당은 징발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8.15광복 후에는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교세는 꾸준히 발전을 거듭하여 1948년 중앙본당의 분할을 시작으로, 1951년 초량본당과 동래본당을, 1952년에 동항본당을, 1956년에는 광안본당 등 많은 본당을 분가하였다. 1964년 10월 현 성당의 소재지인 범일동 1375번지에 새 본당 건축을 기공, 1965년 12월말 연건평 750평에 달하는 현대식 성당을 완공, 1966년 9월 18일 ‘부산진본당’을 ‘범일본당’으로 개칭하고, 그 해 12월 8일 최재선(요한) 주교의 집전으로 범일본당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그 뒤 1975년 1월 문현본당을 분할하고, 1978년 11월에는 본당설정 90주년 기념 성서의 밤을 성대히 올렸다. 현 본당 주임은 제 30대 장병룡(張丙龍, 요한) 신부가 맡고 있으며, 신자수는 5,803명(1983년말 현재)에 달하고,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도 설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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