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달(?~1815).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未詳). 1815년 경상북도 청송(靑松)의 노래산(老萊山)에서 부활축일을 지내던 중 고성대(高聖大) · 고성운(高聖云) 형제를 비롯한 30여명의 마을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경주진영(慶州鎭營)에서 옥사하였다.
박영래 [한] 朴永來
박영래(?~1866). 순교자. 회장. 세례명 요한. 일명 내호. 황해도 신천(信川)의 양반으로 1866년 병인(丙寅)박해가 일어나자 아내와 딸을 데리고 상경하여 짚신장수를 하던 중 이선이(李先伊)의 밀고로 체포되어 10월 25일(음 9월 17일) 양화진에서 김중은(金重殷)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박아기 [한] 朴阿只
박아기(1783~1839). 순교자. 성녀(聖女). 세례명 안나. 축일은 9월 20일. 강원도 강촌(江村) 출신으로 서울의 한강변에 살면서 모친과 함께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머리가 둔해 교리를 명확히 알지는 못했으나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했고. 18세 때 교우인 태문행(太文行)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 3녀를 두고 정성껏 교육시켰다. 기해(己亥)박해 초인 1839년 2월 남편, 큰 아들과 함께 체포되어, 포청에서의 혹형과 고문으로 남편과 아들이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나 혼자 배교를 거부하고 혹형과 고문을 이겨냈다. 연일 계속되는 혹형으로 살이 터지고 뼈가 튀어 나왔으나 고통을 참아내며 평온한 얼굴로 함께 갇힌 교우들과 위문 오는 가족들을 위로하고 권면하였다. 형조로 이송되어서도 형관이 배교하고 가족들에게 돌아가라고 유혹하며 혹은 위협하고 고문했으나 끝까지 신앙을 지켜 1839년 5월 24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 후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 의하여 복자위(福者位)에 올랐고 이어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박순천 [한] 朴順天
박순천(1898-1983). 정치가. 2 · 4 · 5 · 6 · 7대 국회의원. 세례명 요안나. 부산 동래(東萊)에서 출생. 1917년 부산 일신(日新)여학교를 졸업하고 마산 의신(義信)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부산지역의 연락 · 조직업무를 맡아 활약했고, 일경에게 체포되어 1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東京)여대 사회학부에서 수학하였다. 이 때 변희용(卞熙容, 요한, ?~1966, 前 成均館大 總長)과 만나 결혼하고 동경여대를 졸업 한 후 귀국해서는 시가(媤家)인 경남 고령(高靈)에서 야학 · 유치원 · 탁아소 등을 운영하며 사회사업을 벌였다. 그 후 상경하여 금강전구공장 기숙사 사감으로 일하다가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40년 황신덕(黃信德)과 함께 경성의숙(京城義塾)을 설립했고, 광복이 되자 7명의 동료를 모아 전국 부녀자 동맹위원회를 조직하고 활동했으나 자유당(自由黨) 정권이 이를 산하기구로 만들자 탈퇴하였다. 1954년 국회의 사사오입사건(四捨五入事件)을 계기로 정계에 투신, 야당인 민주당(民主黨) 창당위원으로 활동했고, 5.16 군사쿠테타 후 1962년 부군과 함께 영세 입교하고 1966년 통합야당인 민중당(民衆黨) 당수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야당생활을 청산하고 정계에서 은퇴한 후, 1976년 육영수(陸英修)여사 추모사업회 이사장, 1980년 국정 자문위원으로 활동했고, 아현동본당, 양화진본당 등에서 사목위원으로 교회활동에 헌신하였다. 1983년 1월 9일 뇌일혈로 사망,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박순집 [한] 朴順集
박순집(1983~1911). 세례명 베드로. 1868년 3월 23일 양화진(楊花津)에서 순교한 부친 박 바오로는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한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와 모방(Maubant, 羅佰多祿) 신부의 시신을 노고산(老姑山)에 매장하였다가 삼성산(三聖山)에 이장한 뒤, 순교하기 직전 아들 순집에게 그 묘소를 알려 주었으므로 훗날, 즉 1901년 11월 2일 세 성직자의 유해를 찾을 때, 그의 고증으로 유해는 발굴될 수 있었다. 16명의 순교자를 배출한 철저한 천주교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1866년 박해 때 순교한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4명의 성직자 그리고 다른 치명자의 시체를 목숨을 걸고 새남터에서 와고개[瓦署峴, 현재 용산우체국 뒤]로 이장했을 때의 주동인물이었다고 ≪병인순교복자증언록≫(丙寅殉敎福者證言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정부문헌인 우포청(右捕廳) 박순지(朴順之)의 초사(招辭)[문초기록]에는 박순집의 이름은 보이지 않아, 그 진부의 여부는 확실치 않다. 그는 말년에 인천으로 이사하여 인천교회 창설에 여생을 바치다가 1911년 6월 10일 82세로 사망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