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종(1925-1983). 서울교구 신부. 초대 한국 가톨릭 노동청년회(J.O.C) 지도신부. 세례명 프란치스코. 경기도 개성(開城)에서 출생. 파리 성 술피스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된 뒤 로마 성 그레고리오 대학에 진학하여 1958년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하였다. 성신대학(聖神大學)[가톨릭大學의 前身] 교수를 거쳐 1958년 11월 J.O.C 창설자 카르딘(Cardijin) 추기경의 내한을 계기로 창설된 한국 J.O.C의 초대신부로 임명되어 1969년 7월까지 지도신부로서 J.O.C의 근본정신 · 이론을 정립하고 지도자 양성에 주력하는 등 한국 J.O.C 발전에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 J.O.C 지도신부로 있으면서 1960년에는 군종신부단장, 1962년 이민회(移民會) 지도신부, 1966년 한국 청소년 문제협의회 부위원장 등을 겸임했고, 1969년 J.O.C 지도신부직을 물러난 뒤로는 1970년 도림동본당 주임신부, 1974년 후암동본당 주임신부, 1979년 수색 본당신부 등을 역임하였다. 수색본당 주임 신부로 사목 중이던 1983년 3월 14일 심근경색증으로 사망,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박사의 [한] 朴士儀
박사의(?~1839). 순교자. 세례명 안드레아. 충청도 홍주(洪州) 출신. 순교자 박보록(朴保祿)의 아들.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자인 아버지를 본받아 신심생활에 열중하였을 뿐만 아니라 효심이 지극하여 부모가 병이 들어 누우면 그 곁을 떠나는 일이 없이 간호를 하면서 빨리 낫도록 정성으로 기도 드리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신앙생활에 전념코자 고향을 떠나 단양(丹陽) 산골 마을로 이사하여 가난한 사람을 돌보며 살았다. 그러던 중 1827년에 박해가 다시 심해지자 경상도 상주(尙州) 산골로 피신하였는데 그해 4월 예수승천 대축일에 이웃 신자들과 함께 첨례를 보고 있을 때 배교자의 밀고로 상주포졸들에게 함께 잡히고 말았다. 감옥에서 자신이 받는 고문의 아픔보다도 아버지가 받는 고통을 보고 더욱 괴로워하였다. 그러나 국법에 의거, 부자를 떼어 각각 다른 감옥으로 격리 수용하여 심문하려고 하자, 관장에게 같은 장소에 있기를 애원하므로, 그의 효심에 감동한 관장은 이를 허락하고 함께 대구감영으로 이송하였다. 아버지는 이곳에서 옥사하였고, 박사의는 여러 해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839년 5월 26일(음 4월 14일)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박사베리오 [한] 朴~
박 사베리오(1872~1966). 한국 최초의 수녀. 세례명은 글라라, 수도명 사베리오. 아명은 황월(黃月). 서울 홍제원에서 박순집(朴順集, 베드로)의 3녀로 출생하였다. 조부 박 바오로는 1866년 병인(丙寅)박해 때 순교했고, 부친 박순집은 병인박해로 순교한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 등 세 명의 프랑스 선교사의 유해를 거두어 용산에 안장하고, 1901년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 모방(Maubant, 羅) 신부, 샤스탕(Chastan, 鄭) 신부 등의 안장지를 삼성산(三聖山)에서 발견해 낸 인물이었다. 이러한 뿌리 깊은 신앙에 힘입어 박 사베리오 수녀는 1988년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자 곧 입회, 1898년 첫 서원을 했고 1916년 종신서원을 하였다. 1897년부터 1901년까지 인천분원에서 지원자를 가르친 기간을 제외하고는 수도생활의 전부를 명동본원에서 보냈는데, 항상 겸손과 청빈과 극기로 후배 수녀들의 존경을 받았고, 또 신교(信敎)의 자유가 보장된 뒤 한국교회와 함께 구한말, 일제시대를 겪은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산 증인으로 추앙을 받았다. 1966년 3월 18일 95세의 노환으로 사망, 용산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박봉손 [한] 朴鳳孫
박봉손(1976~1839). 순교자. 성녀(聖女). 축일은 9월 20일. 세례명 막달레나. 서울의 외교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5세기경 시골로 출가하여 딸 둘을 낳고는 과부가 되자 친정에 돌아와 계모 김 세실리아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1834년 입교하였다. 그 후 1839년 기해(己亥) 박해가 일어나자 친정식구와 함께 살고 있던 여러 가구의 교우들은 피신했으나 홀로 집을 지키고 있다가 7월초 잠시 집에 들른 외삼촌과 함께 체포되었다. 포청과 형조에서 매우 가혹한 형벌과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켰고, 최후로 형관에게 “여기까지 온 것은 위주치명(爲主致命)하기 위해 온 것이니 국법대로 죽여 주십시오”라고 신앙을 고백하고 사형을 선고받아 9월 26일 서소문밖 형장에서 8명의 교우와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하여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 한국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訪韓)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박보록 [한] 朴保祿
박보록(?~1839). 순교자. 세례명 바오로. 충남 홍주(洪州) 출신. 순교자 박사의(朴士儀)의 아버지. 33세 때 주문모(周文謨)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예비교우로 있을 때인 1794년에 체포되어 고문에 못 이겨 배교를 선언하고 석방되었다. 그는 이런 전비(前非)를 뉘우쳐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켜 나가기로 맹세하고, 외교인이 많이 사는 고향에서는 세정에 끌려 신앙생활에 지장이 있을 것을 우려하고 충청도 단양(丹陽)의 산골로 들어가 신앙생활에 몰두하였다. 그는 조용한 이곳에서 오로지 기도와 묵상으로 덕행을 쌓아 외교인을 찾아 복음을 전하고 많은 사람을 입교시켰다. 1827년 박해가 이곳까지 몰아치자 그는 가족을 데리고 경상도 상주로 피신했으나, 그 해 4월 그믐날 상주 포졸들에게 잡혀 상주 감옥에 투옥되어 갖은 고문을 다 당하고도 끝내 굽히지 않았다. 이에 대구(大邱)감영으로 이송되어 사형선고를 언도받고도 곧 집행되지 않은 채 여러 해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그해 9월 27일(음) 71세로 옥사, 순교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