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실리오 [라] Basilius

Basilius(330?-379). 성인. 축일은 1월 2일. 주교. 교회학자. ‘대(大)바실리오’로 잘 알려져 있다. 소아시아 카파도치아(Cappadocia)의 체사레아(Caesarea)에서 태어났다. 양친, 부계(父系)의 조부모, 두 형제, 누이도 모두 성인, 성녀이다. 그는 카파도치아 3교부의 한 사람이다. 누이 마크리나(Macrina)는 신앙심이 깊어, 그와 동생인 뉴사의 그레고리오에게 좋은 감화를 주었다. 카이사리아, 콘스탄티노플, 아테네에서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아 이교적 교양과 그리스도적 교양을 함께 터득하였다. 고향에 돌아가 수사학을 가르치고 있다가 누이의 권유로 수도생활에 들어가, 시리아, 이집트, 팔레스티나를 편력, 후에 358년 체사레아 부근의 이리스 강변에 은수자(隱修者)로 정주하였다. 이곳에서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와 구교(舊交)를 두텁게 하면서 함께 선교에 종사하였다. 그는 아테네 시대의 학우(學友)인 로마황제 율리아누스의 궁정으로의 초빙을 거절했으나, 당시의 교회정세가 그에게 조용한 생활을 허락치 않아, 체사레아의 주교 에우세비오의 요청에 따라 아리우스파의 황제 발젠스에 대해 정통신앙 옹호를 위해 체사레아로 갔다. 수년 후 370년 에우세비오의 후계자로 주교가 되어 그 직위로 생애를 마쳤다. 체사레아에서 교회분쟁의 와중에 뛰어든 그는 에우노미오스가 거느리는 극단적 아리우스파, 성령의 신성(神性)을 부정하는 멜레시오(Meletius)를 안티오키아의 감독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한 로마의 감독 다마소(Damasus) 1세,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오 등과 혹은 격렬히 논쟁하고, 혹은 일치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는 박학하고 웅변·정치적 수완이 뛰어났으며, 인격도 고결하였다. 성격은 섬세하면서도 전투적이었으며, 비범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어 동방의 수도원 조직형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체사레아 교회에 건설한 성당, 병원, 빈민보호시설 등 건물은 치밀한 계획하에 운영되었다.

저서 중에서 중요한 것은 서한집과 ≪성령론≫(De Spiritu Sancto), ≪에우노미스 반박론≫(Adversus Eunomium, 3권), 나치안츠의 그레고리오와의 협력에 의한 오리제네스(Origenes) 저작으로부터의 발췌 ≪Philocalia≫ 등이다. 교리면에서는 반(半)아리우스주의자와 니체아 신경을 화해시키기 위해 힘쓰고, 그들이 말하는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란 말은 니체아 신경의 호모우시오스(Homoousios)와 같은 뜻을 지녔다고 역설하였다. 그가 서거한 2년 후에 열린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에서 아리우스 논쟁이 사실상 종료된 것은 그의 공적으로 돌려도 될 것이다. 그는 아폴리나리오(Apolinarius)와 서신교환이 있었다는 것, 저작 속에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양성(兩性)의 구별보다는 일치를 강조한 것 때문에 일부 지역으로부터 아폴리나리오설을 신봉한다는 혐의를 받았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바르트 [원] Barth, Heinrich

Barth, Heinrich(1890~ ). 스위스의 철학자. 바젤 대학 철학교수를 역임하였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인간적 지식의 연관을 추구하면서 고전철학에서 현대철학에 걸친 광범한 분야에서 연구업적을 올렸다. 그의 신(新)칸트주의적 인식론이 그리스도교적 휴머니즘에서 어떻게 정위(定位)되는가를 ≪현상의 철학≫(Philosophie der Erscheinung, 제1부, 1941)에서 구명하였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바르톨로메오의 밤 [라] Nox Sti. Bartholomaei

위그노전쟁(1562-1598년)이 전개되고 있던 1572년 대학살이 일어난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밤을 지칭한다. 당시 프랑스 국왕 샤를르 9세의 어머니이자 섭정인 카타리나는 위그노파의 지도자인 나바라 출신의 앙리와 화해하기 위해 그의 딸을 앙리에게 시집보내기로 하였다. 결혼일은 8월 23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카타리나는 생각을 바꾸어 기즈가(家)가 공모하여 위그노파에 대한 학살을 시도하였다. 결혼식은 그야말로 ‘유혈의 결혼식’이 되었다. 파리에 이어 지방에서도 위그노파에 대한 무서운 학살이 진행되었다. 이로써 화해는 깨어지고 위그노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바르톨로메오 [라] Bartholomaeus

열두 사도의 하나. 축일은 8월 24일. 바르톨로메오는 공관복음서(마르 3:l8, 마태 10:3, 루가 6:14)와 사도행전(1:13)에 다른 사도들과 함께 이름이 나열되어 있을 뿐이며 그밖에 바르톨로메오라는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요한복음(1:45-51, 21:2)에 나오는 나타나엘(Nathanael)은 바르톨로메오와 동일 인물이라 추정할 수 있다. 양자가 동일 인물이 아니라면 일찍이 주님의 제자가 된 나타나엘이 공관복음서에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열두 사도의 하나인 바르톨로메오가 요한복음에 언급이 없는 사실이 부자연스럽다는 점, ‘바르톨로메오’는 ‘달메의 아들’(bar-Talmai)이란 뜻으로 성(姓)이므로 이에 이름이 있으리라 보며 나타나엘은 그의 이름일 수 있다는 점, 공관복음서에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가 함께 나열되어 있고 요한복음(1:45-46)에서 또한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예수께 데려갔다고 하여 함께 소개되어 있는 점 등을 그 논거로 한다.

전승에 의하면 바르톨로메오는 이디오피아, 인디아, 페르시아 등지에서 선교 활동을 하였다. 성무일도서에 따르면 그는 또한 아르메니아에서 선교하다가 거기서 순교하였는데, 살아 있는 채 피부가 벗겨지고 참수당하였다. 그래서 그는 미켈란젤로가 그린 <최후의 심판>에서 벗겨진 피부를 드러내 놓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

바르나바 [라] Barnabas

사도. 키프로스섬의 레위족 출신으로, 바르나바란 이름은 ‘위로의 아들’이란 뜻이다. 원래 이름은 요셉(사도4:36)이며 성 마르코의 사촌(골로 4:10)이다. 바울로와 함께 안티오키아 지방과 예루살렘 지방을 왕복하면서 예언자와 교사로 활동했고(사도 11:22 이하), 바울로의 제 1차 전도여행에 동반하였다(사도 13:4-14:26). 사도회의에서 바울로와 함께 유태교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리사이파 출신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격렬하게 논쟁하였다(사도 15:1-29). 그 뒤 바울로의 제 2차 전도여행 때 마르코의 동행문제로 바울로와 충돌했고, 마르코와 함께 키프로스섬으로 떠나갔다(사도15:36-39). 그밖에 1고린 9:6, 골로 4:10에도 바르나바에 대한 기록이 있고, 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가 지은 ≪Hypotyposeis≫, 에우세비오의 ≪교회사≫, 위(僞)글레멘스의 ≪성서성훈≫에 따르면 예수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 ≪재회록≫(Recognitiones)에 의하면 마태오와 동일인이라고도 한다. 테르툴리아노의 ≪De pudicitia≫는 히브리서의 저자가 바르나바라고 말하고 있다. 전승에 의하면, 키프로스섬의 살라미나에서 유태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다고 전해진다. 7세기 ≪로마 미사경본≫에도 그의 이름이 보이고 9세기 이후 축일표에는 6월 11일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카테고리: 신학자료실 |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