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룩서 [한] ∼書 [라] Prophetia Baruch [영] Book of Baruch

바룩서, 바룩의 희랍어 묵시록, 시리아어로 보존된 묵시록 등 다수의 책들의 저자가 예레미아의 비서인 바룩이라고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유일하게 우리가 취급하는 이 책만이 ‘바룩’이라는 명칭과 함께 70인역에 삽입되어 있다. 불가타(Vulgata) 속에서는 예레미아의 편지가 바룩서 6장이 되었다(라틴어 본문). 그러나 성 예로니모는 바룩을 라틴어로 번역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불가타가 내포하고 있는 텍스트는 옛 라틴어(Vielle Latine)의 텍스트인데 일련의 수사본 속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70인역 수사본들은 예레미아서 다음에 그리고 애가서와 예레미아의 편지 이전에 배열하고 있다. 아타나시오, 예루살렘의 치릴로와 같은 희랍 교부들에 의해 정경(政經)으로 선포된 목록들은 라오디체이아 공의회에 의해서도 같은 순서를 제공한다.

바룩에 대한 가장 오래되었으면서도 잘 알려진 인용문들 속에서는(아테나고라스, 이레네오) 바룩서를 예레미아의 이름 아래에서 명명하는데, 이유는 예레미아 예언서의 부록처럼 바룩서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한편 불가타의 상당수에 해당하는 수사본들은 완전히 바룩서를 제외해 버리고 있다. 특별히 예로니모는 heqraica veritas, 즉 히브리어로 된 것만을 진실된 것으로 인정하기에 바룩서를 제외하고 있다.

1. 분석 : 이 책은 4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 서문 : 1:1-14, 1:1-2 바룩서 저자의 이름과 추정된 연대, 1:3-14 역사적 서두(書頭) △ 참회기도 1:15-3:8 △ 율법과 동일시되는 지혜에 대한 찬송 3:9-4:4. △ 격려와 위로의 담화 4:5-5:9 부록, △ 예레미아의 편지 6장.

내용 분류에서 보듯이 이 책은 상당히 복잡하고 서로 상이한 4개의 문하유형에 속해 있다. 즉 기도, 지혜적 시, 예언적 담화, 풍자.

희랍어로 된 기도(1:15-3:8)는 셈족 어법이 강하게 풍기는데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원(原)히브리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반대로 셋째 부분인 4:5-5:9은 순수하며 그 내용은 예루살렘에로의 즉각적인 귀환을 전제하는데 반해 서문인 1:1-14은 582년, 즉 유배 초기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기에 저작의 일체성이나 저자의 일체성에 대해 쉽게 단언할 수 없다.

2. 내용 : 서문에 의하면, 바룩서의 말씀들, 곧 죄인들의 신앙고백은 갈데아 사람들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된 기념일에 유배된 백성 전체가 있는 바빌론에서 읽혀졌던 것 같다. 과월절 축제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순례자들은 회생제물을 봉헌할 때에 주님의 집에서 읊조릴 기도를 가져가야만 했다. 이것은 에즈라 시대부터 Diaspora의 유태인들의 실천행위에 완전히 부합되는 것이다. 에즈라가 저자로 생각되는 유사한 기도가 두 개 있는데, 이것들은 유사한 상황속에서 구성되었다(에즈 8장과 느헤 9장). 그러나 서문에는 분명한 연대 착오가 나타난다. 유배생활(流配生活)이 시작된 지 5년(바룩 1:2), 예루살렘에 순례를 가고 희생제물을 가져가며 느부갓네살과 벨사살을 위하여 기도하러 간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다음 대사제(大司祭)인 여호수아(에즈 3장)가 등장하기까지 희생제물을 바치는 성전에서의 규칙적인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바룩의 서문은 인위적인 저작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 바룩서 시대의 훨씬 나중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다. 연대나 고유한 이름들은 유배의 귀환을 상기시키고 최종적인 복구를 엿보게 하는 연중 순례의 관습을 이스라엘 역사의 테두리 안에 집어넣자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포로로 잡혀간 자들의 참회 기도(1:15-3:8)는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외침이다. 이 기도의 문학형태는 구약성서의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2열왕 8:46-53, 시편 80, 집회 36:1-17, 다니 3:26-45) 집단적 참회 시편의 문학형태이다.

바룩의 기도는 에즈라 9:6-15, 느헤미아 9:6-37과 다니엘 9장의 기도들과 매우 흡사하다. 이 기도에 종말론을 감싸고 있는 아직 완숙되지 않은 형태는 바룩의 기도가 다른 것들보다 앞시대에 되었음을 믿게 하는데 이 기도는 2세기 초에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혜에 관계되는 부분인 3:9-4:4은 격려의 어조를 띠고 있다. 이것은 욥기 28장을 본뜨고자 했던,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신명기 30장에 종속적인 지혜에 대한 찬미가이다. 여기서의 분위기는 집회서 1:1-20과 24:1-32의 분위기와 동일하다. 우리는 200년경으로 이 찬미가의 저작연대를 규명할 수 있겠다.

4:5-5:9까지의 내용 속에 내포된 바룩의 담화는 서두에서 볼 수 있었던 참회기도와 상통한다. 이 시인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면서(4:5-9) 유배의 비탄이 그들의 잘못에 대한 처벌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즉 그들은 그들을 만드신 영원하신 하느님의 분노를 불러 일으켰으며, 그들의 어머니인 예루살렘을 슬프게 했던 것이다. 뒤이어 시온이 말을 한다(4:9-29). 이것 역시 백성들이 항명심을 갖고 하느님을 거역했기에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고통이 무엇인지를 상기시킨다. 또 한편 하느님께 울부짖는 그들의 기도를 상기시킨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어주셨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유배로부터의 그들의 조속한 귀환을 예고하신다. 영원하신 하느님은 예언자의 입을 통해 피들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시온에게 그의 슬픔이 끝났음을 알게 하신다.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분 앞에 돌아오게 된다(4:30-5:9). 이 담화와 선행하는 부분들과의 상호관계는, 이것 역시 2세기 초엽에 저작되었음을 지적한다.

예레미아의 편지(6장)는 히브리어로 쓰여졌지만 그리스어 번역으로만 보존되어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이사야서 44:9-20에서, 특별히 예레미아 10:1-16에서 찾아볼 수 있는 풍자에서 변형된 풍자로서 우상에 반대하는 풍자이다. 6장이 묘사하고 있는 우상숭배는 알렉산더 대왕과 셀레우쿠스 왕가 치하에서의 바빌론의 우상숭배이다. 이들은 바빌론의 옛 신들께 바치는 의식을 다시 일으켜 세웠던 자들이다. 이것은 3세기나 더 후대에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레미아에게 저자권을 부여하는 것은 타당성이 분명히 없다고 볼 수 있다.

3. 정통성과 역사성 : 첫눈으로 볼 때 역사에서 유래한 것처럼 소개되고 있는 서문의 이야기는 상당수의 연대 착오를 범하고 있다. 예레미아의 비서인 바룩이 597년과 587년 두 차례의 강제 유배 동안에 바빌론에서 자기의 저서를 쓸 수는 없었다. 성전이 불타고 난 뒤 바룩은 예루살렘에 있지 안았다. 갈데아 사람들에게 굴종하기를 거부했던 애국자로 의심받은 그는(예레 43:3) 자기의 스승인 예레미아와 함께 이집트까지(예레 43:4-6) 끌려갔다.

이 책의 저자가 예레미아와 동시대인인 바룩이었다면 그가 알고 있던 사람들의 명판에 기입된 이름들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역사는 예루살렘의 대사제였을 여호야킴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1:7). 그리고 느부갓네살의 후계자이며 아들은 결코 벨사살이 아니었다(1:11-12).여기서 바룩서는 다니엘서의 개념들과 유사한 개념들을 반영하고 있다(다니 5:2). 이 점은 바룩의 몇몇 부분들이 다니엘서에 종속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뒷받침해 준다. 참회의 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597년과 587년 두 개의 대재앙을 함께 혼합하고 있다. 어떤 때는 예루살렘 성전이 희생제물에 대한 의식과 함께 아직도 현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1:7·10·14) 어떤 때는 지나간 사건에서처럼 불행에 대한 암시를 하고 있다(2:26). 이 모든 것은 바룩 서문의 저자가 자기가 암시하고 있는 역사적 사건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문학적 가상(fiction)의 경우를 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은 간단하다. 바룩이라는 이름은 에녹의 이름과 같이 참된 사건의 연속주기를 형성하고 있는 아주 상이한 정신을 가지고 쓴 글들을 바룩 주위에 모아 놓은 것이다. 바룩의 기도(1:15-2:19)와 다니엘의 기도(9:5-19) 사이에 나타난 분명한 문학적 유사성은 상호 종속의 문제점을 제기한다. 모든 것은 바룩이 다니엘에게서 영감을 받고 그것을 때때로 교정하거나 계발시켰음을 지적하는 것 같다. 그리고 바룩 4:36-5:9은 기원전 63년 직후에 된 것으로 보이는 솔로몬의 시편 11장에 종속되어 있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4. 교의(敎義) : 바룩서가 혼합적으로 된 것이기에 그 속에 표명된 종교적 사상의 동질성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예외로서는 하느님, 죄와 같은 교의를 지적할 수 있다. 분석에 나타난 세 부분 안에서 하느님은 정의와 권세와 지혜의 원천(1:15, 2:6, 3:1, 3:32-39)으로서 또 이스라엘 운명의 주인으로서 인식되고 있다. 세 번째 부분에서 하느님은 특별히 ‘영원하신 분’(4:22 · 35, 5:2) 또 ‘거룩하신 분’(4:22)이라 불리고 있다. 그리스어 형용사 ‘영원한’이라는 단어와 유사한 실사(實詞)가 히브리어에 없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죄에 대한 처벌로서의 고통과 죄에 대한 교의는 책 전체에 걸쳐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는데, 특별히 이러한 사상은 1:13 · 18, 2:10, 3:10-13, 4:6-8 · 12 · 13 속에서 발견된다. 조상들의 죄는 자손들에 의해 속죄받고 공훈의 원천처럼 간주되는 조상들의 정의는 거절된다(2:19). 바룩은 부활의 교의를 부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룩 2:17은 시편 115:17의 반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모든 메시아니즘이 바룩서 안에는 결여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바룩은 본질적으로 메시아니즘에 대한 교의가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바룩의 시리아 묵시록과 구분된다. 결과적으로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땅 위에 지혜가 나타나게 되었고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게 되었다”(3:38)라는 내용을 문자 그대로 메시아에 대한 것으로 주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자가 그것이 지혜와 동일시 된 모세오경(Torah)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룩의 주제는 한 마디로 죄와 회개와 구원에 대한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安秉鐵)

[참고문헌] Ancien Testament. TOB, 1977 / 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 Abiugdon press / H. Cazelles, Introduction critique a l’Acien Testament, Desclee et Cie, Paris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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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양식 [한] ∼樣式 [영] baroque [프] baroque

17세기 초부터 18세기 전반기에 걸쳐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가톨릭 국가들에서 발전한 교회건축 · 장식의 양식. 이 말은 포르투갈어 ‘barrocco’에서 온 듯하다. ‘비뚤어진 모양을 한 기묘한 진주’라는 뜻. 이 말은 본래 16세기에 유럽을 지배하였던 고전주의 르네상스 후에 나타난 양식인데 약간 경멸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의 미술사가들은 바로크라는 용어에서 ‘변칙 · 이상 · 기묘한’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제거하고, 그 예술적 특성과 종교적 내용에 대하여 오히려 감격의 눈으로 보게 되었다. 바로크는 미술사 · 예술학의 연구대상이 되었고, 이제는 그 개념이 다른 예술양식에도 적용되어 한 시대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된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독일의 미술사가 뵐플린(H. Wolfflin)은 19세기의 평가에 나타나는 이 양식을, 르네상스 고전주의의 퇴폐현상이라고 보는 견해를 부정하였다. 그의 연구는 바로크 미술을 르네상스의 타락도 아니요 진보도 아니며 르네상스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양식으로, 양자는 근대미술에 있어서의 2대 정점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바로크는 로마에서 발생하여 이탈리아 · 바이에른 · 오스트리아 · 독일 · 스페인으로 번져 나갔고 라틴 아메리카에까지 확대되었다. 이 양식은 반종교개혁(反宗敎改革)의 유력한 표현수단이 되어 여러 가톨릭 국가에서는 종래의 종교적 도상(圖像)을 일신하고 종교 미술에 신선하고 장대한 입김을 불어넣었다. 그 예술적 성과는 교회생활의 혁신에도 큰 영향을 주었으며 종교적 감격과 함께 가톨리시즘의 자각을 되찾게 하였다.

수많은 새 수도원 건설을 계기로 교회건축에도 활기를 불러 일으켰다. 르네상스의 합리적이고 명확한 균형을 이루는 형식의 파악, 눈으로 볼 수 있고 파악할 수 있는 유한(有限)한 것과 조화를 이루는 안정은 이들의 새로운 감흥과 초절적(超絶的)인 열정을 표현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르네상스의 형식들을 유지하면서도 힘찬 약동감(躍動感)에 넘치는 구성과 활 모양의 곡선에 의해 거대하고도 희곡적이고 또 회화적(繪畵的)인 새로운 특색을 가하여 세부는 그 자립적 의미를 잃고 오직 전체의 조화로서만 이해할 수 있다. 1550-1750년에 전례 없이 활기를 띤 교회의 건축은 외부에서 보면 웅대하게 치솟아 약동감에 넘치는 화려한 정면(正面)이 특히 환영을 받았고, 이것과 결합된 둘레도 여기에 연결되도록 하였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잘츠부르크 대성당, 아인지텔른(Einsiedeln)과 멜크(Melk) 수도원 성당 등 드높고 둥근 지붕의 쌍탑은 도시와 농촌풍경을 한결 빛나게 조화시켰다. 그리고 내부에서는 아주 새로운 공간감(空間感)이 지배하였다. 본당과 둥근 천장을 가진 집중건축(集中建築)의 결합은 통일된 온 공간에 근엄한 조화를 이룬다. 동시에 효과적으로 대조(對照)에 넘친 채광(採光)과 풍부한 통일적 장식 · 설비를 꾀하였다. 장식과 설비는 유색(有色)의 대리석, 광택이 찬연한 벽, 거대한 천장 프레스코, 약동감 넘치는 파이프 오르간, 강론대와 고해소, 그리고 회화와 소상(塑像)으로 장식된 드높은 벽을 배경으로 제단이 안치된다. 조각과 회화 역시 약동적 구도와 열정적 흥분으로 넋을 잃게 하는 장면들로 가득 차 있다. 천장 프레스코는 현실의 공간이 무한히 높아 보이고 또 그렇게 느껴지도록 하려는 의도가 분명히 엿보인다.

아름다운 비단에 견사(絹絲)와 금은실로 수놓은 화려한 제의 (祭衣), 그리고 제구(祭具)들도 견실한 기술에 의해 극도로 찬란하게 꾸미려는 노력이 보인다, 조각에서는 비상(飛翔)하는 동적인 자태가 돋보이고, 회화에 있어서는 대각선적인 구도, 원근법, 단축법, 눈속임 효과의 활용 등이 전체적인 특색이다. 18세기에 들어와서도 바로크는 로코코 양식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바로크는 미켈란젤로(1475-1564)에게서 나와 두 제자의 계승에 의한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1541-1604년)을 거쳐 마데르노(C. Maderno, 1556-1629)에 이르고, 북부 이탈리아에서는 팔라디오(A. Palladio, 1508-1580)의 더 엄숙하고 고전주의적인 방계(傍系) 예술을 낳았다. 이것은 구성상 개개의 형식을 거대한 것, 극적인 것으로 변형하는 단계로서 로마에서 예수성당과 성 베드로 대성당은 전가톨릭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교회건축의 공간이상(空間理想)을 실현하였다,

제 2단계인 로마 융성기의 바로크는 곡선을 즐겨 쓰고 희곡적인 약동감을 강화하여 종래에 보지 못한 조명효과를 거두고, 항상 감흥적인 공간구성을 추구하는 동시에 내부의 설비까지 더 풍부하게 함으로써 완결된 통일성을 이루게 하였다. 바로크는 이탈리아의 각지에 전파되어 토리노의 성 신도네 교회, 나폴리의 카세르테궁(宮), 베네치아의 산타마리아델라살루테 교회와 티에폴로(G.B. Tiepolo)의 회화 등을 만들어냈다, 북방 바로크의 중심인 빈에는 마르티넬리, 힐데브란트(A. Hildebrant) 등의 궁전, 교회건축. 페르모저 등의 조각, 모르베르시의 회화가 있었다, 뮌헨, 드레스덴, 프라하도 그 중심지에 포함된다. 스페인에서는 바로크가 전통적인 추리게레스코 양식과 결합하여 마드리드의 성 페르난도 구제원, 그라나다의 샤르트르회(會) 성당 등을 만들어 냈다. 멕시코, 브라질 등 라틴 아메리카의 식민지에서도 독자적인 양식을 낳게 하였다. 17세기의 프랑스도 바로크와 무관하지는 않았으나 시험적인 영역에 머물렀다.

이탈리아의 바로크에 비길 만한 프랑스의 건축은 루이 14세 양식이다. 그것은 고대건축과 연관된 엄숙한 경향을 쫓는 것이며 르브랑(Charles Lebrun, 1619-1690)은 그들의 예술방향에 진보된 형태의 바로크적인 거칠고 난폭한 힘을 쏟아 넣었다. 그러나 파리에서는 바로크적인 약동형식은 없고, 클로드 비뇽 등의 회화활동 역시 시험적인 영역에 머물렀다. 오늘날 바로크는 좁은 의미의 미술양식에서 벗어나 넓은 뜻의 문화양식으로 다른 시대와 장르에도 확대 적용되어 가고 있다. 그 예술적 특성과 종교적 내용은 예전의 경시에 대신하여 일반적으로 감격스런 평가를 받게 되었다.

[참고문헌] R. Pane, Architetture del eta barroca in Napoli, Napoli 1939 / The Encyclopedia of philosophy, Macmillan and Free press, New York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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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의종교 [한] 密儀宗敎 [라] Mysteria (cultus) [영] mystery religions

밀의란 ‘입술이나 눈을 닫다’라는 의미의 그리스어(語) 동사 ‘뮈에인’에서 유래된 단어로 어떤 절차를 통해 그 단체의 회원이 된 자만이 참석하는 비밀 의식을 가리키는 말로, 밀의종교란 이러한 의식을 거행하는 종교를 지칭한다. 그리스와 로마시대에 유행한 이 밀의종교는 공개적인 종교를 통해서 얻을 수 없는 종교체험을 느낄 수 있게 하였기 때문에 세인(世人)들의 관심을 끌었고, 전성기에는 로마에만도 여러 가지 밀의종교가 혼재하여 있었다. 보통 공동식사, 공동의 춤, 공동의 의식(儀式)을 거행하며 일체감을 형성하였는데, 유명한 밀의로는 디오니소스 밀의, 엘류시스 밀의, 오르픽 밀의, 이시스 밀의 등이 있었다. 이러한 밀의종교가 성행하던 시기에 로마를 비롯한 지중해 연안에 전래된 그리스도교는 그들과 함께 발전하였고 2세기경에 형성된 이단인 그노시스파는 밀의종교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밀의종교는 그 뒤에도 성행하다가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그리스도교 공인 후 급속히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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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본당 [한] 密陽本堂

부산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사도 성 바울로. 1940년 경남 밀양군 밀양읍 내이동(密陽邑 內二洞)에 대지 700평을 사들여 성당과 사제관을 짓고, 유흥모(柳興模, 안드레아) 신부가 부임함으로써 창립되었다. 당시 삼랑진 본당에 문제가 있어, 교구청은 이 고장의 본당을 밀양읍에 설정케 한 것이다. 일찍이 병인박해(l866년) 때 두 순교자를 낸 밀양에는 1899년경 명례리(明禮里)에 임시 본당이 설치되어 강성삼(姜聖參, 라우렌시오) 신부가 4, 5년간 체류하면서 여러 곳에 공소를 설립하고 전교하였던 사적이 남아 있다.

초기에는 밀양의 박원석(베드로)의 집을 공소로 정하고, 1904년에는 마산의 무세(Mousset, 文) 신부를 청하여 첫 판공성사를 실시하였다. 이들 3인은 20여년 동안 전교한 결과 신자들이 늘어 1927년에는 명례교회의 밀양읍 공소가 되었다. 본당이 설정된 후에 1948년 성당을 개축하고 1953년에는 성모 성심유치원을 설립하였다. 1960년 농지 4,000평을 확보하고, 1964년 백응복 주임신부 재임 중에 현 교회 자리인 내일동(內一洞) 174의 2번지에 대지 546평을 사들여 성당과 수녀원 유치원을 신축하였다. 그러나 경주 불국사가 가깝고, 서원(書院)이 많아 유불(儒佛)의 전통성이 짙은 지역이므로 전교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현재 주임은 14대 정인식(鄭仁植, 알베르토) 신부이고, 신자수 3,314명(1983년말 현재)에 5개 공소를 관할하고 있다.

그 동안 이 본당을 맡았던 주임신부는 다음과 같다. 초대 유흥모(柳興模, 안드레아), 2대 김준필(金俊弼, 아우구스티노), 3대 김영호(金永浩, 멜키올), 4대 전석재 (全碩在, 이냐시오), 5대 유선이(柳善伊, 요셉), 7대 정수길(鄭水吉, 요셉), 8대 김태호(金兌浩, 알로이시오), 9대 함영상(咸英相 비오), 10대 백응복(白應福, 스테파노), 11대 손덕만(孫德萬, 도마), 12대 김창문(金昌文, 요셉), 13대 배상섭(裵常燮, 요한) 신부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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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칙령 [한] ∼勅令 [라] Edictum Mediolanense

313년 2월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리치니우스(Licinius)가 밀라노에서 회담하고 6월에 발표한 칙령으로 로마제국의 전 영토 내에서 그리스도교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따라 박해시대에 몰수되었던 교회의 재산이 모두 반환되었고, 그리스도 교인을 속박하던 모든 법률은 폐지되었다. 이 칙령은 리치니우스가 막시미누스 다자(Maximinus Daza)를 무찌른 후 오리엔트 총독에게 보내 <박해자의 죽음에 대하여>(De mortibus persecutorum, 348)란 서한 속에 실려 있었고, 이것이 다시 락탄시오(Lactantius)와 에우세비오(Eusebius)에 의해 인용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때문에 밀라노칙령은 양 황제의 의견차로 인하여 밀라노에서 공포되지 못하였고, 칙령이라기보다는 동방지역의 총독들에게 보낸 포고문의 형식이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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