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구의 사목자로서 주교품은 받았으나 그 교구에 대하여 재치권을 행사할 수 없는 주교. 그가 대주교일 때는 명의 대주교라 부른다. 명의주교의 기원은 니체아 공의회(325년)가 회개한 노바시아노파(派) 주교들에게 재치권을 행사할 교구 없이 다만 주교의 칭호와 영예를 존속시켜 준 데에 있다. 그 뒤 7-8세기에 사라센[回敎徒]에 의하여 추방된 주교들(동방, 아프리카, 스페인), 13세기에 이교도들에 의하여 추방된 주교들(리보니아), 터키가 성지를 점령한 후 추방된 주교들은 서방교회의 주교들에게 피난 가서 보좌주교들이 되었다. 이들이 과거에 재치권을 행사하던 교구들은 이미 외교인의 수중에 넘어가 있으므로 상주(常住)할 수 없는 교구가 되었고 그 교구들에 대한 재치권은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없는 명목상의 권한에 불과하므로 명의주교좌(sedes titularis)라 불렀다. 이 명의주교좌를 대표하는 명의주교들이 사망하면 후계자를 서품시켰는데 이러한 관습이 비엔 공의회(1311년)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에서 법규로 성문화되었다. 명의주교의 임명은 교황청에 유보되어 있다. 명의주교는 재치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교구를 가진 주교, 즉 상주주교의 특전과 영예를 가진다. 명의주교(또는 대주교)의 예로는 교황청 각 부서의 직책을 가진 주교, 대목(代牧), 보좌주교, 은퇴한 주교 등이다. 오늘날 한국 천주교회의 주교들 가운데 은퇴한 주교, 대구교구의 보좌주교 등은 명의주교이다.
명월구본당 [한] 明月溝本堂
1931년 만주 간도성 연길현 명월구시(滿洲 間島省 延吉縣 明月溝市)에 창설되어 1946년 폐쇄된 연길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 요셉. 명월구의 옹성납자(甕聲磖子) 마을은 1900년대초 조선 이주민들이 개척한 교우촌으로 팔도구 본당의 관할지역이었다. 1924년 교우촌 내에 보록학교(保祿學校)[1926년 해성학교로 개칭됨]가 개설된 후 1926년 대령동 본당의 창설과 함께 대령동 본당의 공소로 개설되었고, 이어 1931년 본당으로 승격되었다. 시래플(C. Schrafl, 周)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 학교를 증축하고 교세신장에 힘을 쏟아 1936년 신첨본당을 분리, 창설시키는 한편 올리베타노 베네딕토수녀회 분원을 설치, 동(同)회의 수녀들로 하여금 진료소를 운영케 하였다. 그 후 교세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1942년 성당 신축을 시작, 1944년 벽돌양옥의 성당을 완공했으나 1946년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에게 성당을 비롯한 모든 교회재산을 몰수당함으로써 본당은 폐쇄되어 이후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본당 내의 신심단체로 부인들의 모임인 안나회를 포함하여 3개의 단체가 있었고, 본당 운영의 사업체로 해성학교, 진료소가 있었다. 1936년의 교세는 교우수 1,266명, 공소 7개소 등이었다.
명오 [한] 明悟 [영] intellect
이 용어는 가톨릭 교회에서 주로 사용하던 옛말의 하나인데, 예를들면, “일곱 여덟 살에 명오(明悟)가 열린다”고 보는 주장 같은 것이다. 이렇게 가톨릭에서는 7, 8세 때, ‘명오가 열린다’고 하였는데, 이는 다시 말하여 ‘깨달음이 시작됨’을 뜻하였다. 사물에 대하여 밝게 인식하는 일, 또는 그러한 힘을 가리켜 ‘명오’라는 용어를 써왔다. 그러므로 이 말은 철학적인 의미 영역을 내포하고 있음도 분명하다. ≪한불자전≫의 풀이를 보면 ① 지성(知性), 이지(intellect), ② 이성(理性), 지각, 판단력, 인식력(raison), ③ 총명, 지능, 이해력, 사고력(intelligence), ④ 통찰력, 혜안(慧眼, penetration) 등의 뜻을 지닌 말이다.
철학적으로 볼 때 ‘명오’ 즉 지성은 ‘감성’(感性)에 맞서는 대립적인 말로서, 실재하는 것을 비(非) 물질적인 방법으로 알아내는 인식의 정신적인 능력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감각과 상상력보다도 본질적으로 높은 차원의 사고기능을 가리키며, 이러한 ‘명오’ 즉 지성을 소유하는 것은 인간인데, 천사와 악마의 경우도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상은 좁은 의미에서의 지성이지만, 넓은 의미에서의 지성은 ‘이성’과 거의 마찬가지 의미로 쓰이거나, 또는 ‘오성’(悟性)의 뜻으로도 쓰일 때가 있다.
명동본당 [한] 明洞本堂
서울 대교구 주교좌 성당.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이자 한국 천주교의 상징이며 심장인 본당이다. 본당이 설정된 것은 1882년경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이곳에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그보다 104년 전인 1784년의 일이다. 그 해 가을부터 수표교(手標橋)의 이벽(李檗)의 집에서 영세식이 있었고, 다음 해에는 명례방(明禮坊; 현 명동 부근) 소재 중국어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 토마스)의 집 대청마루에 모인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정약전(丁若銓)의 3형제, 권일신(權日身) 형제 등이 이벽을 지도자로 삼아 종교집회를 가짐으로써 조선에 교회를 창설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신앙공동체는 그 이듬해 형조금리(刑曹禁吏)에게 발간되어 김범우가 충청도로 유배되면서 해체되었고, 명동은 1882년에야 다시 교회와 인연을 맺게 된다. 한미수호조약이 체결(1882년)됨에 따라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될 것을 예견한 제7대 교구장 블랑(Blanc, 白圭三) 주교는 회장 김 가밀로에게 성당부지를 물색, 매입하게 하였다. 블랑 주교는 이곳에다 우선 종현서당을 설립, 운영하면서 예비신학생을 양성하는 한편 성당 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던 중 기지분쟁이 일어나 성당건립은 지연되었지만 신자수는 계속 증가하여 1892년에는 남대문 밖에다 약현본당(현 중림동 본당)을 분리시켰다. 이후 한때 종현성당은 문안성당, 약현성당은 문밖성당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약현본당의 분리와 함께 기지분쟁을 매듭지으면서 종현본당은 성당의 공사에 착수하였다. 코스트(Eugene Coste, 高宣善) 신부가 성당의 설계를 맡았고, 공사감독도 순수 지휘하였다. 그러던 중 1896년 코스트 신부가 선종하면서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가 본당을 맡아보면서 성당건축을 마무리지었다. 1898년 5월 29일 성당을 축성식과 함께 ‘원죄 없으신 잉태 마리아’께 봉헌하였다. 1900년 9월 10일 병인박해 때 순교한 순교자들의 유해를 용산신학교에서 옮겨와 지하묘지에 안장하였고, 1925년 3월 3대 주임으로 비에모(Villemot, 禹一謨) 신부가 부임하였고, 이듬해 10월 17일 백동본당(栢洞本堂, 현 혜화동 본당)을 분리시켰고, 1939년 2월 11일에는 문화관을 준공하였다. 1942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기준(李起俊, 도마) 신부가 종현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였고, 1944년에는 샤르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 파견한 전교수녀 2명을 맞아들여 사목에 박차를 가하였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종현본당은 성당명을 종현성당에서 명동대성당으로 바꾸고, 12월 8일 상해 임시정부 요인 귀국환영 미사를 봉헌하였다. 1947년 가톨릭출판사를 설립하여 각종 서적을 간행하기 시작하였고 그해 6월 29일 세종로 본당, 1948년 12월 신당동 본당, 1949년 가회동 본당을 각각 분리시켰다. 1950년 7월 16일 북한의 공산군에 의해 성당과 부속건물 및 교구청이 징발당하는 한편 신부들이 추방되었다가 9월 26일 서울수복과 함께 돌아온 신부들에 의해 성당의 문이 다시 열리게 되었다. 1955년 종로본당을 분리시켰고 1957년 7월 장금구(莊金龜, 요한 크리소스토모) 신부가 강화본당으로 전출되면서 6대 본당주임으로서 양기섭(梁基涉, 베드로) 신부가 부임했으며, 양 신부는 재임 동안 현 교육관 건물을 건립하였고, 한국 천주교로서는 최초로 본당주보를 창간하였다. 1962년 1월 3일 7대 본당주임으로 이종순(李鍾淳) 신부가 부임하였고 이 해 사제관과 수녀원을 신축하였다. 1964년 8월 1일 신인식(申仁植) 신부가 가르멜 수녀회 지도신부로 전출되면서 9대 본당주임으로 황민성(黃旼性) 신부가, 1965년 4월 10대 본당주임으로 이계중(李啓重) 신부가, 1968년 6월 28일 11대 본당주임으로 이문근(李文根) 신부가 각각 부임하였다. 1970년 2월 17일 평신도 사도직협의회를 구성하였고 3월부터는 토요특전미사제를 도입하여 시행하였으며 12월 25일에는 월간 <가톨릭 명동>을 창간하였다. 1971년 5월 14일 12대 본당주임으로 최석우(崔奭祐) 신부가 부임하면서 ‘명동 대성당 복원보수위원회’를 구성하여 다각적인 보수계획을 수립하였다. 1972년 13대 본당주임으로 김몽은(金蒙恩) 신부가 부임하였고 1976년에는 3.1 명동사건이 발생하였다. 1977년 3월 경갑룡(景甲龍) 주교가 14대 본당주임을 겸하였고 1982년 김수창(金壽昌) 신부가 15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였다. 1983년 말 현재 신자수는 2만 6,974명이며, 서울시 중구 명동 2가 1번지에 소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