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토디오 [라] Methodios [관련] 치릴로

① 그리스 교부(?~311). 주교. 오리제네스(Origenes)에 대한 최초의 공격자였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황제 말년의 대박해 때 처형당하였다. 그가 남긴 저서중 ≪향연, 또는 순결성에 관하여≫(Sumposion, e perihagneias)에서 그는 순결성을 찬미하였으며, ≪아글라오폰, 또는 부활에 대하여≫(Aglaophon, e perites anastaseos)에서는 오리제네스에 대한 반론으로서, 부활한 육신과 지상의 육신은 동일하다고 기술하였고, ≪자유 의지에 관하여≫(Peri tou autexousiou)에서는 영지주의의 운명론에 반박하여 인간의 자유를 주장하고 있다.

② 성인(816?~885).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축일은 2월 14일. 주교. 역시 성인인 동생 치릴로(Cyrillus, 827~869)와 함께 슬라브족 포교의 사도. 그리스 데살로니카의 명문에 태어났다. 동생과 함께 동방교회로부터 파견되어 모라비아 지방의 슬라브족 전도에 종사, ‘슬라브인의 사도’라 불렸다. (⇒) (데살로니카의) 치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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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노이아 [그] Metanoia

회개 또는 참회를 뜻하는 그리스어. 이는 그리스어 신약성서, 특히 복음과 사도들의 설교에서 사용된다. 회개는 믿음과 세례와 죄의 고백 등으로 표현된다. 이는 불신을 버리고 신앙을 가지며 죄를 끊고 덕행을 실천하는 전인적 변화를 의미한다. 회개로서의 메타노이아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기본이 되고, 성신강림날 베드로의 설교에서 제일 먼저 부각된 내용이며 그리스도교 완덕에 도달하는 데 있어서 본질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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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 [라] Messias [영] Messiah [독] Messias [히] masiah

히브리어의 ‘masih’(mashiah)라는 동사에서 온 말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가리킨다. 그리스어에선 ‘Christos’ 즉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는 말로서 번역되었다(요한 1:41, 4:25). 구약시대에 예언자, 사제, 왕들은 즉위할 때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의식을 행하는 관습이 있었으며, 그리스도는 예언자, 대사제, 왕 중 왕으로서 신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고, 인류 구제를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신 ‘구세주’(救世主)이므로, ‘메시아’라는 말은 구세주를 뜻한다. 유태교, 그리스도교의 종말사상(終末思想)과 결부되어 ‘종말론적 구원자’를 나타내기도 한다.

고대 이스라엘 왕조시대에 다윗왕 이후에는 신망 있는 왕을 갖지 못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다윗왕의 이미지와 결합된 이상적인 왕의 재래(再來)를 대망하는 이른바 ‘메시아 대망’의 경향이 풍미하게 되었다. 이때의 메시아 대망은 현실을 부정(否定) 매개로 하는 종말론과 결부되어 종말적 메시아 대망으로 바뀌었다. 정치적인 독립을 잃은 유다이즘 시대로 들어오자, 묵시문학적(默示文學的)으로 천상의 메시아가 생각의 대상이 되거나, 다른 한편에서 2세기 때 로마에 대한 저항의 기수 바르 코크바(Bar Kochba)를 메시아라고 호칭하는 경우와 같이 민족주의와도 결부되었다. 하지만 후기 유다이즘에 있어서는 메시아사상이 오늘까지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큰 위치를 차지하지 않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메시아’라는 명치 사용을 보면, 구약성서에 39회 나타나지만, 그중 29회는 이스라엘 또는 유대 왕을 지칭한 경우이고, 1회는 페르시아왕 키로스(Kyros, 기원전 600경-529)[고레스]를 가리켰다(이사 45:1). 신약성서에 나타난 메시아라는 용어는 요한복음서에서만 2회 뿐이다(1:21, 4:25). 그리고는 거의 그리스어 번역인 ‘Christos’(그리스도)로 나와 있다. 기타 메시아와 유사한 명칭으로서 ‘사람의 아들’(人子), ‘다윗의 후손’, ‘유태인의 왕’, ‘하느님의 아들’로서 표현되었다.

그리스도교의 메시아관념은 종교사적인 관점에서 보아 본질적으로는 유다이즘의 메시아관념을 발전시킨 것이나, 사상적으로 중요한 것은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상(像)(이사 53)과 예수와의 결합에 있다. 예수가 그리스도 즉 메시아임은 그가 왕적인 권력을 가지고 이 세상을 통치하기 때문이 아니다. 스스로 종으로서 고난의 길을 걷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며, 이 세상은 자기 나라가 아니라고 전제한 것이다. 이 고난을 받은 자로서의 메시아사상은 그리스도교의 독자적인 메시아사상을 형성하였다. 유다이즘의 ‘메시아’ 행위는 정신적인 구제행위 즉 신에 대한 속죄와 동시에 정치적 사회적인 구제를 가져오는, 이른바 정치적인 메시아로서 만민을 정복하고 그들을 무릎 꿇게 하는 이 세상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의 ‘하늘의 왕국’은 신이 직접 지배하는 나라이며,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나라이고, 바울로가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메시아에 관한 일반적인 정의를 개정하여,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능력으로서, 또한 하느님의 지혜로서, 하늘로부터 온 사람인데,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하여 ‘신의 아들’이라는 데서 신성(神性)을 얻었다고 생각하며, 신앙의 대상임을 밝혔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와 유태교의 메시아관(觀)은 종말관과 마찬가지로 그 내용에 있어 결정적으로 서로 다르다.

메시아를 단순한 구제자라고 해석한다면, 메시아 사상이나 메시아 대망은 다른 종교에서도 적지 않게 눈에 띈다. 가령 조로아스터교(Zoroaster敎) 이단설에 의하면 조로아스터 사후 3천년이면 구제자가 출현하리라고 믿고 있으며, 세계 여러 곳 각 시대에서 볼 수 있는 ‘천년왕국설’(千年王國說, millennium) 운동에서도 구제자가 대망되고 있고, 기적이나 예언을 행하는 천부적인 재능의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를 구제자로 착각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다. 이 때문에 ‘메시아’는 광의의 뜻으로, 개인 내지는 특정 집단을 그 고통스런 지경으로부터 해방하여, 평화와 번영을 약속하는 구제자, 더구나 신적인 권위와 성격을 띤 구제자로서 이해하려는 경향이 짙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는 로마서 1장에서 갈파하였듯이 예수는 부활에 의하여 하느님의 메시아가 되었으며 모든 원수, 모든 죽음을 정복할 때까지, 그리스도 즉 메시아의 통치는 지속된다. 예수는 때로는 ‘메시아’ 칭호를 뜻밖에도 사양하였으며, 또 정치적인 ‘메시아주의’(Messianism)를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그리스도교의 메시아는 구세주 즉 고난의 메시아 사상으로 일관하여 그리스도교의 독창적인 것으로서 전개되어 나온 것이다.

[참고문헌] M.J. Lagrange, Le messianisme chez les Juifs, Paris 1909 / E. Sellin, Die israelitisch-judishe Heilandserwartung, 1909 / A. Lemann, Histoire complete de l’idee messianique chez les Juifs, Lyon 1909 / A. Bentzen, King and Messiah, 1954 / J. Klausner, The Messianic Idea in Israel, New York 1955 / K. Adam, The Christ of Faith, tr. J. Crick, New York 1957 / 杉田六一, 離散のコダヤ人, 敎文館,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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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트르 [원] Maistre, Joseph Ambroise

Maistre, Joseph Ambroise(1808-1857). 한국성 이(李). 조선교구 선교사. 안느시(Annecy) 교구의 앙트르몽(Entremont)에서 태어나 1832년에 신부가 된 후 7년 동안 교구사제로서 활약하다가 1839년 이교인에게 복음을 전할 뜻을 품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갔다.

1840년 1월 15일 프랑스를 떠나 우선 마카오로 향하였다. 마카오의 경리부장이 그의 임지를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9월 21일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임지의 결정을 기다리면서 마침 그곳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던 김대건과 최양업을 가르치는 한편 경리부 일을 도왔다. 1842년 2월 프랑스 군함 편으로 우리 신학생들의 귀국이 결정되자 메스트르 신부는 조선 교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를 떠났다. 이 때 그는 조선에 잠입하기 위해 육로로 또는 해로로 10년간의 모험을 감수해야만 하였다. 선교사의 입국이 불가능하게 보이자 그는 김대건만이라도 입국시키고자 김대건과 하직하였고, 1846년 초에는 최양업과 함께 동북 국경을 통해 입국을 시도했으나 만주 군인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고, 간신히 풀려나 만주로 돌아왔다. 드디어 1852년, 1847년에 난파한 프랑스 군함들의 유물을 철거한다는 구실 아래 중국 배를 타고 조선 서해안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이르러 상륙하는 데 성공,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이미 중국에 있을 때 페레올(Ferreol, 高) 주교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되었고, 더구나 연장자였으므로 1853년 페레올 주교가 사망하자 1856년 새교구장이 입국하기까지 조선교구의 장상직을 맡아보았다. 그간 그는 성영회(聖孀會)의 사업을 도입하였고 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고아나 기아를 거두어 키우는 성영회의 사업을 조선에서도 촉진시키고자 그는 성영회의 도움을 얻어 외교인들의 자녀들을 거두어 교우가정에서 양육하게 하였다. 비록 박해로 시설을 갖출 수는 없었을지라도 어쨌든 조촐하게나마 조선에서 처음으로 고아사업이 시작되었다. 또 그는 국내에서의 성직교육의 긴급성을 절감하고 1855년 제천(堤川) 배론에 성 요셉신학교를 개설하고 우선 그곳의 회장으로 하여금 신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신학교 살림을 돌보게 하였다. 새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입국하자 그는 충청도로 내려와 조그마한 교우촌을 맡아 오던 중 1857년 12월 20일 과로로 쓰러졌고 인근 덕산(德山) 황무실에 묻혔다. 그는 특히 그의 착하고 양순한 성격 때문에 최양업 신부와 조선 교우들의 각별한 존경과 사랑을 받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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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치 [원] Merici, Angela [관련] 안젤라 메리치

Merici, Angela ⇒ 안젤라 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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