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피캇 [라] magnificat

복된 동정녀 마리아가 천사로부터 예수의 잉태를 예고받고 예수를 잉태한 몸으로 엘리사벳을 방문하여 부른 노래(루가 1:46-55). 하느님께서 자신을 통하여 역사하신 위대한 일과 이스라엘에 베푸신 구원에 감사하고 찬양한 내용이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루가 1:46)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불가타 역본에서 ‘찬양한다’를 뜻하는 라틴어 마니피캇(magnificat)으로 시작되므로 마니피캇이 마침내 이 노래를 지칭하는 곡명이 되었다. 이는 성무일도에 인용되어 있고 전례를 집전하는 여러 경우에 곡을 붙여 부르기도 한다. 마니피캇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마리아가 구세주 하느님을 찬양하고(1:46-50), 이스라엘에 베푸신 하느님의 업적을 회상하며(1:51-53), 아브라함에게 예언한 하느님의 계획이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감사하는 내용(1:54-55)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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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교 [한] ∼敎 [라] Manichaeismus [영] Manichaeism

페르시아인 마니(Mani, 216-276)가 3세기에 창시한 이원론적(二元論的) 종교 이단. 마니교는 한때 인도, 중국, 지중해 연안 일대에 퍼져나갔으며 거의 세계적인 종교라고 할 만큼 널리 보급된 적도 있었다. 3세기초의 서부 페르시아는 풍성하고도 다양한 토착 외래종교와 신앙의 집합장소였다. 토속적인 고대신앙과 조로아스터교(拜火敎), 그리고 유태교가 그 중에 들어 있었다. 그리스도교는 시리아 교회에 소속된 아랍인들을 통해서 페르시아에 소개되었으며, 심지어 힌두교의 바라문(Brahmana)과 불교 승려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풍토에서 귀족가문 출신의 창시자 마니는 240년 무렵, 사산조(朝) 시대에 조로아스터와 그 밖의 예언자(모세, 예수)의 사명을 개선할 뿐 아니라, 그것을 완성하고 그들을 대신하여 신의 계시를 전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고 주장하였다.

마니는 인간이 어디서 왔으며, 왜 타락했는가, 또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웅장한 우주론적 신화를 구상하였다. 태초에 두 가지 적대적 본질이 존재했는데, 선과 악, 빛과 어둠, 하느님과 물질이 그것이라고 하였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하느님의 일련의 복잡한 과정을 통해서 꾸며낸 것이고, 그 모두가 원상(原狀)을 회복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반작용을 하는 것이 물질이며, 여기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 한 쌍이 창조된다. 그리고 아담의 눈을 열어주는 이름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 찬란한 예수라는 이름은 그의 영혼의 신적 기원(紀元)을 알려준다. 그러나 아담의 자손은 물체의 설계에 따라 생식을 계속하며, 이것이 바로 현재 인류가 존재하는 상태라고 주장하였다. 마니교는 또 불교적인 윤회설(輪回說)의 색채도 짙다. 그 사상체계에서는 다른 종교와의 유사성이 많은 점을 쉽게 엿볼 수 있다.

마니교에 의하면, 신은 모든 선의 창조자이고, 악마는 모든 악의 창조자이다. 선의 세력과 악의 세력간에는 끊임없이 투쟁이 전개되고, 신은 영(靈)이 신체보다 우위에 섰을 때만 승리를 거둔다. 사람이 행하는 악은 악마가 지배하는 힘에서 비롯된다고 마니교는 전제한다. 그러므로 악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부정하는 종교이다. 마니는 인도에 가서 종교 단체를 만들고 페르시아에 돌아와 설교를 계속하였다. 왕실(王室)은 처음에 그를 환영하였으나 다음에는 배척한 후, 걸형(桀刑)에 처하였다.

마니교는 죄와 참회문제에서 그리스도교와 가장 심각하게 대립된다. 즉 세계는 선인 빛의 세계와 악인 어둠의 세계라는 두 근원적이고 적대적인 부분으로 구분되고, 어둠의 세계 각 부분(지구, 인간)의 발생과정에서 선 · 악 두 세계의 요소들이 뒤섞여 생겨났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마니교는 12세기에 가까운 동안 북아프리카로부터 중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서 갖가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8세기와 9세기에 걸쳐 외몽고의 오르콘 강변에 세워진 위구르국에서는 국교로도 인정되었고, 심한 박해를 받으면서 중국 서남부인 복건성(福建省)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296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반마니교 칙령이래, 동 · 서 로마의 그리스도교 황제들과 발상지인 페르시아 군주들의 금교(禁敎) 정책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노와 같은 교회 저술가들로부터 이단이요, 그리스도교의 큰 적으로 신랄한 공격을 받아왔다. 마니교는 그리스도교에서 이단설을 주장한 바울리치아노파(派),

보고밀파(Bogomiles), 카다리파(Cathari) 등 중세 종파들과의 관계에서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많은 수수께끼를 남겨놓고 있다.

[참고문헌] O.G.V. Wesendonk, Die Lehre des Mani, 1922 / F.C. Burkitt, The Religion of the Manichees, London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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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 [한] 魔鬼 [라] diabolus [영] demon [관련] 악마

⇒ 악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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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피 [원] Lippi, Fra Filippo

Lippi, Fra Filippo(1406?-1469). 플랑드르의 화가. 이탈리아의 스폴레토에서 죽었다. 화가 Fillipino Lippi의 부친. 1421년 피렌체의 S. Maria del Carmine 수도원에 가르멜회 수사로 들어가, 그곳에 와서 일하는 마사치오(Masaccio), 스타르니나(Starnina), 마솔리노(Masolino) 등 화가의 작업 광경을 관찰할 기회를 가졌다. 1461년 수녀 부티(Lucrezia Buti)로 하여금 자기와 사랑의 도피를 하도록 유혹한 사건으로 크게 처벌받게 되었으나 메디치(Medici)가(家)의 중재로 수도원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그쳤다. 코시모 드 메디치(Cosimo de Medici)는 그의 후원자였다. 대표적인 프레스코 벽화 또는 프라토 대성당의 <세례자 요한의 생애>와 <성 스테파노의 생애>, 스폴레토 대성당의 <성모 마리아의 생애>가 있고, 캔버스화로는 <성모 마리아의 대관>, <성인들과 함께 있는 마돈나>, <성 베르나르도의 환상>, <성 라우렌시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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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원] Lithuania

소련 서부의 공화국. 폴란드에 인접해 있다. 정식 명칭은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Litovskaya Sovietskaya Costialisticheskaya). 1918년 독립을 선언, 1940년 소연방에 가입하였다. 면적은 65,200㎢, 인구는 320만 3,000명(1982년 추계), 세례 교우수는 256만 2,000명(1982년 현재), 교구수는 7개, 본당 및 준본당수는 630개. 1240년경 민도베(Mindowe) 대공이 리투아니아 여러 분국(分國)을 통일하고, 독일 기사수도회 및 검우(劍友) 기사수도회와 1250-1251년 격렬히 투쟁한 끝에 그리스도교를 채용하면서 리투아니아는 비로소 역사의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게디민(Gedimin) 대공(재위 : 1314-1342) 치하에야 비로소 가톨릭 교회 및 러시아 정교(正敎)가 자유로운 발전을 할 수 있었다. 대공 야겔로(Jagello, 1377-1434)는 폴란드 왕위를 계승할 여왕 헤드비히(Hedwig)와 결혼함으로써 폴란드의 왕위에 오르기 위해 1386년 크라카우에서 영세(領洗)하고, 1388년 주교구 비르나를 설치, 1392년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봉토(封土)로 준종형제 비토프트(Witowt)와 결탁해서 독일 기사수도회를 탄네베르크에서 격파, 1413년 호로들로(Horodlo) 조약으로 폴란드와의 긴밀한 결합이, 1569년 루블린 국회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완전한 연합이 성립되었다. 1795년 폴란드의 제3차 분할로 인해 리투아니아의 대부분은 러시아령이 되었으나 소부분은 프로이센령이 되고, 1807년 대공령 바르샤바와 합병, 1814년 러시아령이 되었다. 19세기, 특히 1863년의 반란 후 리투아니아 국민은 각성하기 시작, 1차 세계대전에 독일은 1915년 9월 리투아니아를 점령, 1918년 철수, 1920년 봄에 리투아니아는 밀려온 러시아의 볼세비스트를 물리쳤다.

1940년 현재 가톨릭 교세는 본당수 550, 준(準)본당수 712, 교구사제 1,646, 수도자 1,586(남자는 도미니코회 회원, 카프친회 회원, 프란치스코회 회원, 마리아회 회원, 예수회 회원, 여자수도회 회원)을 헤아리고 있었다. 코브노 대학에는 신학과가 있었고, 신학교 4개에 신학생 470명, 가톨릭교도 약 210만 명, 가톨릭 기관지 52개가 있었다. 1939년 8월의 나치스 · 소련간의 협정으로 대부분의 독일인은 송환되고(그 중 태반이 점령하의 폴란드로 이주), 1940년 리투아니아는 강제적으로 소연방에 가맹(加盟), 1941-1944년의 독일군 점령에 이어, 소연방의 새로운 공화국이 되었다. 이때부터 국민으로서의 리투아니아인(人)을 말살하려는 민족적 종교적 박해가 시작되어, 1950년에는 발틱해 연안 3국에서 100만 명 이상이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내져 왔으며, 리투아니아에서 해마다 3만 여명이 국외로 추방되었다. 1951년 현재 리투아니아에는 사제 200명만 남기고 모조리 살해, 투옥, 유형, 국외 망명하였고 수도자, 신학생은 한 사람도 없으며, 가톨릭의 모든 신문은 발행 금지되었다. 전체 6개 주교구에는 교구장이 없었고 주교 2명은 투옥, 2명은 유형, 1명은 행방불명, 보좌주교 1명은 국외 망명하였다. 교회활동은 거의 불가능하고, 60개의 모든 성당은 압수되고, 예배 및 성사수여는 과세(課稅)를 당하게 되었다. 로마에서 임명된 주교 2명이 1955년 가을에 서계(-階)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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