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학파 [한] ∼學派 [라] Schola Romana

로마를 중심으로 한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을 정립한 일군의 학자들. 이는 학문적 관점에서 볼 때 체계적인 것은 아니었다. 즉, 초기 로마교회는 우위성과 수위권을 지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학사상의 면에서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주교들은 동방교회, 특히 알렉산드리아학파가 중심이 된 논쟁에 직접 간접으로 관여했으며 서간과 중재를 통해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에는 알렉산드리아와 비교할 만한 이렇다 할 신학의 전당이 없었다. 이 기간 중 로마 교회는 다만 미누치오 펠릭스(Minucius Felix)가 쓴 호교저서 한 권만 간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로마에서는 히폴리토와 노바시아노가 크게 활동했으나 이들은 모두가 교황들이었다. 히폴리토는 창작 면에서는 오리제네스에게 뒤지지만 그의 방대한 저서와 폭넓은 식견에 있어서는 오리제네스에 버금갈 만한 큰 인물이었으며 노바시아노는 라틴어로 저술한 첫 학자라는 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로마 교회는 ≪무라토리안 단편≫(Fragmentum Muratorianum)과 ≪사도전승≫(Traditio Apostolica) 등 중요한 두 문헌을 전해 주고 있다. ≪무라토리안 단편≫은 신약성서 목록을 담고 있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며, ≪사도전승≫은 히폴리토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초기 교회의 전례와 신앙의 내용을 담고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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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한] ∼帝國 [라] Imperium Romanum [영] Roman Empire [독] Romische Kaiserreich

그리스도교의 생성과 발전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로마제국은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Augustus)에 의해 건설되어 동 · 서제국으로 분열된 후 476년 서로마제국이 먼저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멸망하고 동로마제국이 오스만 터키의 침입으로 멸망한 1456년까지 계속되어 서양문화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한 대제국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대지방에서 태어나 성장하고 활약하다 ‘유태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로마법에 따라 재판에 회부되어 십자가형을 받았고, 초기 교회의 발전이 로마제국의 행정구역 내에서 로마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교회사적으로도 로마제국은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로마제국의 역사는 기원전 8세기 이탈리아반도 중부 티베르(Tiber)강 하구의 낮은 언덕에다 이탈리아인이 세운 도시국가로부터 시작된다. 건국 초에는 전설적인 왕정(王政)이, 기원전 510년부터는 공화정(共和政)이 각각 실시되었다. 공화정 하의 로마는 중소 토지를 소유한 농민을 기반으로 하는 견실한 사회였고, 이를 기초로 하여 이탈리아반도를 통일시켰다. 세 차례의 포에니전쟁을 통한 카르타고 정복, 시리아 격파, 그리스 여러 도시의 점령으로 기원전 2세기경에는 지중해 연안을 지배하는 대국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은 로마공화정의 발전에 기여하였던 중소 토지소유 농민을 몰락시켜 토지제도는 노예노동에 의한 대토지소유제(Latifundium)로 바뀌었고, 가혹한 노동에 반발한 노예들은 스팔타쿠스의 난(기원전 73-71년) 등을 일으켰다. 이와 동시에 이민족(異民族)의 침입과 이탈리아 동맹 때의 반란으로 사회적인 위기가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군인과 정치가들이 등장하여 주요한 관직을 독점하였고,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이 실패한 이후로는 장군들 사이에 정권 다툼이 빈번해져 원로원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정이 유명무실한 상태에서 삼두정치가 등장하였다. 이 삼두정치도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한 후 정적(正嫡) 폼페이우스를 제거하고 독제권을 장악하면서 무너졌고, 그도 공화파에 의해 암살되는 등 혼미를 거듭하였다. 그 뒤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 등과 제2 삼두정치를 시작하였으나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연합하여 옥타비아누스와 대적, 악티움 해전을 벌임으로써 깨어졌다. 이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는 연합군을 격파하여 이집트를 평정함으로써 로마는 지중해 연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로마의 평화’(Pax Romana)시대를 열게 된다(기원전 31년). 옥타비아누스는 형식적으로는 공화정의 전통을 중시하여 원로원과 공동으로 통치하였으나 실제적으로는 모든 실권을 장악하였다. 원로원은 기원전 27년 그에게 존자(尊子)라는 의미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선사하였고, 이때부터 사실상 제정(帝政)이 실시되었다.

소위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리는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건설된 로마제국은 동으로 유프라테스강, 서로는 대서양, 북으로는 도나우강에서 라인강, 남으로는 사하라사막에 이르는 대제국이었다.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전쟁에 시달려 온 로마인들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외부 정복보다는 내정(內政)의 안정에 힘을 쏟았다. 법제를 정비하고 황제숭배사상을 도입하였으며 도로와 수도 등을 건설하였다. 14년 그가 죽고 황제 티베리우스가 즉위하면서 68년까지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조(朝)가 시작된다. 이 기간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과 죽음이 있었고, 베드로의 로마 방문도 행해진다. 이리하여 클라우디우스조의 마지막 황제인 네로(Nero) 시대에 로마 교회는 상당한 발전을 보게 된다. 이와 함께 피정복민의 종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로마제국도 황제숭배를 거부하는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박해를 가하였다. 64년 로마에 대화재가 발생하자 네로는 그리스도 교도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대박해를 감행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브리태니어, 유대 등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네로는 결국 자살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은 내란으로 1년 동안 3명의 황제가 명멸하는 사태를 빚었고 이 내란을 평정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에 의해 프라비우스조(朝)가 세워졌으며 황제 도미티아누스(Domitianus)의 암살로 끝났다.

그 후 소위 5현제(五賢帝)라고 불리는 네르바(Nerva), 트라야누스(Trajanus), 하드리아누스(Hadrianus),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시대가 열렸다. 이들은 원로원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내적으로 안정을 다지고 대외정복 사업도 전개하였다. 이리하여 트라야누스제(帝) 시대에는 로마제국 사상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다. 대외무역과 상업도 번창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는 반복되었고, 1세기 말경부터 교회는 지하의 묘지(catacombs)로 숨어들기 시작한다.

5현제시대가 끝나고 막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군벌(軍閥)들이 등장하여 권력투쟁을 벌이는 ‘군인황제시대’가 전개된다. 혼미한 정국이 계속되는 가운데 즉위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는 제국의 단결과 국민의 충성심을 강화하기 위해 국교가 필요함을 확신하고 주피터 숭배사상을 부활시켰다. 그리스도 교도들은 이를 따르지 않았고, 이러한 사실에 대해 다신론자인 황제는 4개의 칙령을 반포하여 그리스도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그 뒤를 이어 갈레리우스(Galerius) 등 6명의 황제들이 권력 다툼을 전개함으로써 정국은 더욱 혼미해졌다. 이러한 정국을 바로잡은 사람들은 서부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대제와 동부의 리치니우스(Licinius)였다. 이들은 313년 밀라노에서 만나 서로 화해하기로 하였다. 아울러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소위 ‘콘스탄티누스 관용령’에 합의하면서 311년 갈레리우스가 발표한 관용령의 정신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리치니우스는 계약을 어기고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재개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두 황제 사이에 대규모의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승리로 끝났다. 황제는 323년경 다음과 같은 내용의 칙령을 반포하였다. ① 주교에게 민간재판관과 동일한 권위를 부여한다. ② 재산을 교회에 양도하는 행위와 교회가 노예를 해방시키는 행위를 합법화한다. ③ 독신금지조치를 해제한다. ④ 이교도의 축제에 그리스도인의 참여를 금지한다. 이러한 내용의 칙령은 그리스도교를 사실상 공인한다는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이때부터 교회는 착실하고 견실한 성장을 계속하였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수도를 비잔틴으로 옮겼지만 교회의 발전에는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그 후 테오도시우스(Theodosius)가 황제로 즉위하면서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인정하였다. 그러나 5현제시대 이후 계속되어 온 재정의 적자와 전쟁으로 인한 정국의 불안은 제국의 분열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었다.

395년 동로마의 아르카디우스(Arcadius)와 서로마의 호노리우스(Honorius) 사이의 분열은 원칙상 행정적인 것이었으나 정치적, 지리적, 문화적 이질성이 분열을 고착시켰다. 그 후 100여년간 서로마제국은 게르만족의 침입을 받아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 시대인 476년 멸망하게 된다. 동로마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1,000여년 계속되다가 터키인의 침략으로 멸망한 1453년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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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전례 [한] ∼典禮 [라] ritus Romanus [영] Roman rite

미사성제의 봉헌, 성사와 준성사의 집전, 성무일도의 봉송, 교회 직무의 수행 등에 있어서 로마 교구가 실천하고 있는 공인된 양식. 그 기원은 3세기의 교회 전례에 있으며 이는 공통성을 지니면서도 다양하였다. 로마전례는 교황 대(大) 그레고리오(재위 : 590-604년) 시대 이후 크게 네 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하여 왔다. 12세기에는 라틴어 사용 지역에 널리 전파되었고, 중세기 동안에는 여러 가지 전례 형식으로 파생되었는데 그리 중요하지 않는 부분만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1570년에 교황 비오 5세는 파생된 전례형식 중 대부분을 폐지시켰으나 이때부터 로마식 전례는 갈리아 전례 및 스페인 전례로부터 깊이 영향을 받게 되었다. 초기의 로마 전례는 소박하고 간결한 형태를 띠고 있어서 장황한 갈리아 전례나 시적(詩的)인 동방 전례와 뚜렷이 구별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로마 전례서에는 다른 전례의 장점들이 많이 수용되어 있다. 로마 전례 미사의 주요 특징은 미사 전문(典文)에 산 이와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영성체 직전에 평화의 인사를 각각 두고 있는 점이다. 20세기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 전례개혁이 다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개혁은 교황 바오로 6세가 지적했듯이 로마 전례와 모순되지 않는다. “로마적인 것은 우리의 가톨릭적 본질의 기초”(교황 훈시 Facile Conicere, 1968. 10. 14)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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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라] Epistola ad Romanos [영] the Epistle to the Romans

바울로는 그리스 북부지역인 마케도니아에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둘째 편지를 발송하고 나서 오래지 않아 친히 고린토로 내려가 석 달 가량 머물렀다(사도 20:3). 이때가 아마도 58년 춘분 전이었을 것이다. 바울로가 서기 36년경에 개종했다면 그는 무려 20년 이상 지중해 동부 여러 지역에서 전도한 셈이다. 그는 지중해 동부지역 전도는 일단 마친 것으로 보고 장차 서부지역 극변에 위치한 스페인에 가서 전도할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그전에, 그리스 여러 교회에서 거두어들인 모금을 예루살렘 모교회에 전해 준 다음 로마 교회를 찾아보고 나서 스페인으로 갈 예정이었다(로마 15:22-29). 그리하여 자신이 설립하지 않은 로마교회에 자신을 소개하는 뜻으로 58년초에 고린토에서 편지를 발송했으니, 이것이 곧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러니까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일종의 신임장이라 하겠다. 모처럼 평온한 가운데서 석 달가량 시간적 여유를 갖고 쓴 서간이기 때문에 그의 서간들 가운데서 구조적으로 가장 짜임새가 있을뿐더러 사상적으로 가장 원숙한 서간이다. 그러나 바울로의 사고범주와 언어표현 가운데는 오늘날 통용되지 않는 것이 많기 때문에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신학사적 연구와 해석학적 성찰을 거쳐야 비로소 참뜻이 밝혀지는 경우가 많다.

이제 서간 순서에 따라 그 내용을 집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바울로는 당대 교회에 유행한 예수 그리스도 신조로서 복음의 내용을 밝힌다. “그분은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으며, 거룩함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의 부활 이래 능력을 누리는 하느님의 아들로 책봉되셨습니다”(1:3b-4a). 그러고 나서,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는 누구나 구원을 받는다는 명제를 이렇게 내세운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믿는 이라면 누구나, 먼저 유태인 그리고 헬라인도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느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실상 이 (복음) 안에 하느님의 의가 신앙에서 신앙으로 계시됩니다. ‘믿음으로 의인이 된 이가 살리라’고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1:17-18). 나머지는 모두 이 유명한 명제의 설명이라 하겠다. 바울로는 인간이 자기 업적으로 의롭게 될 도리도 전혀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논리를 끈질기게 편다(1:18-3:20, 3:21-8:39). 이것이 소위 종교개혁 이후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의화론(義化論), 성의론(成義論), 일명 의인론(義認論)이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내용으로 하는 복음을 비교적 잘 받아들이는 반면 예수님과 바울로의 동족인 유태인들이 복음을 배척하는 현상을 두고 바울로 사도는 슬픔과 아픔을 토로하면서 결국에 가서는 이스라엘 백성도 구원받으리라는 희망을 피력한다(9-11장). 12-15장은 훈계편이다. 서로 겸손하고 화목할 것(12:1-21), 로마제국에 대해서도 양심적으로 복종할 것(13:1-7), 무엇보다 법의 완성인 사랑을 실천할 것(13:8-10), 종말을 의식하면서 살아갈 것(13:11-14), 신앙이 약한 이들을 각별히 보살필 것(14:1-15:6), 이방계 그리스도인들과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화합할 것(15:7-13)을 바울로는 부르짖었다. 끝으로, 16장에는 장황한 인사와 부탁(1-16, 21-23절), 이단 경고와 축복(17-20절), 영광송(25-27)으로 짜여 있는데, 이는 후대 어느 독자의 가필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鄭良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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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예식서 [한] ∼禮式書 [라] Rituale Romanum [영] Roman Ritual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례예식서. 교구 사제들을 돕기 위한 사목 지침과 함께 미사와 성사(聖事) 집행을 위한 기도와 예식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런 유형의 책은 12세기에 수도원을 위하여 작성되었는데, 재속신부는 14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 예식서들을 갖게 되었다. 교구 사제들은 처음에 교구 예식서들이 없었기 때문에 지역적 관례에 따라 자기 자신의 고유한 전례 예식서들을 편찬할 수도 있었다. 이렇게 하여 생겨난 여러 가지 예식서들을 통일하기 위하여 1614년 교황 바오로(Paulus) 5세(재위 : 1605~1621)는 추기경 상토리오(J.A. Santorio)의 예식서(1584년), 도미니코 수도회의 카스텔라니의 ≪sacerdotale Romanum≫(1537), 라테란 수도회의 사마리노의 sacerdotale에 근거한 로마예식서를 제정하였다. 그러나 지역적 관습들이 대단히 강하게 뿌리박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예식서는 매우 느리게 보급되었다.

이 책은 1742년 교황 베네딕토 14세에 의해 개정되었는데, 그는 교황의 축복을 위한 두 개의 의식서를 추가하였다. 또한 레오 13세는 1884년 원형판으로 출판하였고, 현재는 로마 교회법에 따라 개정 증보된 1925년판을 표준으로 사용하고 있다. 로마예식서는 12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제1장은 성사 집행을 위한 일반적인 지침을, 제2장은 세례성사, 제3장은 견진성사, 제4장은 고해성사, 제5장은 성체성사, 제6장은 병자 방문과 병자성사, 제7장은 죽은 이를 위한 예절과 장례, 제8장은 혼인성사, 제9장은 여러 가지 축복들, 제10장은 행렬, 제11장은 호칭기도(litany), 제12장은 구마(驅魔)를 취급하고 있다. 이 밖에도 네 부분으로 된 부록이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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