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원] Taiwan(Formosa) [한] 臺灣

면적은 3만 5,961㎢, 인구는 1,903만 명(1982년 추계), 가톨릭 영세교우수는 29만1,000명, 교구수는 9개, 본당 및 준본당수는 456개소(1982년 현재)이다. 7세기 초부터 이 섬의 존재가 중국인들에게 알려졌고, 1590년 포르투갈인들이 상륙, Formosa(아름다운)이라고 이름붙였다. 17세기 초에 중국대륙으로부터 대규모의 이민이 있었고, 1624년 네덜란드인이 요새(要塞)를 구축했으나 1662년 청(淸)나라 군대에 쫓겨났으며, 이때부터 대만은 청나라 복건성(福建省)의 일부가 되었다. 1858년 영국 · 프랑스와의 천진조약(天津條約)으로 안평(安平) 등 항구를 개항(開港), 청일(淸日)전쟁의 결과 1895년의 시모노세끼(下關)조약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1945년 일본의 패망에 따라 중국령으로 복구되었다. 1949년 국공내전(國共內戰)에 패한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이동, 1955년 미국과 상호방위협정 체결, 1971년 유엔의석을 상실하였다.

대만에 최초로 상륙한 가톨릭 선교사는 1626년 당시의 스페인 식민지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건너온 스페인 도미니코회 수사 마르티네스(Bartolome Martinez)와 그의 동료 선교사 5명이었다. 그들 및 그 후계자들은 대만 북부에서 활동하면서 약 4,500명을 영세케 했으나, 1642년 스페인 수비대가 남부 대만을 장악하고 있던 네덜란드 군대에게 패하여 철수하게 되고, 선교사들은 모조리 포박되어 자바섬의 바타비아(현 자카르타)로 호송되는 바람에 포교사업은 일시 중단되었다. 1662년 청나라에 항거하고 있던 명(明)나라 말기의 무장(武將) 정성공(鄭成功)이 네덜란드군을 몰아내고 대만을 점령, 사자(使者)로서 아모이(厦門)의 도미니코회원 리치(Victorio Ricci)를 필리핀의 투손섬에 파견, 리치는 귀로에 기륭(基隆)항구에 상륙, 잠시 포교하다가 아모이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4년 후 다시 건너와서 포교활동을 재개했으나 1666년 관구장(管區長)의 명으로 마닐라에 전임(轉任), 1673년에 마닐라의 도미니코회는 4명의 선교사를 파견하여 교세회복을 도모했으나 중국관리의 심한 박해로 7개월 후에 철수, 1694년에도 선교사를 보냈지만 역시 포교에 실패하였다.

그로부터 185년간은 선교사 파견이 중단되었고 1859년에야 천진조약으로 개항(開港)이 된 것을 계기로 로마의 포교성성(布敎聖省)의 명을 받아 선교사 사인즈(Fernando Sainz)가 남부의 고웅(高雄)에 상륙, 200여 년 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박해 속에서 어려운 포교활동을 벌인 끝에 북쪽 대남(臺南)에까지 선교기반을 구축하였다. 또한 1868년 북부에도 포교하기 위해 헤르세(Francisco Herce)를 파견하였다. 이듬해 영국함대가 안평진(安平鎭)을 점령하고 군대를 대남에까지 진격시키자, 청국관리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박해의 손도 늦추어져 비로소 장래 포교에 서광이 비쳤으며, 이 기회를 이용해서 기륭에 성당들이 중설되었다. 그러나 선교사 사인즈가 상륙한지 36년이 지난 1895년의 교세는 겨우 1,300명을 헤아리는 데 그쳤다. 그 해에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이 대만을 영유하게 된 이래로 교회는 전에 없이 평화를 누렸으며, 그 후 약 40년간에 신도가 5배로 불어났다. 1913년 그때까지 아모이 대목구(代牧區) 관할 하에 있던 대만교구는 독립하여 대만 지목구(知牧區) 관할 하에 분리되었고, 1945년 일본의 패망에 따라 중국 정부가 이 섬을 다시 장악하게 되었다. 1947년 1월 대만 지목구가 주일(駐日) 교황사절의 관구를 떠나 주중(駐中) 교황공사 관할에 들어갔고, 1949년 국민당정부가 대만에 자리 잡게 되었으며, 그 해 12월에 대만 지목구는 고웅(高雄) 지목구로 개칭되는 동시에 대북(臺北) 지목구가 신설되고, 1950년에는 고웅 지목구가 다시 분할되어 대중(臺中) 지목구를 신설, 그 포교에는 메리놀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1961년 대남과 고웅은 중국인 주교의 주교구로, 대중과 가의(嘉義)는 1962년에, 화련(花連)은 1963년에 각각 주교구가 되었다.

[참고문헌] D, Aduarte, Historia de la Provincia del Santo Rosario de la Orden de Predicadores en Philipinas, Japon y China, Manila 1640 / J. Fonseca, Hiotoria de los PP. Dominicos en la Filipinas, Madrid 1870~1872 / J.W. Ballantine, Formosa, Washington 1952 / P. Fernandes, One Hundred Years of Dominican Apostolate in Formosa, Quezon City, Phil. Is. 1959 / H.K. Tong, Christianity in Taiwan: A History, Taipei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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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교황 [한] 對立敎皇 [라] antipapa [영] antipope [관련] 교황선거

교회법상 부당하게 로마 교황직을 주장하거나 행사한 자를 말한다. 역사적으로 이런 경우는 여러 가지 원인에서 기인하며 모두가 불신앙 때문은 아니었다. 이러한 혼란은 명백한 교황 선거법의 미비(未備)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 숫자는 여러 가지로 추정되는데, 1947년 이래의 바티칸 ≪교황청 연감≫(敎皇廳年鑑)에 따르면, 대립교황은 37명에 달한다. 특히 서구 대이교(1378~1417년) 때 그 숫자가 많았다. (⇒) 교황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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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한] 待臨節 [라] adventus [영] advent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예수성탄 전 4주간을 말한다. 옛날에는 장림절(將臨節)이라고 하였다. 서방 교회에서는 대림절의 첫날은 성 안드레아 축일(11월 30일)에서 가장 가까운 일요일이었으나 동방 교회에서는 좀 더 빠른 11월 중순부터 이 절기가 시작된다. 대림주일(主日), 즉 대림절이 시작되는 일요일은 교회력(敎會曆), 즉 전례주년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다. 로마에서 대림절은 교회력의 구성부분으로서 이미 그레고리오 대교황(재위 : 590~604) 시대에 나타난다. 로마에서나, 로마전례를 채택한 지방에서는 대림절을 5주간 내지 4주간으로 한하고 있다. 로마에서는 12월의 4계(季)의 단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가장 훌륭한 대림절의 전례문으로 꾸며져 있었다. 4계의 수 · 금요일에는 성탄을 준비하는 신비가 특히 강조되었다. 대림절은 사순절과 같이 엄숙하게 지켜지기는 하지만 사순절보다는 덜 엄격하며 서방 교회에서는 더 이상 단식을 하지 않는다. 축제를 지내는 관습도 지양되었으며 사제는 자줏빛 제의(祭衣)를 입는다. ≪로마전례서≫에 따르면 ‘하늘 높은 곳에는 천주께 영광’이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대영광송이 미사에서 생략됨으로써 이 절기의 근엄한 성격을 나타낸다. 이 기간은 성탄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을 준비하는 때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이사야서와 세례자 요한의 경고 등이 독서로 채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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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례미사 [한] 大禮~ [관련] 대미사

⇒ 대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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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령동본당 [한] 大領洞本堂

1926년에 창설되어 1946년 폐쇄된 연길교구 소속 본당. 주보는 성 세자 요한. 창설 당시의 소재지는 만주 간도성 연길현 대령동(滿洲 間島省 延吉縣 大領洞)이었으나 1935년 연길현 다조구(茶條溝)시로 이전되었고 이때 본당명이 다조구본당으로 개칭되었다. 대령동은 1910년 이래 팔도구본당의 공소였다가 1926년 팔도구본당 보좌 에머를링(P. Emmerling, 嚴) 신부가 주임으로 파견되어 본당으로 창설되었는데 당시의 교세는 10여개의 공소에 교우수 1,500여명이었다. 1937년 랍(C. Rapp, 朴)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 3년간 사목하면서 성당, 사제관, 사무실을 건축하고 청년회와 소년회를 조직한 후 1931년 명월구본당을 분리, 신설시킴과 동시에 명월구본당으로 옮겨갔고 이어 3대 주임 아쇼프(S. Aschoff, 安) 신부와 보좌 뮐러(E. Muller, 穆) 신부가 부임하여 사목했으나 1934년 둘 다 병사, 콜러(S. Koller, 李) 신부가 4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1935년 공산군의 습격으로 성당과 부속건물이 소실되자 콜러 신부는 본당을 가까운 다조구로 이전시키고 본당명을 다조구본당으로 개칭하였다. 콜러 신부는 공산군과 마적의 습격, 그리고 본당 이전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정체된 본당활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교세신장에 주력하는 등 본당 재건을 위해 노력, 1년 후인 1936년에는 옛 상태를 회복하여 공소 8개소에 교우 수 965명으로 교세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1946년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에게 성당을 비롯한 모든 교회재산을 몰수당함으로써 본당은 폐쇄되어 현재까지 침묵의 교회로 남아 있다. 본당 내 심신단체로 청년회, 소년회 등을 포함한 7개의 단체가 있었고 이외에 해성학교, 야학 등의 교육기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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