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년 에페소공의회에 의해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배척된 후에도 계속 네스토리우스의 학설을 따른 그리스도교회. 이들은 에페소의 주교 이바스(Ibas), 니시비스의 주교 바르수마스(Barsumas) 등의 노력으로 완결된 형태로 발전된 네스토리우스파 신학을 받아들였고 페르시아와 소아시아 지방으로 옮겨가 많은 교회를 세웠다. 현재 아시리아 교회란 이름으로 존속하고 있다. 한편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중국 당나라에도 전래되어(635년)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교회를 세웠다. (⇒) 경교
네스토리우스주의 [한] ~主義 [라] Nestorianismus [영] Nestorianism [관련] 경교
강생(降生)한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라는 두 가지 분리된 인격이 존재한다는 교리. 그리스도는 하나의 인격으로서 동시에 신이자 인간이라는 정통교리와 대치되었다. 이 이단설의 발단은 안티오키아 출신의 네스토리우스(Nestorius, ?~451?)에 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였던 그는 마리아를 ‘테오토코스’(theotokos,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은 이단의 기미(아폴리나리스주의)를 띤 것이므로 사용을 금지하여야 한다는 아나스타시오(Anastasius)의 주장을 두둔하였다. 당시 마리아론의 발달로 이 말은 정통교리를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는 특히 알렉산드리아학파와 치릴로(Cyrillus)의 반발을 샀다. 네스토리우스의 교리가 실제로 무엇이었으며, 어느 정도 이단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다. 비록 그리스도의 단일성을 계속 주장하였지만, 그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인간 그리스도 안에는 두 개의 다른 본성과 위격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본질적 일치’라는 말 대신에 ‘의지의 일치’라는 그리스도 양자설(養子說)의 용어를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정통교회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네스토리우스파(派)는 에페소 공의회(431년)에서 단죄를 받았으며, 이후 네스토리우스파는 동부 시리아 에데사의 이바스(Ibas) 신학파 주위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면서 교회를 설립하였다. 489년에는 동로마제국의 제논(Zenon)황제에 의해 에데사에서 추방되었으며 페르시아로 이주함으로써 콘스탄티노플 교회 및 비잔틴제국의 신앙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여기서 ‘테오토코스’를 공식적으로 배제하고 두 본성과 한 인격이라는 이단원칙을 세운 612년의 교회회의를 통해 강대해졌으며, 사산왕조의 박해와 터키 및 몽고의 침략을 겪으면서도 아라비아, 터키, 티베트, 인도를 거쳐 중국에까지 전파되었다. 특히 중국에서는 경교(景敎)로 불렸다. (⇒) 경교
[참고문헌] J.S. Assemani, Bibliotheca Orientalis III, 1, 1725, 2, 1728 / W.A. Wigram, An Introduction to the History of the Assyrian Church, A.D. 100~640, 1910 / M. Jugie, Nestorius et la controverse nestorienne, 1912.
네리 [원] Neri, Filippo de [관련] 오라토리오회
Neri, Filippo de(1515~1595). 성인. 로마의 사도. 축일은 5월 26일. 피렌체의 가난한 공증인의 아들로 태어나 산 마르코(San Marco)의 도미니코회에서 교육받았다. 부유한 상인이었던 백부는 자신의 가업을 이어 주기를 원했지만, 그는 일생을 신에게 바칠 것을 결심하고 1533년 로마로 갔다. 1535년부터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나 3년 뒤 책을 모두 팔아 버리고 밤에는 성 세바스티아노 카타콤바에서 기도하며 자선과 설교에 힘썼다. 1544년 기적적인 탈혼(脫魂) 상태를 경험하였으며, 1548년에는 순례자와 회복기의 환자들을 돌보는 트리니티 자선단체의 창설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1551년 서품받은 뒤 산 지롤라모(San Girolamo)의 사제공동체로 갔으며 거기서 고해성사를 집전하는 것이 그의 주된 임무였다. 소녀과 남자들을 위한 신심회를 열자 많은 사제들이 호응, 오라토리오회(會)(Oratorians)가 탄생하게 되었다.
오라토리오회는 1575년 교황 그레고리오 8세에 의해 인가되었고, 필립보 네리는 로마에서 가장 인기있는 인물로 부상하였다. 그의 충고와 지시는 일반 사람들뿐만 아니라 교황과 추기경들에게도 영향력이 있었으며, 헨리 6세에 대한 대사를 주장함으로써 1593년에는 프랑스와 교황청 사이의 심각한 분쟁을 막을 수 있었다. 그는 상냥하고 쾌활한 성품을 지녔으며 생전에 이미 성인으로 존경을 받았다. 1622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 오라토리오회
네레오와 아킬레오 [라] Nereus et Achilleus
생몰연대가 불명인 로마의 두 순교자. 성인. 축일은 5월 12일. 아마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재위 : 284~305) 박해 때의 순교자인 것 같다. 그들은 이미 고대에서부터 숭경되어, 그 이름이 5세기 로마의 축일표(祝日表)에 기재되었고, 젤라시오 사크라멘타리움에는 그들의 축일 미사전례문이 수록되어 있다. 교황 다마소 1세(재위 : 366~384)가 쓴 묘비명(墓碑銘)의 단편(斷片)에는, 그들은 참주(僭主)의 ‘무신(無神)의 진영’을 떠나 순교자로서 영광되게 순교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병사였다. 이 기록은 역사적 전승에 입각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들의 무덤이 도미틸라(Domitilla, 베스파시아노의 손녀,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그리스도 교도라 해서 추방)의 카타콤바에 있기 때문에, 완전히 전설적인 순교기록은 그들을 도미틸라 및 같은 카타콤바에 매장된 순교성녀 페트로닐라와 결부시키고, 그들의 생시를 서기 1세기라고 해서 아무런 역사적 근거가 없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그들 묘소위에 4세기 때 카타콤바를 밑바닥으로 하여 매우 흥미있는 삼신랑(三身廊)의 성당이 세워졌다. 이것은 로시에 의해 발굴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