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을 다루는 그리스도론의 일부. 이는 아담 안에서 범죄한 인간의 타락. 인류의 죄, 구세주의 필요성, 죄와 죄의 결과를 없애주는 은총의 교리, 특히 인류의 구속자와 중개자인 그리스도의 신비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구원경륜 [한] 救援經綸 [영] economy of salvation
천지창조 이전 영원으로부터 하느님의 의지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구원계획(he oikonomia, 에페 3:9, 1고린 2:7-8). 이는 하느님이 세우신 계획으로서(이사 41:4) 인간의 저항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실현시킬 것이며(시편 33:9) 인간 역사 속에서 이미 정해진 목적대로 실현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창세 12:1-3). 마침내 강생하신 말씀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계획은 실현되었다. 이 말씀은 죄의 희생물로서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며(로마 8:3) 고통 받으시고 죽어서 인간을 위해 보편적인 구원을 성취하신 몸으로 영광을 받으시고 성부께 돌아가신 분이다. 구원경륜은 구원 실현의 신비를 드러내기도 한다.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행위에 피조물을 참가시켰는데, 이들을 통하여 구속의 결실을 두루 전파시켰다. 이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제적인 권능을 행사하여 행동함으로써, 특히 구원의 은총을 만민에게 전하도록 위임받은 성사적 표징으로서 구원행위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확장되는 것이다. 특히 구원경륜의 개념은 그리스도의 신비전체를 의미한다(에페 1:10). 이 신비로 인하여 자연과 은총 양자의 세계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삼(聖三)을 지향하게 된다.
구원 [라] salvatio [영] salvation [한] 救援
“도와 건져 준다”로 풀이되는 구원이란 말은 누가 남을 재앙에서 벗어나게 해 주고 아울러 먼저 상태로 회복시키거나 보다 나은 상태에 놓인다는 것을 뜻한다. 이 ‘구원’이란 단어는 위험을 제거하는 것과 마음의 위안을 제공하는 양면이 있는 동시에, 건져 주는 이와 건져진 이가 서로 불가결한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구원행위를 표현하는 말은 다양하나 그 중에서도 일반적으로 흔히 쓰이는 ‘살린다’라는 동사가 상황의 긴박함을 잘 말해 주는 바와 같이, 구원은 인생의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문제와 관련된다. 인간은 살다 보면 누구나 인생에 대하여 불안감이나 부족함을 느끼면서 행복을 갈망하고 있다. 동서고금을 통해 볼 때, 현인들은 만족스럽지 못한 인생에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제하려고 노력했으며 그들이 발견한 구제 방법들을 아낌없이 남에게 가르쳐 왔다. 그리고 자의로 해탈에 도달하려는 불교마저도 중생을 고해에서 극락세계로 인도하고 제도하는 보살의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남은 도와주되 자기 자신을 위하여는 도움을 거절하는 현인들을 볼 때, 공교롭게도 그들은 현세에 대하여 비관과 절망에 빠져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공통된 점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구제하기 위하여 구태여 우리가 속해있는 현실세계를 등지고 살아야만 되는가? 또한 고대 그리스 현인들처럼 물질세계에 속하는 육체를 버리고 영혼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을 후세에까지 미루어야 하는가? 이를 잘못 이해하면 구원이란 선각자의 고답적인 지혜와 도피생활을 의미할 수 있다. 그래서 구원을 아예 기대하지도 않고 인생을 운명으로 초연히 받아들이며 죽음을 헌거롭게 대면하는 태도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로 보인다. 이렇게 볼 때, 구원은 현세에 머무르는 인간의 실패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역사 속에 우리가 살아야 할 인생을 통해서 영원히 지속되는 행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이색적인 주장은 성서 가르침의 주축이요 교회 가르침의 기초이다. 인간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현세를 낙관적으로 볼 때, 자기가 사는 세계에서 소외된 인간을, 바로 이 세계에서 출발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게 하는 비결은 하느님의 개입에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현세상에 개입하시어 모든 인간을 위하여 당신과 일치하는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마련해 주셨다는 사실은 ‘속량’(贖良)이란 개념뿐 아니라 구원이란 단어로도 표현된다.
외연이 넓은 구원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는 죄의 용서(루가 9:49-50, 19:9-10), 성세(1베드 3:21), 은총(에페 2:8, 사도 15:11), 부활(에페 2:6), 하느님과의 일치(베드 1:4-5) 등은 실제로 구원의 여러 과정을 말해 줄 뿐이다. 또한 구원이란 말을 대신하여 쓰이는 해방, 화해, 완성은 신인관계와 대인관계의 여러 관점을 표시하며 이들은 구원 개념에 귀착된다. 구원이란 말은 부정적으로 알아들을 위험이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절대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강조하기 위하여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 전통에서 볼 때도, 교부시대부터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르기까지 이어받고 개발해 온 독특한 표현들, 예컨대 ‘구원계획’, ‘구세사’, ‘구원경륜’, ‘구원의 시기’, ‘구원의 수단’, ‘구원의 표시’ 등을 살펴 보건데, ‘구원’이란 단어는 다소 복잡하고도 함축성 있는 단어임에 틀림없다.
1. 인간을 위하여 개입하시는 하느님 : 구원이란 우선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을 뜻한다. 하느님의 개입이 가능하냐는 문제가 처음부터 제기된다. 인간의 자유를 해친다거나 단순히 하느님의 초월성을 보호한다고 해서, 하느님의 개입을 거부하는 것은 미흡한 신관(神觀)에서 비롯된다. 하느님의 개입, 심지어 하느님의 존재문제마저도 선결문제는 아니다. 성서나 신학은 그 가능성을 따지지 않고 사실부터 출발하여 개입하시는 하느님 정체의 일부라도 관상(觀想)하며 표현하려 한다. 그래서 철학가들의 신이 못하시는 일도 그리스도인들의 신은 해 내신다는 결론부터 인정해야 한다. 인간이 하느님의 개입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하느님의 활동 및 하느님의 정체를 규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개입으로 하느님다운 하느님, 즉 자기 피조물에 구애받지 않으실 뿐 아니라 자기 신성(神性)에도 구애받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발견한다. 인간이 신성과 인간성의 상봉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신으로 현존하시는 하나이신 하느님은 ‘관계의 하느님’이시니만큼, 신성을 상실하지 않고서도 피조물들과 새로운 차원에서 관계를 맺으신다. 성부께서 보내신 성자께서 인간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머무르시고 이제부터 영원토록 인간으로서도 계신다는 사실이, 하느님의 개입 자체는 창조와는 다르게 인간을 상대방, 즉 인격자로 삼으시어 인간에게 당신의 생명을 부여하기 위하여 함께 하신다. 인성(人性)을 취하시어 인간이 되신 아드님께서는 영원히 변함없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본성의 차원에서 벌어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틈을 없이 하셨다. 즉 그리스도의 인성은 삼위일체의 대내관계를 변질시키지 않으면서 특히 인간 구원에 있어서 신인관계의 발판이 된다. 인격의 차원에서 인간을 당신의 상대방으로 삼으심으로써 인간의 개성을 요구하며 또 확정하신다. 왜냐하면 구별과 일치의 원천이신 성령께서 신인관계를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개입으로 인간은 개성을 상실하기는커녕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존재로서 살고, 몸의 부활로서 전인(全人)으로 완성된다. 하느님은 인간을 인격자로 보심으로써 인간이 누리는 자유의 불가침해성을 보장하신다. 하느님의 개입은 인간의 진상을 은폐하기보다도 오히려 인간이 범하는 죄악을 문제시함으로써 죄악을 필요 이상으로 확대하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죄악의 성격을 드러내시면서 죄악을 없애 주신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따지시는 것은 죄악이 인간의 구성요소가 아님을 드러내시는데 있으며, 인간에게 용서를 베푸시는 것은 단지 인간을 본상태로 되돌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상태로 올려 주심을 뜻한다.
하느님의 개입은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을 살리시는 하느님을 소개해 주는 성서가 하느님의 의도를 부분적으로나마 암시하고 있다. 사도 바울로에 의하면, “하느님께서는 미리 정하신 사람들을 불러 주시고 부르신 사람들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 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진 자들을 영광스럽게 해 주셨다”(로마 8:30).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네 단계로 나누어진 구원과정은 하느님께서 구원될 자들을 예정하신다는 사실부터 시작된다. 예정론은 하느님의 절대적인 자유, 헤아릴 수 없는 자비, 구원의 무료성(無料性)을 뜻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1요한 4:19)는 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하느님이 사람을 예정하셨다 해서 어떤 사람은 이미 배척하셨다고 말할 수도 없거니와,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는 의도를 존중하여, 살리시는 하느님께 절대로 의지할 뿐이다. 한편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게 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신다.”(1디모 2:4) 는 말씀과 “예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처벌하실 것이다.”(2데살 1:8-9)는 말씀은 서로 모순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하여 다음의 몇 가지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되신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이 구원을 제공하시지 않으신다. 당신과 인간 사이에 중개역할을 맡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1디모 2:5).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되었듯이(에페 1:4-12 참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사도 17:31, 1베드 4:5, 히브 6:2). 따라서 우리가 그분에 대하여 취한 태도에 따라 우리의 구원이 결정된다. 인간이 예수를 위하여 하는 일도 결정적이다. 그러므로 확실히 우리 세상에는 지옥이 없다. 즉 이 지상에서 하느님께로부터 결정적으로 떼인 자는 없다(로마 5:8-11).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2고린 5:15)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모든 인간이 구원을 향하게 되었는데, 신앙으로 응답하기만 하면(로마 10:9-10) 구원이 아니라 하느님의 순수한 선물이다(에페 2:5, 사도 15:11). 성서는 무엇보다도 구원의 무료성을 강조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구원문제를 다룰 때 하느님의 입장과 인간의 입장을 꼭 구별하면서, 인간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중개자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2. 역사 속의 모든 사람을 위하여 :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느님의 결의 및 심판과 역사 안에 머무르는 인간의 반응을 같은 차원에서 언급할 수는 없다. 즉 구원의 영원성과 시간성, 그리고 하느님의 역할과 인간이 몫을 구별해야 한다. 따라서 하느님과 인간을 일치시키는 구원을 세상에 제공된 구원과 심판으로 확정된 영원한 구원으로 나누면서, 이 두 단계의 연관성을 강조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정론이 구세사를 필요 없게 만드는 결정론으로 변하여 신뢰보다는 공포감을 일으킨다든가, 또는 하느님의 요구를 무시한 채 구원을 현세상에 제한시키는 세속주의가 생긴다든가, 또는 하느님이 보편적 구원의 의도를 가지신다 해서 지옥의 가능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미망에 빠져 무책임하게 사는 위험들이 종종 있어 왔다.
그 다음, 하느님께서 구원을 제공하시는 배경도 고려해야 한다. 선하게 창조된 인간은 자유를 악용하여 창조자이신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고 죄를 범하고 말았다. 죄 속에 사는 온 인류(로마 3:10-20)가 유죄 판결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로마 5:16.18).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역사 속에서 행하실 심판을 포기하시고, 당신 아드님을 보내 주셔서 죄를 단죄하시고(로마 8:3) 모든 인간을 죄의 멍에에서 해방시키셨다(로마 5:21). 그분은 우리 죄의 용서뿐 아니라 당신의 생명까지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벌하는 정의가 아니라 살리는 정의를 드러내 보이셨다(로마 3:21-24). 하느님께서 거저 베푸신(1디모 1:9) 구원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로마 10:9) 이를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더 이상 유죄 판결이 없다(로마 8:1 · 34). 그러나 이 기회를 거부하는 자는 역사를 끝맺는 최후의 심판을 면할 수 없다(마르 3:29, 8:43-48). 따라서 지옥에 가는 자는 이중 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최후심판은 창조주를 거부하고 그분께 도전하는 자들과 하느님과 결합시켜 주는 구원을 거부하는 자를 단죄할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무력하고 결백한 자를 단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를 되찾는 길을 알면서도 하느님이 베푸시는 생명을 거부하는 자들만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세상에서 진행 중인 구원의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죄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일단 포기하시고 구원의 길을 더 주심으로써 인류의 역사를 활성화시키셨다. 실제로 죄 때문에 불안 속에 떨며 현실을 외면하는 인간은 위축된 생활을 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부르시고 만민에게 축복을 약속하시면서부터 (창세 12:2-3) 결판을 보게 될 종말까지 역사를 안내하심으로써 역사의 양극을 제정하시고, 당신 아드님을 보내심으로써 역사 한 가운데에 규범과 기준을 세워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일반 역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이용하시어 당신 뜻을 이루신다. 사실 성신께서는 예언자들을 시켜서 구원과 멸망을 가지다 주는 사건들을 가리신다(요한 16:12-13). 즉 사건과 사건의 의미를 밝히는 말씀으로 구성된 계시를 통해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 상황 속에서 구세사를 형성하신다. 하느님의 개입방법(여러 차례의 제약들)과 범위(이스라엘을 통해서 만민에게)를 드러내는 구약시대가 구세주이신(루가 2:11) 하느님의 도래를 준비하였다.
예수(“주님이 살리신다”, 마태 1:21)라고 불러진 하느님의 아들은 환자들을 치유하신 때나(마르 3:4, 5:23 · 28, 6:56, 10:52), 제자들을 구제하실 때나(마태 8:35, 14:30), 자기 자신에 대하여 신앙을 구함으로써 구원의 성격을 드러내셨다. 그분은 잃어버린 것(루가 9:56, 19:10), 즉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요한 3:17, 12:47) 오셔서 말씀하신다(요한 5:34). 남을 구원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시지는 못하지만(마르 15:30) 죽음과 부활로 ‘영원한 구원의 원천’이 되셨다(히브 5:7-9). 실제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예수의 이름밖에 없다(사도 4:12). 그래서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을 유태인(사도 13:26)과 외교인(사도 13:47, 28:28)을 위한 구원의 말씀이다(로마 1:16). 인류 구원에 있어서 당신 몸인 교회를 살리시는 그리스도(에페 5:23)께서 필요하듯이, 교회도 필수적이다. “교회 바깥에는 구원이 없다”는 격언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관계없이 구원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구약시대부터 이미 보여 주신 대로 인간을 단체로 부르시고 구원하셨듯이, 오늘날도 온 인류를 당신의 백성으로 모으시기 때문이다. 인간이 되심으로써 모든 인간과 관계를 맺으신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이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온 인류를 구세주(사도 5:31)가 되셨기에, 교회도 모든 이에게 파견된다. ‘일치의 성사’, 곧 구원의 성사인 교회는 인류를 대표하여 주님이 마련하신 구원을 기념하고 실현하는 제사를 올리고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따라서 모든 믿는 이들은 바울로가 자기 민족인 이스라엘뿐 아니라(로마 11:14 · 26) 외교인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였듯이, “하느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사도 28:28) 세상 끝까지 구원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모든 외교인들에게 늘 회개의 은총을 베푸시며, 교회에 들어오지 못한 많은 이들이 양심대로(로마 2:14-16) 살기로 이미 ‘실존적 기본 결단’을 내리고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고 있다. 그래서 모두가 선교사인 믿는 이들은 그들의 죄를 일깨워 주면서 하느님이 그들에게 베푸신 은혜(곧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발견하도록 이끈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은 교회를 박해하는 자들을 단죄하기보다도 그들이 회개하고 교회 품에 들어오도록 구원의 길을 터 주어야 한다(마태 5:44-45). 이렇게 함으로써 믿는 이들은 남을 구원한다기보다도 구원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응답할 뿐이다. 믿는 이들은 성서를 연구하면서(2디모 3:15) 자기 구원(필립 2:12)과 남의 구원을 위해 일한다(1고린 9:22, 10:33). 오늘날이 바로 ‘구원의 날’이기 때문이다(2고린 6:2). 구원의 상속자(히브 1:14)가 된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받았다.(로마 8:24). 그래서 온갖 선행을 하면서(야고 2:14)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주신 날”(히브 9:28)을 기대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의 피로써 의로움을 얻었으니 그리스도의 덕분으로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될 것이다(로마 5:9). (文世華)
[참고문헌] T.G. Pinches et al., Hastings ERE, 11 / EncDict Bibl 2101-07 / X. Leon-Dufour, ed., Vocabulaire de theologie biblique, Paris 1962 / M.E. Boismard, St. John’s Prologue, tr. Carisbrooke Dominicans, Westminister Md. 1957 / L. Cerfaux, Chrit in the theology of St. Paul, tr. G. Webb and A. Walker, New York 1956 / J. Danielou, Christ and Us, tr. W. Roberts, New York 1961 / F.X. Durrwell, The Resurrection, A Biblical Study, tr. R. Sheed, New York 1960 / A. Gelin el al., Son and Saviour, tr. A. Wheaton Crev. ed., Baltimore 1962.
구약성서 [한] 舊約聖書 [라] Vetus Testamentum [영] Old Testament
옛 계약의 내용을 언어의 다양한 형식을 빌어와 적어 놓은 거룩한 책이다. 여느 책과는 달리 이 책이 종교의 경전인 이상 구약성경(舊約聖經)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확하다. 외적으로 보아 성서는 그 시대와 저자들이 매우 다양한 책들의 대전집(大全集)으로 나타난다. 이 전집의 가장 오래된 본문과 마지막으로 씌어진 본문들 사이에는 거의 천년이나 되는 세월이 흘렀다. 그리스인들은 이 전집을 ‘책들’(ta biblia)이라 이름하였으니, 이 말이 현대어 ‘성서’(Holy Bible)의 어원이다. 그리스도 교인들은 ‘거룩한 책들’을 또 다시 두 개의 전집으로 분류하고 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이다. 옛약속, 새약속의 낱말에서 약속이란 표현은 고대 라틴어 역본을 지칭하던 ‘테스타멘툼’(Testamentum, 遺言)에서 유래했으니, 당대의 그 라틴어휘는 ‘인간들과 맺은 하느님의 계약’을 의미하였다. 그래서 성서는 ‘옛계약의 책들’과 ‘새계약의 책들’로 각기 나누어 이름할 수가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아직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유다이즘의 입장과는 달리 구약성서를 주님 예수의 등불 아래서 읽고 있다. 그리하여 구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예언하였으니, 그 책의 변형(變形)의 결과로 신약성서가 세상의 빛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믿는 이는 성서를 읽을 때, 두 계약의 밀접한 관련성을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옛 계약의 책들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들을 글로 적고 있다. 하느님은 제일 먼저 이 백성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셨다.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종살이에서 해방시켰고, 이스라엘을 사나이계약의 파트너로 삼아 당신의 뜻을 계시(啓示)하였으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의 땅을 선물하심으로써 그들의 역사를 인도하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일회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백성의 유일한 역사가 전제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그 뿌리를 찾을 길이 없다. 이스라엘 백성은 길고도 험난한 이 역사를 통해 그들의 하느님으로부터 한 분의 구세주, 곧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기원후 1세기 초엽이 되자 상당수의 유대인들과 또 점차로 그 숫자가 불어나던 이방인들이 ‘나자렛의 예수’라 불리던 그 인물을 메시아로 인정하였다. 그들이 히브리어의 ‘메시아’와 동일한 뜻을 지닌 ‘그리스도’라는 칭호를 예수께 붙였다. 또 그들은 예수의 역사적인 개입, 특히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느님께서 온 인류와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들을 모은 책들이 ‘새로운 계약’ 곧 ‘신약성서‘의 전집으로 세상의 빛을 본 것이다.
독자들이 성서의 첫 페이지에서부터 발전하게 되는 하느님은 ‘말씀을 통해 활동하시는 분’이다, 그 분이 말씀하시면 천지가 개벽되고 사람들이 인생의 길을 걷기 시작하며 행동을 하게 되고 또 사건들이 발생한다. 하느님은 목청을 돋우어 아브라함과 모세, 판관들과 예언자들과 말을 건네고 있다. 그분은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이사 45:1)와 같은 이방인들에게도 말씀하시기를 꺼리지 않았다.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언어를 통해 그 꼴을 갖추었으니, 친히 선택한 사자(使者)들을 시켜 이스라엘 사람과 세세대대의 전 인류에게 오늘도 말씀하시고 있다. 신약성서의 어떤 본문들(요한복음, 히브리서)은 “예수께서 하느님의 가장 탁월한 말씀이라”고까지 단언하고 있다. 말씀 곧 언어는 하느님과 인간이 공동으로 나누어 가지는 도구(道具)요, 그 둘의 욕망을 표현하는 매체이다. 말이란 누가 쓰고 나면 또다시 사전(事典) 속으로 되돌아가 버리는 그 무엇이 아니다. ‘누가 말한다’는 것은 그 화자(話者)의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요, 반드시 모종의 실행(實行)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말씀이 진리의 빛(요한 1:9)으로 세상의 어둠을 비추기 위하여 사람이 되셨다. 또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전하고자 했던 모든 말씀은 나자렛 예수라는 그 ‘유일하신 분’ 안에 집약되어 있다.
성서의 작가들은 말씀의 증인(證人)들이다, 불행하게도 그들 중의 상당수가 필명(筆名)을 밝히지 않고 있다. 하지만 기라성 같은 그 작가들의 증언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인류는 하느님의 말씀을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말씀은 인간의 양심을 뒤흔들어 놓고 밝히 비추며 또 인간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성서적 메시지의 정확한 번역은 교회의 가장 중대한 사업이다. 번역가는 원전의 메시지를 왜곡하거나 훼손해서도 안 되고 또한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을 움직일 수 있는 그 ‘의미의 효과’를 놓쳐서도 안 된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가장 오래된 문집이다. 그런데 이 첫 문집은 고대 이스라엘의 사람들이 써서 남긴 여러 책들 중에서 골라 묶어 놓은 선집(選集)이란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민수 21:14, 여호 10:13, 역대 29:29 참조). 시중에 나돌던 여러 책들 중에서 “이 책들만이 하느님의 말씀이다”라고 확정하는 것을 정경(正經, canon)의 고정이라고 부른다. 구약정경의 첫 선정(選定)은 에즈라시대(기원전 5세기 후반경)에 와서 처음으로 있었다. 정경의 목록을 고정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종교의 지도자들이 공식적으로 또 교회들의 만장일치로 이러저러한 책들만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결정하면, 그 책들이 향후 신자들의 믿음과 생활을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에즈라시대의 정경목록은 성서의 첫 다섯 권의 책을 율법(Torah, 느헤 8장 참조)의 제하에 묶었다. 다음 시대에 와서 성서의 예언서들이 ‘예언자들의 문집’이란 제하에 정경목록 속으로 들어왔다. 유다이즘의 지도자들은 율법의 해설과 연장(延長)이란 관점하에 예언서들을 선정하였다. 예수의 시대에 이르러 누가 ‘성서’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의 문집(文集)’을 지적하였다(마태 5:17, 7:12 …등). 또 그 다음에, 정경의 목록 안에 들어온 책은 시편집이었다(루가 24:44). 시편들이 예루살렘의 성전과 유대교의 회당들에서 ‘공식기도서’의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시중에 나돌던 상당수의 책들이 과연 모두가 하느님의 말씀인가?”라는 의문이 생겨났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소위 율법학자로 통하던 사람들이 기원후 90년경 팔레스티나의 얌니아(Jamnia)란 곳에 모였다. 거기서 그들은 당시의 팔레스티나에 살고 있던 유태교 신도들을 위하여 성서의 경전목록을 최종적으로 확정하였다. 이 정경은 성서의 서책들을 세 가지 항목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 항목은 ‘율법’과 ‘예언자들’ 그리고 ‘그 외의 문집들’이었다. 이 문집은 150편의 시편들만 포함하고 있었다. 얌니아의 정경은 모두 히브리어로 쓰여졌고 다만 몇 구절만이 히브리어의 사촌뻘인 아람어로 쓰여졌다.
그런데 당시의 많은 유태인들이 그리스 문화권 속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 이전의 3세기부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시(市)에 이민하여 살고 있던 유태인들은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 그리고 몇 권의 다른 책들을 당시의 국제어인 그리스말로 번역할 필요성을 느꼈다. 오늘날 미국으로 이민간 교포들의 제2세가 모국어를 읽지 못하게 된 것처럼 당대의 유태인 후손들도 조상들의 말인 히브리어를 읽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생긴 성서의 그리스역본을 ‘칠십인역 성서’(Septuaginta)라고 부른다. 70인역본은 얌니아의 정경목록에 들어 있지 않은 토비트서와 벤시라의 집회서를 정경으로 취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역본은 직접 그리스말로 저술한 마카베오 하권과 솔로몬의 지혜서도 수록하고 있다. 또 이 역본은 그리스 문화권 안에 살고 있던 첫 수세대의 그리스도 교인들에게 ‘성서의 권위’를 행사하였다. 그래서 신약성서의 저자들이 예의 역본을 읽었고 또 그들의 글에 인용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유다이즘의 경우에 얌니아의 히브리어 정경만이 성서로 통하였다.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얌니아의 히브리 성서를 정경으로 받아들였다. 가톨릭 교회는 기원후 4세기(그러니까 382년의 로마 주교회의)에 성서의 정경목록을 공식적으로 고정하였다. 트리엔트 공의회(1546년)는 382년 로마 주교회의(Synodus)가 확정한 정경을 재차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이 정경에는 소위 제2경전(Deuterocanonicus)으로 통하던 성서의 그리스어 책들이 포함되어 있다. 종교개혁에서 나온 교회들은 제2경전을 성서로 인정하지 아니했지만,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성서역본에서 소위 위경(僞經)이란 항목 하에 수록하고 있었다. 위경에 관하여 로셀(La Rochelle)의 신앙고백은 “이 책들이 아직 유익하지만 이 책들은 근거로 신앙의 조항을 결정할 수는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동방정교회들은 제2경전의 성서적 권위에 관하여 한 번도 공식적인 입장을 취한 적이 없었다. 정경에 관하여 이 같은 엇갈린 입장을 개선한 것은 교회일치운동의 덕분이었다. 1968년에 세계성서공회와 로마교회의 일치사무국은 획기적인 협정을 체결, 제2경전을 가톨릭과 개신교의 ‘공동번역’에 수록하도록 합의하였다. 따라서 대한 성서공회가 공동번역에서 ‘가톨릭용’과 ‘개신교용’을 분리시킨 것은 분명히 교회일치운동에 역행하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에 가위질을 하는 것은 편협한 분리주의(分離主義)의 소산이며 그 말씀에 언론통제를 가하는 것이다. 또 공동번역의 정경목록은 제2경전을 ‘그외의 문집’이란 항목하에 수록하고 있다. 한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다. 그것은 에스델서의 경우이다. 그리스어로 씌어진 에스델서의 제2경전 부분이 히브리어로 씌어진 원전과 너무나도 정교하게 섞여 있어서 그 자체로 일관성 있는 의미를 제공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여 공동번역의 편집자들은 에스델서를 두 가지 책으로 분리시켜 번역하였다. 그 첫 권은 히브리어에서 번역한 에스델서요, 다음의 책은 그리스어에서 번역한 에스델서였다. 후자는 제 2경전의 목록 안에 수록되었다.
이리하여 한국을 제외한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제2경전을 격하시키는 일 없이 성서로 받아들인 것이다. 단지 세계의 공동번역은 히브리 성서의 분류원칙을 따르고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전수된 그 분류 항목은 ‘오경’(Pentateuque), ‘예언서들’(Livres prophetiques), ‘그 외의 문집들’(Autres Ecrits)이다. 그리스어와 라틴어 성서의 역본들은 성서를 ‘오경’, ‘역사서들’, ‘시서(詩書)들’ 그리고 ‘예언서들’로 분류하였다. 가톨릭 신자들은 오랫동안 이러한 분류원칙에 익숙하였다. 하지만 공동번역의 분류원칙은 성서의 히브리어 원전의 분류순서를 따르고 있다는 이점을 지니고 있다. 또 히브리 성서의 분류순서는 어떤 의미로 성서의 여러 서책들의 문학유형을 존중하고 있다. 가령 여호수아서와 판관기(判官記) 혹은 열왕기(列王記) 들이 단순히 ‘역사서’라는 관점에서 읽을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역사적 의미’를 밝혀 주는 ‘예언자적 메시지’의 관점에서 읽어야 하는 것과도 같다.
유태교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마호메트의 이슬람교의 사람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약성서의 내력을 ‘책의 사건’이란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서구의 문예부흥 이후에 역사비평적 방법론에 입각한 성서 연구의 실적은 실로 눈부시고 방대하다. 문제는 한국의 성서독자들이 성서의 본문은 읽지 않고 오히려 400년 동안 누적된 성서에 대한 그 연구문헌들을 읽는 데 더 많은 시간과 정열을 쏟고 있다는 것이다. 학문적 방법론들은 성서를 읽는 데 필요한 한갓 도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성서에 관한 책들을 읽을 것”이 아니라 “먼저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 그 자체를 읽어야 한다.”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성 아우구스티노의 외침은 “성서를 집어 들고 읽어라”(tollo et lege!)하는 것이었다. 성서의 본문을 읽고 또 읽어 하느님의 말씀에 익숙해진 사람만이 그 책의 일관성 있는 메시지를 파악할 수가 있다. 성서 봉독에 필요한 학문적인 방법론과 그 연구 결과만을 읽는 것은 마치 어느 어머니가 아기를 목욕시킨 뒤에 그 물이 더럽다고 해서 10층 높이의 아파트 안방에서 아기가 들어 있는 채로 목욕물을 창밖으로 쏟아 버리는 것과도 같다.
현대의 언어과학적(言語科學的) 성서연구는 사학(史學)에 입각한 성서 연구의 방법론의 그 한계점을 시정하려고 한다. 성서본문의 통시성(通時性)만을 강조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그 기원에 가두어 버리려고 하는 고고학(考古學)적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씀은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현실적인 역사성도 함축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하여 언어학이 강조하는 바대로, 성서본문의 공시성(共時性)은 하느님 말씀의 ‘예언자적 성격’을 부각시키는데 공헌하고 있는 것이다. 주 하느님은 ‘알파요 오메가’이시다(묵시 1:6). 시작이요 마침이신 그 분이 하신 말씀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안에 수록되어 있으며 또 성서의 보통 독자들이 먼저 생명의 그 말씀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읽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야고 1:21 이하 참조). (徐仁錫)
[참고문헌] 徐仁錫 著, 오늘의 구약성서연구, 성바오로 출판사 1983 / E. 까베냑 · P. 그럴로 · J. 브리앙 著, 徐仁錫 譯, 성서의 역사적 배경, 성바오로 출판사 1981 / 徐仁錫 著, 성서와 언어과학, 성바오로 출판사, 1983 / B.W 엔더슨 著, 제석봉 · 이성배 譯, 구약성서의 이해 I, II, III, 성바오로 출판사. 1983 / 徐仁錫, 하느님의 백성과 성서의 탄생, 展望 14號 / A. Weiser,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1961 / J. Schildenberger, Literarische Arten der Geschichtsschreibung im Alten Testament, 1984 / P. Humbert, Rescherches sur les Sources egyptiennes de la litterature Sapientiale d’ Israel, 1929 / A. Neher, L’essence du Prophetisme, 1955.
구약 [한] 舊約 [영] Covenant in the Old Testament [관련] 계약 구약성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새로운 계약, 즉 신약(新約)이 맺어지기 전까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계약, 혹은 그 기록인 구약성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느님은 노아, 아브라함, 모세 등을 통해 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은 이스라엘 백성의 정치 · 경제 · 사회적 생활의 규범이자 법(法)이었고, 나아가 윤리와 신앙의 기준이었다. 구약의 기초는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해방된 출애급이라는 역사적 사건이다. 출애급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역사의 주도권이 하느님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느님 야훼야말로 모든 억압과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분이며, 인간에게 자유를 선사하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야훼만을 유일한 신으로 인정하고, 모세를 통하여 시나이산에 그분과 계약을 밎는다.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과 맺은 계약을 충실히 이행한다면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겠다고 약속한다(출애 19:5). 여기서 비로소 계약이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기반이 된다.
왜냐하면 계약을 충실히 지킬 때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반면, 계약을 어길 때는 하느님의 벌이 주어져 (출애 23:22-33, 레위 26:3-13, 신명 28:1-4) 이방인의 지배 아래에서 다시 노예생활을 강요당해야 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민족의 침입을 받아 파멸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이민족의 지배 하에서 억압과 수탈을 당할 때, 계약을 어긴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였다. 바빌론 유배 이후 새로운 계약[新約]에 대한 사상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호세아(4:2)와 예례미야(31:33)는 새로운 계약이란 석판(石版)에 새겨져 인간을 밖으로부터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속에 새겨져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신을 알게 하는 계약이라고 하였다. 즉 구약은 신약을 통해서 완성될 것임을 선언한 것이다. (⇒) 계약, 구약성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