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가톨릭의사협회 [한] 韓國~醫師協會 [영] National Federation of catholic Physician’s Guilds of

1968년 3월 가톨릭 신자들로써 발족된 의사협회. 1947년 4월 14일 방지거 사베리오회라는 가톨릭신자 의사들의 모임이 효시가 되어 6.25전쟁 중에는 눈부신 의료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1965년 5월 10일 서울 가톨릭의사회로 개칭함과 아울러 모임을 재정비한 뒤 1968년 3월 30일에는 서울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전국적인 가톨릭의사회의 피정을 개최하였고, 그곳에서 한국가톨릭의사협회가 창립되었다. 현재 국제가톨릭의사협회의 정식 회원국으로서 가톨릭 정신을 기본 이념으로 한 의도(醫道) 양양, 학술발전 및 의료봉사를 통한 지역사회의 복지향상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본부는 서울 강남에 있는 가톨릭대학 의학부 내에 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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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톨릭음악 [한] 韓國~音樂

한국에 있어서의 가톨릭 성가(聖歌)는 1784년 명례방(明禮坊)에서 천주교 집회가 시작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엄격한 의미에서의 가톨릭적인 성가, 즉 세계 보편적인 교회음악인 그레고리오 성가와 그 밖의 가톨릭 성가들은 1886년의 한불조약(韓佛條約) 이후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가 주어진 뒤에 시작되었다함이 마땅하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회의(1962~1965년) 이후 모국어(母國語)로서의 전례(典禮)가 가능해진 다음 한국 내에 있어서의 가톨릭 성가도 다양해지기 시작했고, 오늘날에는 통일된 성가사용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1. 박해시대에 있어서의 가톨릭 성가 : 1784년 창설된 한국 천주교회는 1785년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曺摘發事件)을 시작으로 하여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때까지 크고 작은 많은 박해를 겪으면서 대외적인 발전을 할 수 없었고, 따라서 교회음악도 대외적인 발전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박해 속에서도 계속된 신앙생활은 한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천주가사(天主歌辭)를 만들어 냈다. 이를 천주교성가가사(天主敎聖歌歌詞) 혹은 천주찬가(天主讚歌)라고도 한다. 이 천주가사는 조선조 후기의 대중가사인, 주로 4 · 4조 형식으로 된 천주교 신앙가사로서 엄밀히 말하자면 가톨릭 성가라고 할 수는 없다. 아울러 교회의 성음악은, 기도를 감미롭게 표현하거나 일치를 초래하며, 혹은 거룩한 의식을 더 성대하게 감싸 주면서, 전례행위와 밀접히 결합하면 할수록 더욱 거룩해질 것(전례헌장 제6장 112항)이라는 것과 같이 천주가사는 결코 전례적인 목적을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교화(敎化)와 수도(修道)의 목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가톨릭 성가의 기도를 감미롭게 표현하거나 일치를 초래한다는 측면을 갖고 있으므로 가톨릭 성가의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난다고 할 수도 없다. 천주가사의 시작 연도에 대해서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1777년 ‘천진암 · 주어사강학회’(天眞庵 · 走魚寺講學會)에서부터 시작되어 1930년 박제원(朴齊元)의 <소경자판가>로써 천주가사의 최종연대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천주가사 시대의 초기에는 주로 호교론적(護敎論的)이고 윤리적인 내용을 포함한 기초적인 교리를 그 가사로 했고, 비교적 박해가 완화되어 목판본 신심서적들이 발간된 1850년대 후반부터 1860년대 초반까지는 주로 성사(聖事)교육을 중심으로 한 성사가(聖事歌)와 신심수도를 중심으로 한 교훈가(敎訓歌)들이 많았고, 1876년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이후에는 창가조(唱歌調)의 영향을 다소 받으면서 개인 영성(靈性)이 심화된 자탄가(自歎歌) 등이 상당수를 이루면서 <경향신문>(1906년)과 그의 부록인 <보감>(寶鑑, 1909년)을 통해서 많이 발표되었다. 이들 천주가사 가사들의 중요한 특징들은, 모두 각 시대에 맞춰 그 시대에 가장 널리 알려진 교리나 신심서적의 내용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절대 생소한 내용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가장 대표적인 영향을 준 서적은 ≪사후묵상≫(死後默想)과 ≪성교절요≫(聖敎切要)이다. 당시 신자들의 영성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후묵상≫은 머리말, 사심판(私審判), 지옥(地獄), 연옥(煉獄), 천당(天堂), 공심판(公審判)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 내용으로부터 선종가(善終歌), 사심판가, 지옥가, 천당가, 공심판가가 이루어졌고, ≪성교절요≫로부터 신덕가(信德歌), 제경가(諸經歌), 선행가(善行歌) 등이 이루어졌다.

현재 전해 내려오고 있는 천주가사는 모두 186종에 이르고 있으나 전해져 온 가사 내용이 모두 원문과 같다고 볼 수는 없는데 이는 구전(口傳)에서 발생되는 잘못과 필사전승(筆寫傳承)에서 발생되는 잘못, 자료보관의 잘못 등이 그 이유이다. 그리고 전해져 온 가사의 작가 중 최양업(崔良業) 신부가 가장 많은 곡을 만들었다고 하나 많은 문제점들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같은 여려 문제점들 속에서도 천주가사가 박해시대에 있어서의 천주교회를 전승해 온 한국천주교회의 맥인 동시에 한국인의 신앙을 일치시킨 한국 가톨릭 성가의 모태임을 확실히 하고 있다.

2. 성가집의 발간 시작 : 일반 신도들이 모두 노래할 수 있는 가톨릭성가집의 발간은 우선 오선악보(五線樂譜)를 올바르게 볼 수 있는 음악교육과 성가집을 발간할 수 있는 인쇄시설이 가능했어야 하였다. 결국 이들 조건이 가능해질 수 있는 때는 1920년대로서 1922년 해주(海州)에서 프린트로 발간된 성가집이 있지만 현재 전해지지 않고, 1924년 뮈텔(Mutel, 한국명 閔德孝) 주교의 감준으로 종현(鐘峴, 현 명동) 성서인쇄소에서 발간된 ≪죠션어셩가집≫이 그 처음이다. 그런데 이 ≪죠션어셩가집≫이 발간되기 훨씬 전인 1911년부터 용산신학교에서는 사선(四線)악보로 된 그레고리오 성가의 성극(聖劇)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즉 1911년에는 라틴어로 프린트한 인쇄물로 성극을 했고, 1912년에는 사선악보에 우리말가사로 된 악보를 프린트하여 성극을 하였다. 그리고 1920년에는 사선악보와 라틴어 가사에 합창으로 된 악보를 프린트하여 김대건(金大建) 신부 성극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 그레고리오 성가가 가능했던 것은 1887년 용산신학교가 설립되어 전례 음악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며, 신학생들에게 한정되기 때문에 일반적인 가톨릭 성가집의 발간은 1924년의 ≪죠션어셩가집≫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성가집은 12㎝×18㎝ 크기의 책으로서 대림절, 성탄절, 사순절(四旬節), 부활절 등 전례시기별 성가와 성모, 성심, 성체 등 각 주제별 성가 등 모두 68곡이 수록되어있다. 오선악보와 1절 가사는 손으로 그리고, 쓴 것이며, 가사만 되어 있는 2, 3, 4절은 5호 활자 크기의 활판인쇄로 되어 있다. 이 성가집의 68곡 중 12곡의 가사는 천주가사의 <사향가>와 <삼계대의>에서 찾아볼 수 있고, 멜로디는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 1896년 9월 14일 프랑스어로 처음 출판된 ≪청년성가≫(Cantiques de la Jeunesse)와 1911년 역시 프랑스어로 출판된 ≪성가집≫(Recueil de Cantique), 1927년 홍콩에서 발행된 ≪시편과 노래≫(Hymni et Cantiones) 등에서 16곡의 같은 곡을 찾을 수 있다. 당시 발행인이 프랑스 선교사들이었고 그 밖의 곡도 8분의 6 혹은 4분의 3박자의 곡으로서 프랑스 성가와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거의 프랑스성가의 멜로디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1932년에는 재판이 나왔지만 내용은 거의 같고 순서만 바뀌어 있다.

한편 1911년 설정된 대구교구에서는 1928년 대구 남산동 성당에서 ≪공교셩가집≫(公敎聖歌集)이라는 프린트로 된 성가집을 처음 발간하였다. 1927년 12월 성탄 행사의 하나로 당시 해성(海星) 보통학교 학생들이 그레고리오 미사곡과 우리말 성탄성가를 하기 위해 프린트한 것을 1928년 남산동 주임 델랑드(Deslandes, 한국명 南大榮) 신부가 책으로 만들었다. 이 성가집에는 서울에서 발행한 ≪죠션어셩가집≫에서 25곡을 수록했고, 그레고리오 성가에 라틴어 발음을 우리말로 옮긴 것과 우리말로 번역한 그레고리오 성가도 수록하였다. 그 뒤 1936년 대구 남산동 성당에서 인쇄한 ≪조선어성가집≫이 간행되었는데 총 80곡으로서 서울에서 발간된 성가집에서 16곡이 수록되어 있고, 몇몇 곡은 서정도(徐廷道) 신부가 작사. 작곡 · 편곡한 곡도 있고, 그 외에 아직 출처를 알 수 없는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1938년에 재판이 되었지만 내용은 동일하다. 같은 해 원산교구의 덕원(德源)신학교에서도 가톨릭 성가집이 원산교구장 사우어(Bonifatius Sauer) 주교의 감준으로 발간되었는데 197곡의 우리말로 된 성가와 그레고리오 성가가 수록되어 있다. 197곡 중 우리말로 된 성가는 주로 독일어 성가책인 ≪Orgelbuch zum Cantate≫(1884), ≪Orgelbegleitung Katholischen Gesangbuch≫(1904), ≪Orgelbegleitung zu den Melodien des Gesangbuches≫(1911) 등에서 번역된 곡으로 그 출처가 확인된 곡은 45곡에 지나지 않으며, 독일어 성가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데 공헌을 한 사람은 당시 원산 해성보통학교 교장이던 오병주로서 독일 민요의 번역도 많이 했었다. 이와 같은 3교구에서 간행된 초기의 성가집들은 모두 프랑스 계통의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와 독일 계통의 성 베네딕토수도회 신부들이 편집한 것들로서 각각 프랑스와 독일의 성가곡들을 주로 수록하였고, 서울교구에서는 천주가사의 가사내용이, 대구교구에서는 서정도 신부의 소수의 작곡 편곡만이 첨부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전례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그레고리오 성가는 주로 신학생들과 수녀들에 의해 불려졌는데 이와 같이 한국말로 된 가톨릭 성가가 정착되기도 전에 그레고리오 성가가 불려졌던 것은, 당시 교황청에서 가톨릭의 모든 전례에 그레고리오 성가를 사용하도록 권고하고, 그 외에 지방 고유성가를 사용토록 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서정도 신부의 경우 한국사람으로서는 처음 오선악보에 의한 곡을 작곡한 사람으로서 홍난파(洪蘭坡)의 1920년 작품인 <봉선화>보다 전에 작곡된 곡이 대구에 있는 성 유스티노신학교에서 불려진 것을 알 수 있다.

3. 광복 이후의 가톨릭 성가집 : 오르간 반주용과 혼성 4성부의 합창곡으로 된 ≪가톨릭성가집≫이 1948년과 1951년 서울과 대구에서 각각 발간되었다. 물론 전혀 새로운 성가집은 아니었지만 오르간반주용과 혼성 4성부 합창곡으로 되어 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1948년 서울에서 발간된 성가집에는 그레고리오 성가에도 오르간 4성 반주가 첨부되어 있으며, 이문근(李文根)신부의 자작곡인 <복자찬가>가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1951년 대구에서 발간된 성가집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레고리오 성가는 아직 4선 악보로 되어 있었다. 특히 서울에서 발간된 ≪가톨릭성가집≫은 한국 가톨릭 성가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정선가톨릭성가집≫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데, 이 ≪정선가톨릭성가집≫은 1956년에 전국적으로 구성된 ‘통일가톨릭성가집발간위원회’에서 결의되어 발간된 ‘전국통일가톨릭성가집’으로서 그 역사적인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1948년 서울에서 발간된 ≪가톨릭성가집≫과 대동소이하다. 그러므로 ≪가톨릭성가집≫을 엮은 이문근 신부의 업적은 다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정선가톨릭성가집≫에는 라틴어발음이 한국말로 옮겨지고 오선악보로 표기된 전례용 그레고리오 성가곡 외에 128곡의 한국말 성가곡이 수록되어 있는데 신원식(申元植), 최민순(崔玟順) 신부가 작사하고 이문근 신부가 작곡한 <복자찬가>, <데레사의 노래>, <복자 안드레아 김 신부의 노래>, <혼배미사곡> 등 한국 특유의 곡들이 첨부되어 있다. 그 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각국의 모국어로 가톨릭 전례를 행할 수 있게 되고, 1973년 한국 가톨릭 주교회의에서 ‘성가의 대중화 보급’을 추진하자 각 수도원, 성당, 신학교 등에서 고유한 성가집들을 발간하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1975년 3월 개신교의 찬송가, 팝(Pop), 재즈(Zass), 가스펠(Gospel), 흑인영가 등이 수록된 ≪가톨릭공동체의 성가집≫이 발간되었고, 1975년 5월 ≪정선가톨릭성가집≫과 가톨릭 공동체의 성가집에서 선곡된 곡 외에 새로운 곡들을 수록한 ≪새전례가톨릭성가집≫이 발간되었다. 그리고 1975년 11월 이문근 신부가 작곡한 3가지 형태의 창미사곡이 ≪정선가톨릭성가집≫에 첨부되었다. 이와 같이 1962년 이후 한국 내에서는 한국 가톨릭 성가의 토착화를 위해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등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는 반면 가톨릭 성가의 고유성과 예술성을 상실해 가는 듯하다. 그리고 좀 늦은 듯하지만 1980년 5월 이후 현재 한국 가톨릭 주교회의에서는 ‘성음악분과위원회’를 설치하여 가톨릭 성가의 전통성 보존과 한국 가톨릭 성가의 토착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車仁鉉)

[참고문헌] 그레고리오 성가 이론, 한국순교복자수도회, 서울 1981 / 이문근. 교회와 음악, 가톨릭청년 1956. 4~1958. 4 / 경향잡지, 제330 · 332호, 1915; 제348 · 358 · 362호, 1916; 제 551호, 1924; 제660호, 1929 / 오숙영, 천주교성가가사고(天主敎聖歌歌詞考),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석사학위청구논문, 1971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69 / 가톨릭시보, 제555 · 562 · 579호, 1967 / 교회사연구, 제3집, 한국교회사연구소, 서울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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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톨릭여성연합회 [한] 韓國~女性聯合會 [영] Catholic Women’s Organization of Korea

가톨릭 여성들로 하여금 평신도로서의 사명을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자기생활에 실천함으로써 온 인류가 하느님 안에서 한 형제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1975년 5월 창립된 평신도단체. 1963년 11월 창립된 서울대교구 가톨릭여성연합회가 모체가 되어 1975년 5월 29일 한국가톨릭여성연합회 창립총회를 서울 분도회관에서 대전(大田) · 마산(馬山) · 원주(原州) 교구의 여성연합회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당시 전국 규모의 여성연합회를 독립적으로 운영하기 어려워 회장과 부회장은 서울대교구의 회장과 부회장이 겸직하고 제2 부회장만 선출하여 운영하였다. 1976년 서울 중구 필동에 회관을 구입하고, 같은 해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이 총재로 추대되었다. 1980년 세계 가톨릭여성연합회 정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주요 활동으로는 봉사활동과 교양강좌로서 각 교구별로는 부산과 광주교구가 1975년, 대구교구가 1976년, 인천 · 수원교구가 1980년, 제주교구가 1981년에 각각 창립되었고, 안동 · 전주 · 청주 · 춘천 4개 교구에 아직 창립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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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톨릭성령쇄신봉사자위원회 [한] 韓國~聖靈刷新奉仕者委員會 [영] National Catholic Charismatic Service Comm

성령쇄신운동(charismatic renewal)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전후하여 교회 내에서 일어난 교회쇄신운동 가운데 하나이다. ‘성령의 세례’(baptism in Holy Spirit)를 통하여 성령의 은사(恩赦)를 체험함으로써 하느님의 현존을 확실하게 의식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욱 밀접하게 관계를 맺으며, 동료들과 따뜻한 사랑을 나누고, 내적으로 충만한 평화와 기쁨 속에서 살며, 죄의 사슬에서 벗어나 보다 활기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성령쇄신운동은 교회를 쇄신하는 데 있어서 제도나 구조의 개혁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 성령의 은사에 의해서 교회는 개혁된다고 한다. 즉 쇄신이란 인간의 사상이나 계획에 따른 기술적인 측면, 과정상의 노력, 방법적인 측면 등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주어진다는 것이다. 성령쇄신운동이 시작되면서 교회 내에서는 많은 논란이 일어났다. 이상한 언어, 예언, 치유행위 등은 가톨릭교회 내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으로 교회 내 많은 사람들로부터 부정적인 반응을 받았다. 성령쇄신운동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은 아직 별로 없다. 성령쇄신운동이 한국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71년. 당시 까리타스회 선교사로 파견되어 ‘요한 보스코 기술교육원’을 설립, 운영하고 있던 시미드(Erna Schmid) 수녀가 미국에서 전개되고 있던 성령쇄신운동에 참여하고 돌아와 이 운동을 전파하였다. 메리놀회의 스틸프 수사(Bro. Deporres Stilp, M.M), 파렐 신부(Rev. Gerald Farrell, M.M), 슬라비 신부(Rev. Joseph Slaby, M.M)의 교육에 따라 서울뿐 아니라, 대구, 부산, 광주 등지로 이 운동이 확산되어 1973년 12월 5일 제럴드 신부를 중심으로 ‘성신운동 협의회’가 구성되었다. 이 단체는 ‘성령운동협의회’(1974년), ‘전국성령봉사회’(1975년), ‘한국가톨릭성령쇄신봉사자위원회’(1979년)로 그 명칭을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6년 5월부터 기관지 <성령쇄신>(월간)을 발행하고 있다. 서울시 중구 명동 2가 1번지 서울대교구청 내에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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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가톨릭사회과학연구회 [한] 韓國~社會科學硏究會 [영] Korean Catholic Academy of Social Sciences

한국가톨릭 사회과학연구회는 1982년 1월 29일 창립총회를 열고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이 연구회는 1981년 천주교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사회과학 심포지움을 가지게 되었을 때 거기에 참여한 한국 가톨릭 사회과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앞으로 한국 교회의 발전과 토착화를 위행 계속적으로 연구활동을 할 것을 다짐함으로써 발기되었다. 약 6개월의 준비 끝에 발족된 이 연구회는 가톨릭시즘에 입각하여 사회과학을 연구하고, 그로써 한국 교회가 한국에서 일어나는 사회문제에 대하여 복음적 · 교회적 입장에서 분석, 해명, 판단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출범하였다.

여기서 참여한 회원들은 주로 가톨릭 신자로서 대학에서 사회과학, 즉 정치학, 경제학, 경영학, 사회학, 법학, 역사학, 교육학, 인류학, 사회철학 등을 강의하거나 연구하는 교수들이었으며 현재 회원이 약 100여 명에 이르고 있다. 이 연구회는 발족 이래 발표회를 여러 번 가졌고, 특히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는 국제 학술심포지움을 가졌다.

이 밖에 이 연구소는 그간 2권의 논문집과 한 권의 단행본을 간행하였다. 최근 1984년의 정기총회에서 제2대 회장에 한용희 초대회장이 재선되어 앞으로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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